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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시 태어나다

by 아레테 클래식

기초군사훈련 5주 차 마지막 날. 눈 뜨자마자 느껴지는 긴장감은 어느 아침보다 더 날카로웠다. 생활관 창문 너머로 차가운 아침 안개가 흘렀고, 세면장 바닥엔 물이 얼어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물을 틀자 얼음장이 깨지는 소리가 ‘딱’ 하고 울렸다. 생도들은 말없이 모포를 개고, 구둣솔에 마지막 광을 내고, 흰 장갑을 가방에 정리하며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오늘, 진짜 생도가 되는 걸까?’


에녹은 누구보다도 그 질문에 예민했다. 유년 시절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태운 그 모든 고통과 기억들이, 오늘 이 하루에 검증되는 것 같았다. 기초훈련의 마지막은 단지 행정적 절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의식이었다. 소년이 사라지고 군인이 태어나는 통과의례였고, 과거를 묻고 미래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장례식이자 세례식이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 생도들은 일제히 침상 앞에 일렬로 섰다. 누렇게 빛이 바랜 군복을 벗고, 사관생도의 상징인 짙은 찬연한 예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마치 탈피하는 곤충처럼, 에녹은 자신이 이전의 자아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안감까지 각이 잡힌 그 예복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체계의 옷이었고, 전통의 옷이었고, 어쩌면 에녹이 죽은 어머니에게 바치고 싶던 영광의 껍질이었다.


흰 셔츠 위에 조심스레 예복을 입고 마지막으로 백장갑을 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에녹은 문득 한 문장을 떠올렸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이 된다고 했지.”


그러나 오늘, 그는 누구의 시선도 없이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낯설고, 멀었다. 그는 그 속에서 문득 어머니의 영혼을 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늦었다. 마음속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너, 여기까지 온 거니?”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군청색이었다. 기상 레이더 탑이 보이는 하늘 위로 국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드디어, 군악대의 행진곡과 함께 입교식이 시작되었다. 군가가 울려 퍼졌다. 생도들은 군가의 구절을 따라 불렀지만, 그 가사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육사의 생도! 조국의 미래! 군인본분 위국헌신!”


대열을 맞추고 거수경례를 하는 순간, 백장갑 위로 경직된 근육과 떨리는 손가락이 감지되었다. 군화 소리는 대지에 질서를 새기듯 울려 퍼졌고, 생도들의 눈빛은 차가운 유리처럼 빛났다. 그 가운데 에녹은 외쳤다.


“영광스러운 생도 되기를 맹세합니다!”


목이 쉬도록 불렀지만, 소리는 무기력했다. 그는 내면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살아남겠다. 나는 무너지지 않겠다. 나는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수천 명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이 의식은 공동체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입교식이 끝나자 곧 가족과의 인사 시간이 주어졌다. 생도들은 일제히 관중석을 향해 뛰어갔다. 눈에 띄는 부모를 향해, 혹은 가족 없는 친구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갔다. 그러나 에녹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이 흥분으로 가득 찼는데, 그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밀려오는 감정은, 손가락 끝마디까지 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관중석 왼편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내려왔다. 검은 패딩을 입고, 군화 같은 작업화를 신은 남자. 어릴 적 자주 봤던,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젠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 에녹은 걸음을 멈추고, 군모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 은호였다.


말없이 다가온 은호는 에녹의 양 어깨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그 손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에녹은 자신의 손보다 두껍고 투박한 손에서 어릴 적을 떠올렸다. 찬밥에 김을 싸서 먹이던 형의 손. 겨울밤, 이불속에서 서로 몸을 붙이고 자던 그 손. 어머니가 떠난 후, 유일하게 자신을 감싸줬던 손이었다.


“멋있다, 에녹아.”


형의 목소리는 떨렸다.


“진짜 멋있어. 어머니가 봤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녹의 가슴 어딘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쌓아왔던 단단한 내면의 벽이, 그 짧은 한마디에 산산이 조각났다. 심장은 크게 요동쳤고, 무릎이 흔들렸다. 눈을 감아도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건 고아로 살아온 수년의 슬픔이었고, 버려진 존재로서의 공허함이었고,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형은 그의 앞에 있었다. 말없이 등을 감싸주며, 그 절망의 흔적을 부드럽게 눌러주고 있었다.


수많은 가족들이 울고 웃는 연병장 한복판. 그 가운데 두 형제는 조용히 서 있었다. 말보다 손이 많았고, 눈물보다 숨이 깊었다.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했고, 과거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에녹은 그 순간, 처음으로 이해했다.


“사랑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손끝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다. 장교가 되어도, 또 실패하더라도, 다시 무너져도. 적어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형이 있었다. 그 눈물이 증거였다. 그리고 그것은, 훈련 중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첫 번째 눈물이었다. 에녹은 그것을 오래오래 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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