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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험난한 정의의 길

금기를 넘어

by 아레테 클래식

육사 본관 강의동 2층, ‘한국전쟁사’ 수업이 진행되던 오후였다. 이른 봄의 날씨답지 않게 창문 너머에는 묵직한 구름이 드리웠고, 강의실은 비장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전면 스크린에는 낡은 흑백 사진 하나가 비추어지고 있었다.


육사 1기와 2기 생도들이 미완의 군복 차림으로 방어선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 그들 중 상당수는 이름도, 군번도 없이 전선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가장 절박했던 시기에, 정규 장교로 임관되지도 못한 채 전선에 투입됐습니다.”


박태영 소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전후 그들은 육사 정규 기수에서 제외되었고, 군은 그들을 ‘예외적 생도’로 분류했습니다..”


강의실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에녹은 노트에 적던 펜을 잠시 멈췄다. ‘기억되지 않는 희생, 기록되지 않는 영웅들’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가 어린 시절 붙들었던 신앙과 정의에 대한 믿음과 이들의 불운한 역사 사이에 기묘한 평행이 그려졌다.


“그리고,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할 또 다른 흐름이 있습니다.”


박 소령은 슬라이드를 넘겼다. 화면에는 정장 차림의 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찍은 단체 사진이 보였다.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비밀 사조직, ‘하나회’입니다.”


에녹의 눈이 번뜩였다. 그 이름, 이미 수차례 뉴스에서 접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처음으로, 그 조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무엇을 파괴했는지를 정면으로 접하게 되었다.


“하나회는 군의 일체감을 앞세워 생도 시절부터 철저히 서열화된 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선후배가 아닌, 충성 맹세의 서열이었죠. 그들은 12·12, 5·17을 거쳐 군의 심장부를 장악했고, 민간 정치에까지 깊이 관여했습니다.”


“정치군인 아닙니까.”


한 생도가 무심히 던진 말에 강의실이 술렁였다.


“맞습니다. 그들은 군의 중립성과 전문성을 훼손했고, 광주에서 국민을 향해 총을 들었습니다.”


박 소령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 모든 건 사적인 충성에 기반한 권력 집단화의 결과입니다.”


수업이 끝난 뒤, 에녹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는 육사 11기 명단, 12·12 관련 문서,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기록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다. 자료가 쌓일수록 한 가지 생각이 뚜렷해졌다.


— 나는 이 시스템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그의 탐구는 곧 다른 생도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특히 3학년 생도 중 일부는 은밀히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너, 혹시 청백대열의 눈 밖에 나고 싶어서 그러냐?”


동기 생도 박도훈이 어느 날 다가와 낮게 말했다.


“그런 민감한 자료를 왜 파헤쳐? 괜히 의심받기 딱 좋아.”


에녹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해.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벌어지는 침묵의 폭력을 계속 덮는다면, 우리도 언젠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야.”


이 말을 들은 박도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며칠 후, 에녹은 생도대장실로 호출되었다. 엄정한 분위기의 사무실, 단단히 각진 제복을 입은 생도대장이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생도 김에녹. 귀관이 최근 도서관에서 열람한 문서, 그리고 수업 외 활동에 대해 보고받았다.”


에녹은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국방을 위한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도대장은 아무런 표정 없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귀관은 사상 검증 대상 생도로 지정되었다. 당분간 모든 활동이 감시될 것이다. 그에 걸맞은 처신을 기대하겠다.”


사상 검증. 그 말은 마치 차가운 낫처럼 에녹의 목덜미를 베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 학교는, 이 제복은, 누군가의 권력을 위한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는 확신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날 밤, 에녹은 훈련소 내 교정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바람은 부드럽게 지나갔지만 그의 결심은 단단해지고 있었다.


에녹은 사관생도 마음속으로 신조를 읊조렸다.


1.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

2.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3.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 길을 택한다.


‘어머니, 나는 군인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충성의 군인이 아니라, 역사를 직면하고 바르게 싸우는 군인이 되겠습니다. 안일한 불의의 길이 아니라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가겠습니다.‘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는 자는 고독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고독조차도, 침묵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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