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 비평
나는 이 글을 18번째 생일을 맞이한 우리 아이에게 바친다.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도 1등급 학생이 되기보다는, 자기만의 색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해주길 진심으로 응원하면서….
https://youtu.be/oduqAN5MfRI?si=XEoyL0bQ0AGsuMyr
Ballade No.1 in G minor, Op. 23, 영화 [피아니스트]
출처. 유튜브 안인모의 클래식이 알고싶다.
희미한 빛이 한낮에도 어두운 바르샤바의 거리를 간신히 비춘다.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틈으로 먼지 섞인 공기가 흘러들고, 총탄 자국과 벽돌더미가 마치 도시 자체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 잿더미 한복판에, 바짝 마른 피아노 한 대가 홀로 남겨져 있다. 피아노의 표면은 긁힌 흔적과 금이 간 자국으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검은빛을 잃지 않았다. 그 앞에 선 슈필만의 손가락은 떨리며 건반 위를 더듬는다. 그 순간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가 조심스럽게 공간을 채운다. 음표 하나하나가 깨진 유리조각처럼 공중을 맴돌다 이윽고 무너진 벽에 부딪혀 메아리친다. 포화와 굶주림의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음악은 잠시 모든 고통을 가리고, 시간조차 숨을 죽인다. 그 장면은 단순한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폐허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인간성의 마지막 불씨이며, 인간이 결코 짐승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목소리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제 인물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의 회고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바르샤바 라디오 방송국에서 쇼팽을 연주하던 촉망받는 예술가였다. 하지만 나치 점령으로 그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게토로 밀려난 유대인들의 삶은 식량 배급표에 따라 굶주림을 견디는 지옥으로 바뀌었고, 사랑하던 가족과 친구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처럼 슈필만도 벽돌을 나르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음식을 뒤지며 생존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손가락이 닿아야 할 건반 대신 벽돌과 먼지뿐인 현실이었다. 피아노 앞에 설 수 없는 그의 삶은, 단순히 음악가의 삶이 망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그려내는 것은 이 끔찍한 몰락 속에서도 인간이 끝내 붙잡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예술이자, 존엄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레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떠올리게 된다. 1943년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유대인들의 최초 조직적 무장 저항이었다. 이들은 죽음이 확실시된 상황에서도 총을 들었고, 자신들이 더 이상 단순히 순순히 학살당하는 존재가 아님을 세상에 알렸다. 비록 봉기는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게토는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 불꽃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 저항에 불을 지폈고, 그들 스스로 인간임을, 그리고 존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선언이었다. 이 저항의 상징은 이후 바르샤바 게토 영웅 기념비로 남게 되었고, 1970년 독일 빌리 브란트 총리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사죄한 장면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그 장면은 정치적 제스처를 넘어, 한 민족의 절규와 상처 앞에 인간이 보여야 할 존엄의 몸짓으로 기록되었디.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이 무장투쟁의 장대한 역사적 서사 대신, 무기를 들 수조차 없었던 한 예술가의 침묵 속 저항을 조명한다. 이는 매우 독특하며,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왜냐하면 슈필만은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으로 내몰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음악을 마음속에서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슈필만이 연주하는 쇼팽의 발라드는 그저 평범한 클래식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이며,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영혼을 증명하는 언어였다. 한때 수많은 청중 앞에서 당당히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가 이제는 폐허 속에서 군복 입은 독일 장교 앞에서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은 깊은 아이러니를 빚는다. 나치 장교 호젠펠트가 그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는 장면은,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선과 감수성이 살아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음악이 잠깐이나마 적과 희생자의 경계를 허문다는 사실은 놀랍도록 아름답다. 하지만 이 장면은 동시에 잔인하다. 음악은 둘 사이를 연결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피와 죽음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슈필만은 연주를 끝낸 후에도 여전히 숨어야 하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폐허 속에서 쥐처럼 움직여야 한다. 이 극단적 대비야말로 영화가 던지는 삶의 비참함과 아름다움의 본질적 질문이다.
그렇다면 비참함이란 과연 무엇인가? 『피아니스트』를 보면 비참함은 단순히 물리적 궁핍이나 굶주림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부정당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할 기회를 빼앗길 때 비로소 가장 깊어진다. 슈필만에게서 가장 비참했던 순간은 피아노를 칠 수 없던 시간들이었다. 손가락이 굶주림으로 뼈만 남았을 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자신이 음악가임을 증명할 무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보다 더 잔인한 모멸은 없다. 그러나 영화는 말한다. 인간은 그런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끝내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바르샤바가 무너진 자리 위에서 울려 퍼진 쇼팽의 발라드는 한 인간이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선언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구원의 종교적 기적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는 존엄의 불꽃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 앞에서, 『피아니스트』는 단순히 생존을 찬양하지 않는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영화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살아남아야만 존엄을 증명할 기회도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슈필만이 끝내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그는 다시 피아노 앞에 설 수 있었고, 다시 쇼팽을 연주할 수 있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처럼 총을 든 영웅적 저항은 아니었지만, 슈필만의 조용한 투쟁 역시 역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저항의 방식이었다. 우리가 지금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이 고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이 아무리 잔혹해도, 인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음악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가 1970년 무릎을 꿇은 그 장면은 세계가 목격한 가장 숭고한 사과였다. 그 무릎은 한 나라의 수치가 아니라, 과거를 직시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인간적 책임의 표지였다. 『피아니스트』 또한 같은 문맥 안에 놓여 있다. 피아노 앞에 선 슈필만의 손가락은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패배가 아닌 존엄의 몸짓이다. 그 몸짓은 말한다. 인간은 잔혹한 역사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이고자 하며, 반드시 다시 노래하리라는 것을. 폐허 위에서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한 슈필만처럼, 우리 또한 비참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놓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은 결코 역사가 빼앗을 수 없는 가장 깊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거창한 철학자의 사색 속에서만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삶을 조금만 정직하게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울려 퍼진 쇼팽의 발라드가 그 물음을 되살려낸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도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이제 전쟁터에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도 저마다의 전쟁을 견디고 있다. 직장에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회의 속에서 자아를 잃어갈 때,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 의무와 짐으로만 느껴질 때, 오랜 꿈이 잊힌 채 월세 고지서 앞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종종 이름 없는 게토 속에 갇힌 기분을 느낀다. 누군가는 가난으로, 누군가는 관계의 단절로, 누군가는 정체성과 목적의 상실로 인해 서서히 붕괴된다. 이러한 일상 속 비참함은 포화와 굶주림만큼이나 인간을 갉아먹는다. 누구도 피아노를 부수진 않았지만, 우리 손은 점점 건반을 잊는다. 이렇듯 현대인의 비참함은 조용하고, 느리며, 때로는 자각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름다움을 지켜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피아니스트』가 보여준 슈필만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은유다. 그는 피아노 앞에 서지 못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그 소리를 지우지 않았다. 피아노가 없을 때에도 그는 음악가였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통찰을 준다. 삶이 당신을 망가뜨리려 할 때, 당신만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
평범한 삶 속에서도 우리는 저마다의 ‘피아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예술일 수도 있고, 노동일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자신만의 언어, 침묵 속 신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외부로부터 박탈당하더라도 스스로 기억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의 끝,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방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시를 밤새 적는 일, 혹은 가족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정성껏 차려주는 일 — 이런 모든 행위가 우리 안의 음악을 지키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타인의 음악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슈필만의 생존은 자신 혼자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생존은 낯선 독일 장교의 ‘이해’와 ‘기억’ 속에서 가능해졌다.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순간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서로를 폐허 속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존재다.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는 일이 곧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음악이 사라질 때 함께 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 절망 속에 있을 때 다시 피아노 앞에 앉도록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작은 일상적 실천이, 우리가 아름다움을 끝내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결국 삶은 거대한 승리나 서사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오히려 포기하지 않는 일상의 끈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건반을 두드리는 행위, 사랑이 식어가는 관계 속에서도 다시 말을 걸고, 귀 기울이는 순간들이 삶을 존엄하게 만든다.
『피아니스트』는 그런 삶의 태도를 가르쳐준다. 전쟁은 지나갔지만, 우리 안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무너진 삶 속에서도 끝끝내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리고 서로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지켜줄 때,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이 질문 앞에 선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제 영화는 더욱 분명히 대답한다.
“자기만의 음악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타인의 음악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비참함 속에서도 끝내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