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집: 사유의 집, 자연의 거처
1. 괴테의 정원집: 사유의 집, 자연의 거처
“거만해 보이지 않네,
높은 지붕과 낮은 집.
이곳을 찾은 이들은
모두 기분 좋은 마음을 얻었네.
가느다란 나무들의 푸른 잎들,
내가 심은 것들이 위로 자랐네.
정신적인 창조와 돌봄,
그리고 성장이 여기 함께 있었지.”
<괴테가 1827년에 쓴 시>
독일 바이마르(Weimar)는 고전주의 문학과 예술이 꽃피운 도시로, 이곳을 고전주의의 중심지라 부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일름(Ilm) 강을 따라 산책로를 걷다 보면, 숲과 정원이 교차하는 경계 지점에 조용히 숨어 있는 작은 집 한 채가 시야에 들려온다. 이 집은 화려한 궁전이나 웅장한 도서관이 아니라,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선택한 삶의 또 하나의 거처였다. 그곳이 바로 괴테의 정원집, 독일어로 Goethes Gartenhaus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 괴테는 이 집에서 그의 문학과 철학, 자연철학을 깊이 사유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연과의 조우 속에서 창작의 깊이를 더했고, 식물과 계절의 흐름에 귀 기울이며 삶의 리듬을 되짚었다.
이 정원집은 단지 거주 공간이 아니라, 그의 삶의 철학을 구현한 실험실이자 길 위의 포착된 정류장과도 같았다. 1776년, 바이마르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로부터 하사 받은 이 정원집은 그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담은 장소였고, 이후 독일 문학사의 중요한 상징물이 되었다. 괴테는 이곳에서 당시의 문학 흐름인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속에서 내면을 관조하며 글을 쓰고, 자신과 자연, 세계를 연결하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그는 이 공간에서 식물학에도 깊이 몰두했고, 마침내 『식물의 형상변화(Die Metamorphose der Pflanzen)』라는 작품을 통해 생명과 형태의 철학을 정리했다. 또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한 그의 초기 명작들이 바로 이 정원집의 햇살과 바람, 꽃내음을 머금고 탄생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의 햇살을 품은 그는, 자연과 문학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했다. 정원집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와 들꽃, 장미 덩굴과 살랑이는 바람은 그의 문장과 사유 속에 스며들었고, 때로는 문학의 주제가 되었으며, 또 자연철학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자극했다. 이 작은 공간은 그저 머무르는 집이 아니라, ‘다시 나아가기 위한 뿌리의 장소’였으며, 삶과 사유가 하나로 교차하는 교차로였다. 그는 이 정원집에서 감성과 이성, 고전과 현대, 내면과 외적 세계 사이의 균형을 찾고자 했고, 그 탐색은 단절이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인문정신의 실천이었다.
결국 괴테의 정원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문정신의 표상’이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책상 위 펜촉 하나까지 그의 사유와 시선이 닿은 흔적들이다. 이곳은 “문학이 일상이 되고, 철학이 자연과 어우러진다”는 메시지를 아름답게 구현한 공간이며, 오늘날에도 인간과 자연, 언어와 사유, 삶과 작업 사이의 균형을 꿈꾸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괴테가 여기서 보낸 시간은 단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삶의 방식이자 교육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2. 왜 여주에 괴테의 정원집이 있을까: 사유와 교육의 새로운 풍경
경기도 여주, 남한강을 따라 펼쳐진 들판 너머 한적한 마을. 이곳에 최근 ‘괴테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인문교육과 사유의 실험을 위한 공간이 조성되었다. 그 중심에는 독일 바이마르의 괴테 정원집을 본뜬, 그러나 한국의 전통 한옥 양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건물이 있다. 이 집은 간결한 목조 구조와 붉은 지붕을 갖추었으며, 창밖 햇살의 방향, 사방으로 바람이 통하는 길, 정원과의 조우 방식까지 원본의 형태를 재현했다. 동시에 한국의 자연과 기후, 문화에 맞춰 구조와 재료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건물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괴테 정신의 장소’를 이 땅에 재현하려는 시도였다.
이 프로젝트를 이끈 이는 서울대학교 독문학과 명예교수 전영애다. 그녀는 오랜 세월 괴테를 연구하고, 그의 사유와 작품을 한국어로 옮긴 세계적 괴테 연구 전문가이다. 2024년, 그녀는 여주 걸은리에 바이마르의 정원집을 닮은 집을 직접 짓고, 괴테 정신을 한국 땅에 이어놓는 작업을 완성했다. 그녀의 의도는 단순한 건축적 도입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 교육이 지나치게 성과 중심, 지식 암기 중심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생각하는 인간’을 키우기 위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었다.
전영애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20년 전에 누군가 저에게 ‘10년 뒤에 뭐 할 거냐’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좋은 책을 번역하며 살아왔고, 그 책들의 후기만이라도 모아 책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말은 책임이라고 믿었기에, 그 후기를 모아 글을 엮었고, 10년 만에 그것이 책으로 돌아왔습니다. 젊은 날은 늘 앞이 깜깜했지만, 최선을 다했어요. 그것이 길을 내는 일이었는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길이 생겨나 있었습니다.”
그가 괴테의 정원집을 직접 방문했을 때, 오래된 벽이나 낡은 가구 그것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 집이 괴테의 삶의 태도를 오롯이 담은 공간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문학과 철학이 일상과 자연 속에 뿌리내린 공간, 삶과 사유와 자연이 공명하는 흔적이 담긴 장소였다. 그는 말하길,
“저 작은 집의 방 하나를 꼭 재현해보고 싶습니다. 괴테의 집을 돌아보고 나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공간으로 꾸미고 싶어요. 이 작은 집을 따라지을 수만 있다면요.”
그렇게 해서 세워진 여주 괴테 마을의 정원집은 단지 문화재 복원이나 외국 건축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괴테가 남긴 ‘사유의 집’을 이 땅에서 되살리려는 교육적인 선언이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교육 풍경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이자 대안적 시도이다. 한국 교육이 성과와 서열, 암기 지식을 강조해 온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와 질문하며 사유하는 인간’을 길러내려는 새로운 방법론인 것이다.
괴테는 자연과 더불어 생각하고, 내면과 우주의 질서를 사유하며, 삶 자체를 배움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학습이 아닌 성찰의 장소, 앎을 넘어 질문을 품는 공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괴테의 정원집은 ‘앎의 장소’를 넘어, ‘질문하는 인간’을 키우는 성소였다. 여주 괴테 마을의 정원집도 바로 그 정신을 한국에서 계승하고자 한다. 도시의 소음과 효율성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머무르고, 느리고 깊게 배우며, 문학과 예술, 생태와 철학이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청년들이 괴테처럼 자연을 걷고, 꽃을 관찰하고, 시를 쓰며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원은 배움이 되며, 집은 성찰이 되고, 공간은 인간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 된다. 괴테가 일름강을 따라 걸으며 자신만의 문장을 써 내려갔듯, 경기도 여주의 정원집에서도 많은 이들이 대자연에 둘러싸인 정원 속 집에서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괴테마을 ’ 젊은 괴테의 집‘책상 위에는 여전히 괴테 정원집의 사진과 설계도가 놓여 있다. 건축은 끝났지만 그 사유의 집을 채울 무수한 삶의 설계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저 창 너머로, 과거 괴테가 바라보았던 숲과 정원이 보이듯, 여주에서도 또 하나의 정원집이 조용히 많은 이들의 삶의 건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