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어디로 가야 하나
5.
잡지사의 오후는 나른하고 조용했다.
사무실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 짧은 자료취재를 마친 명진아가 자리에 막 돌아와 있었다.
3시가 넘자 광고사원 김성호가 평소 같지 않게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더 날카로워진 눈매에 입가가 굳어져서 들어선 김성호에게서 달큰한 술냄새가 풍겼다.
원래 검게 그을린 피부인데 낮술을 한잔하고 들어선 그의 얼굴은 더욱 검붉어져 있었다.
검은 봉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낡은 빌로드 천소파에 풀썩 주저앉는 김성호의 낯빚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위트가 있는 사람이라 저렇게 가라앉은 모습을 처음 본 명진아는 인사를 건넬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먹다 남은 술인가? 저걸 왜 들고 다녀..'
명진아의 인상이 슬쩍 찌푸려졌다.
"한잔 하셨네요..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슬쩍 한마디 건네며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명진아.
김성호는 대답 없이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리고 소파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
시골을 떠나본 적 없는 김성호가 도시로 일터를 옮긴 건 2년 정도 되었다.
시골에서는 할 일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여유가 있는 듯 전혀 여유롭지 않은 것이 농사일이었다.
시기를 두고 기다려야 할 일들도 있지만 늘 촉각을 세우고 신경을 써야 할 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일하는 만큼의 수입도 마땅치 않았고 더구나 좁아터진 시골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것은 김성호의 성에 차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피가 끓고 몸이 들떠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32살이 되던 해에 아내와 어린아이를 시골에 떼어놓고 무작정 도시로 나선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먼저 도시로 나가 얼른 자리를 잡고 가족들을 데려 오겠다고 계획했다.
농사일만 하던 김성호가 도시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가 평소 소원하듯 번듯하게 양복을 빼입고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할 수 있는 일은 영업직뿐이었다.
처음, 작은 생활광고 신문사의 광고사원으로 적응하던 중, 그곳 신문사에 지인을 만나러 들렀던 박편집장과의 인연이 지금 잡지사까지 이어졌다.
박편집장은 김성호가 아직 광고직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보이긴 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고 인간관계의 본능적인 기술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김성호도 형님처럼 친근하고 따뜻하게 자신을 대해주던 박편집장을 따라 창간잡지사의 어려운 영업실태를 알면서도 큰 망설임 없이 이직한 것이었다.
처음 몇 번은 박편집장과 발행인이 김성호를 데리고 몇 군데 업체를 방문했다. 광고주로 찍어놓은 유력한 업체들에 들러 창간잡지의 발행을 알리고 김성호에게 분위기도 익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발행인은 예비 광고업주들과 허물없이 인사를 나누고 여유롭게 잡지발행에 대한 얘기도 슬쩍 끼워 넣으며 너스레를 잘 떨었다. 편집장도 평소의 과묵함을 벗어놓고 사람들이 솔깃해할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을 꺼내면서 화기애애한 대화에 김성호를 밀어 넣으려 노력했다.
처음에 발행인은 김성호를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보기도 했다. 야무져 보이지만 시골에서만 뼈가 굵은 사람이 광고를 얼마나 따올까 불안했다.
근데 의외로 김성호에게는 상대방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말수가 없는듯 하다가도 맥락을 놓치지 않고 재치 있게 툭 던지는 김성호의 재담에 사람들이 눈길을 주곤 했다. 검게 그을려 도시적인 느낌은 없지만 김성호의 날카로운 눈매와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선은 도시사람이 갖지 않은 매력을 품고 있었다. 조급함이 없이 여유가 느껴지는 김성호에게 발행인도 믿음이 갔다. 일을 할 때 자못 진지해지는 모습에서 발행인은 김성호의 진정함을 보는 듯했다.
사람 만나는 일이 업무라 김성호는 오전시간 사무실에 잠깐 출근했다가 믹스커피 한잔에 기자들과 농담 몇 마디를 나누다 거리로 나서곤 했다. 퇴근은 외부에서 바로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후 시간에 사무실에 들어와 더 검붉어진 얼굴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호님, 오늘은 좀 여유 있으시네요, 바로 퇴근하시더니 사무실에 오신 거 보니"
명진아는 눈치를 보다가 김성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허공만 응시하던 김성호는 한 박자 느리게 명진아 쪽을 바라보았다.
"... 음... 명기자.. 아직 퇴근 안 했네"
"아직 퇴근시간 아니니까요, 편집장님 만나러 들어오셨어요?"
마침 박편집장이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성호씨,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사무실에 와있어?"
"..."
명진아는 편집장과 김성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계속 대꾸가 없던 김성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예에, 편집장님, 그리 됐습니다... 명기자,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박편집장이 김성호의 얼굴을 살피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 안 좋은 일 있었어요? 그래서 한잔 하신 거네요"
박편집장을 바라보면서 명진아가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그때 김성호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반으로 접힌 만 원권 뭉치가 탁자 위에 흩어졌다. 30장 정도 되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아세요, 편집장님. 어떤 아줌마가 나한테 이걸 줬어요. 미치겠네 정말."
일순간 편집장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명기자도 아무 말을 못 했다.
"성호씨, 일어나. 나가서 얘기하자. 명기자도 한잔 할래?"
편집장은 일단 김성호를 진정시키고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집장이 앞장서자 김성호는 순순히 편집장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명진아도 작성하던 기사를 얼른 저장하고 책상 위는 대충 밀쳐놓고 그들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