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불씨가 꺼질 때
6.
아직 저녁장사를 시작하기 전이라 식당은 한산했다.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이 되기 전 식당들은 조용한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는 시간이었다.
편집장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편집장이 가득 따라준 소주잔을 들어 김성호가 얼른 입안에 털어 넣었다.
편집장은 김성호가 말을 시작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명진아도 쭈뼛쭈뼛 소주잔을 받아놓고 기본안주에 젓가락질만 하고 있었다.
"편집장님, 나 여기서 일 못할 것 같습니다"
"성호씨, 뭣 때문에 그러는지 얘기해 봐. 오늘 어디로 갔었는데?"
"... 지난번 발행인님이 소개해준 사장이요... 자꾸 연락이 오고 귀찮게 하는데 한 번은 가 봐야 할 것 같아 갔었어요"
"아... 대출... 거기 목소리 큰 여자.. 사장?"
발행인이 알고 지내는 대출 관련업자들을 몇몇 소개받았었다. 대출업종은 그럴듯하게 잘 포장해서 광고해 주면 광고비도 후하게 잘 받을 수 있는 괜찮은 고객들이었다. 소개 자리에서 유독 목소리가 크고 과장된 제스처가 많았던 장사장, 그녀가 김성호를 굉장히 맘에 들어했던 기억이 편집장도 어렴풋이 났다. 그날 장사장의 찜찜한 과잉친절을 떨쳐내느라 김성호도 애를 먹었었다.
그러고는 편집장은 잊었지만 김성호는 자신의 업무 때문에 연락을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며칠 전부터 전화가 와서 한번 들르라고, 그러는데 안 가보기도 그렇고... 얼른 얼굴만 보이고 와야지 싶어 점심에 갔었어요.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술을 막 시켜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거예요, 대낮부터. 소개도 받은 터라 좋게 대하려고 했는데 점점 이상한 거예요. 자꾸 허벅지를 만지고 어깨에 기대고..."
다시 화가 올라오는지 김성호는 소주를 한잔 더 마셨다.
편집장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골치가 아파왔다.
"그러면서 나한테 자기 애인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광고도 비싼 걸로 내주고 나한테 용돈도 주겠다면서... 하... 이런 미친년을 상대해서 돈을 벌어야 되는 겁니까. 그냥 웃어넘기면서 좋게 분위기를 바꿔볼라 했는데 자꾸 사람을 건드리잖아요, 짜증 나서 정말.."
"잘 둘러대고 그냥 일어서지..."
김성호를 질책하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려 편집장은 김성호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저도 그랬지요, 어색하지 않게 일어서려고 병신 같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그랬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현금봉투를 나한테 쥐어주는 거예요"
봉투 밖으로 얼핏 보이는 만 원권 다발을 본 순간 김성호는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이게 뭔가 싶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김성호를 두고 장사장이 먼저 일어섰다.
"성호씨, 그럴 거 없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담에 우리 또 봐"
피식거리는 웃음을 흘리고 장사장은 먼저 나갔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명진아는 김성호보다 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요, 영화도 아니고, 편집장님. 이건 신고해야 돼요"
명진아의 신고하라는 말에 김성호가 더 놀라는 눈치였다. 김성호도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터라 놀라면서도 함께 분노해 주는 명진아가 고마웠다. 혼자 덜 떨어지게 오버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는데 명진아의 확실한 대꾸가 김성호에게 오히려 힘이 되었다.
하지만 편집장은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성호씨, 명기자, 진정해.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돈은 다시 돌려드리고 와. 빠를수록 좋겠지.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게 되더라고. 거기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
편집장은 말을 고르는 듯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다 비슷할 거 같지만 알고 보면 너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세상이야. 그 사람들 사이에서 살벌한 전쟁을 겪어내는 게 우리들 삶이고. 이런 데서 못살겠다 싶지만 우린 던져졌으니 살아낼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다 성호 씨처럼 안 겪어도 좋을 일을 겪기도 하고... 그래도 다들 괜찮은 척, 상처가 아파도 다 나은 척하면서 살아가게 되더라고. 근데 우리만 그런 건 아닐 거야. 다들 그렇게 괜찮은 척 살아. 그래서 행복을 그렇게 소원하는 모양이야"
"... 모르겠어요, 그래도 좋은 사람도 많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명진아는 그저께 만난 고덕구 어르신을 떠올리며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보통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망가뜨리려고 하는 것들은 처벌을 받아야 되는 거 아닌가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넘어가니까 그런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람을 막 대하는 거예요"
"그걸로 처벌이 될 거 같지도 않고... 돈의 힘으로 굴러가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인간다움과 선함은 참 부질없고 힘이 없는 가치가 된단 말이야, 서글프지만 현실은 잔인한 면이 있어"
"그럼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희망이란 게 있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사는 건 어떤 희망이 있죠?"
명진아는 마치 고덕구 어르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더 날을 세웠다. 명진아의 삶도 그 연장선 어디쯤에 같이 있다고 여겼는데 철없는 사회초년생의 환상쯤으로 여겨진다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복잡하지 않고 선명한 기준으로 살 수는 없는 걸까. 명진아가 읽은 책 속에서는 선과 악이 참 선명한데 현실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는 모든 게 엉켜 경계가 모호했다.
희망이 꺾이듯 김성호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마누라랑 애가 시골집으로 와서 같이 살자고 맨날 성환데... 요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내가 도시로 가고 싶어 하니 마누라는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혼자서 아이 키우는 것도 힘들고 가끔 한번 보는 제 얼굴이 점점 딴 사람처럼 보인다고 싫다고 해요.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인대요"
김성호는 자신이 도시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땅을 일구고 산다는 건 하염없는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했다.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옮기고 수확하는 모든 과정은 농부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과 자연의 흐름을 기다려야 하고 느긋해져야 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상황마다 촉각을 세우고 맞추어야 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김성호는 자연에 순응적으로 사는 게 답답해 시골이 자신과 안 맞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자신답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시골생활이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가족들을 생각하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공허한 말과 헛웃음이 앞서는 도시생활은 알맹이 없는 삶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속내는 마음속 깊이 숨겨두고 얕은 수로 살아내느라 고단한 곳이 도시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김성호는 도시에 정착하리라던 처음의 계획을 계속 지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김성호의 가슴속 불씨 하나가 사그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