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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Apr 11. 2024

<코리안 티처> 시간강사-버텨내는 삶에 관하여

서수진 소설-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그녀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살아남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것, 버텨내는 것, 끝내 살아내는 것.


소설을 쓰는 도중에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터졌다. 한국어학당의 규모가 크게 줄었고, 수많은 강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나 역시 호주에서 수업이 모두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장되면서 실직 상태가 되었다. 벼랑 끝에서 소설을 쓰는 기분이었다. (작가의 말, 책 273쪽)


작가는 호주에서 한국어학당 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을까. 경험은 때로 소중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준다. 그녀는 그렇지만 강사 일자리를 잃고 벼랑 끝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냈다.


소설에 나오는 네 명의 여자 주인공, 선이, 미주, 가은, 한희는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국내에서 유명한 H대학교 어학당 강사가 된다. 교수가 아니라 강사라는 직함은 이제 학생들에게도 널리 퍼져서 수업시간에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강사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많은 분들은 이 책을 '여자 고학력 시간강사'의 비정규직 업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강사'라는 직업군 앞에서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크게 없다고 본다. 작가가 여자이고, 여자의 입장에서 남자들에 비해 조금 더 차별을 받는다고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꽤 오랜 기간 시간강사로서 때로는 교수님 소리를 듣고, 때로는 강사님 소리를 들으면서 이 학교 저 학교 떠돌아다녔다. 그래서 나는 시간강사라는 허울좋은 직업이 얼마나 대한민국의 가정경제를 위험하게 무너뜨리는 직업군인지 잘 안다. 나도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과 똑같은 열망으로 빚을 내어 석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또 빚을 내어 박사과정까지 이어갔다. 열심히 하면, 정말 열심히 하면, 어쩌면 전임교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100퍼센트 불가능한 희망을 안고 그렇게 공부하며 시간강사의 길을 걸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산더미 같았지만, 아직도 다 갚지 못한 석사 학자금 대출금과 월세, 각종 공과금을 생각하면 더 붙어 있어야 했다. 방학마다 여행을 다니느라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미주는 문득 막막해졌다. (95쪽, 미주편)


그래서, 대쪽 같은 성격을 가졌던 미주도 원장의 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책임강사였던 한희가 임신한 몸으로 자기가 그 어려운 일을 맡겠다고 손을 들었을 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끝내고 나면 받는 학생들의 강의평가표. 그 점수에 따라 강사 자리가 연명된다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강사들은 갑을병정의 정이 될 수밖에 없다. 강사는 학생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임강사였던 한희가 임신한 몸으로 자기가 그 어려운 일을 맡겠다고 손을 들었을 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끝내고 나면 받는 학생들의 강의평가표. 그 점수에 따라 강사 자리가 연명된다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강사들은 갑을병정의 정이 될 수밖에 없다. 강사는 학생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다.


"지난 학기에 우리 반에 또라이 하나가 있었는데, 수업 시간에 얼마나 떠드는지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걔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는 거야. 그러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내 강의평가를 하더라니까. 누가 갑인지를 보여주겠다는 거지." (122, 미주편)


 강사는 학과장 눈밖에 나서도 안 된다. 학과장이 오늘은 학교 ㅇㅇ 행사 때문에 학생들을 그쪽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면 아무말 없이 가방을 다시 꾸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3년을 그렇게 공부하고 나니 선이는 학원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들, 과목명으로 불리는 강사들, 독서실 총무 외에는 만나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선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끔 "저기요"라고 불릴 때가 있었다.


"저기요, 펜 떨어졌어요."

"저기요, 혹시 한국사 교실이 어딘지 아세요?"

"저기요, 이번 달 이용료 아직 안 내신 것 같은데......"


그때마다 선이는 얼굴을 붉히며 펜을 줍고, 옆 교실을 가리키고, 지갑을 꺼냈다. "감사합니다"라든지 "죄송합니다"라는 식의 말을 하면서 그것이 그날 자신이 처음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34쪽, 선이 강사편)


1인칭 소설이 아니어서 참으로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선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주인공 이름이 선이인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가 3인칭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주어서, 선이는, 선이의, 선이가,처럼 선이의 이름이 책에서 불려졌다. 나는 선이의 이름이 사라지는 이 부분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책장을 덮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영영 사라지지 않도록 입 속에서 혼잣말로 조용히 이름을 불러주었다.


"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 기관에서 결석했다고 전화를 돌리는 게 말이 돼요? 전화를 안 받으면 애를 잡으러 가라고 할 태세예요."

강이슬은 선이를 향해 큰 눈을 깜빡거렸다.

"네, 정말 말이 안 되네요."

선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까라면 까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이에게 한희의 요구가 정당한지 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이에게 중요한 것은 한희가 책임 강사라는 것이었다. (41쪽, 선이 강사편)


절박한 벼랑 끝에서는 정당함 혹은 부당함에 대한 기준이 사라진다. 먹고 사는 일, 살고 죽는 일, 생존이 걸린 상황에 닥치면 도덕과 윤리, 이성과 진실 같은 것은 뇌 회로에서 사라진다. 옷은 걸쳤지만 이미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어졌고, 이성도, 감정도, 양심도 같이 옷처럼 바람에 날려가 버린다. 살아야겠다는 욕망 그 하나만 남겨진다.


나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학과장이 학과 대표에게 장학금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A 이상을 주라고 부탁 아닌 협박을 해왔을 때였다. 나는 그 학생으로 인해 다른 학생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학기 강의를 배정받기 위해, 학점을 조정했다. 내 양심, 도덕은 학과장의 말 한 마디에 대항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이 책은 모 대학교에서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외국인 학생을 유치해오면서 시간강사를 모집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다 학생과 강사 선생님간의 문제가 생기고, 학생들이 도망가면서 강사 사이에서 각자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적응해나가는 분투기 같은 책이다.


저자는 책을 크게 봄 학기, 여름 학기, 가을 학기, 겨울 학기 이렇게 일 년 네 학기를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구성했고, 그 학기마다 개성이 다른 캐릭터의 선이, 미주, 가은, 한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 공부를 하고 몇 푼 쥐어주지 않는 급여의  강사 자리에 임용되기 위해 저마다 몸부림치는 여자들의 생존기를 풀어낸다.


"결혼했는데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해?"

여자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돈을 잘 못 버는 못난 남편을 두었다는 증거라는 듯이, 남편이 돈을 잘 번다면 여자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긋이.

"자아실현을 위해 하는 거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장 좋은 대답은 이런 식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사실 한희는 돈을 위해 했다. 당연한 얘기였다. 돈을 벌려고 일하지, 자아를 실현하고 싶었으면 연구를 계속 했을 것이다. 생존이 걸려 있으니까 열심히 일했다. (206, 한희편)



그러나 남자로서 시간강사의 길을 걸어본 나는 이 부분에서 강한 의문을 표현한다. 남자도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 시간강사를 하는 그 어떤 남자도 아내가 돈을 많이 벌고 있어서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분은 없다. 내가 시간 강사를 하면서 만나 본 남자 강사분들은 그랬다. 점심을 사 먹을 돈도 우리는 없었다.


한국 소설의 특징인 묵직함이 여기에도 가득하다. 묵직하면서도 색깔마저 칙칙하다. 아픈 사회의 한 단면을 메스로 도려내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 작가 스스로 강사 자리에서 실직한 상태에서 이 책을 집필했으니, 그야말로 작가와 주인공이 한정신 한몸이 되어 이 책에 매달렸다, 그리고 이 책은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사회의 아픈 단면을 민낯으로 드러낸 책으로 세상에 겨우 제 몸을 드러냈다.


'소설을 읽으며 여성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 새삼 생각할 수 있었고, 언어를 가르치는 여성의 캐릭터가 어째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인가 짐작해보기도 했다. 아마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소설들에게서 많은 여성들이 말 대신 비명을 질러왔다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여성들은 단지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언어를 가르친다.'(장은정, 문학평론가)


뒷표지에 실린 이 책에 대한 느낌이다. 여성들이 말 대신 비명을 질러왔다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장은정의 평가는 이 소설이 어떻게 문학상을 받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조각 같다는 생각이 든다. 편혜영 소설가는 또 이 작품이 구체성과 실감이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평했다. 우리는 직접 베트남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보지 않는 이상 그 수업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실감나는 소설을 통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어림짐작으로 감을 잡는다.


시간강사의 삶은 고단했고 불안했고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허울좋게 '교수님' 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어도, 배를 쫄쫄 굶는, 방학 기간에는 아예 수입이 한 푼도 없는, 그런 직업군이었다.


한희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한희에게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였다. 미래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라고 현재를 끌어와서까지 미래를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한희의 의지와 예상은 늘 배반당했다. (220, 한희편)


소재의 독특성은 그래서 빛이 난다. 소재의 독특성에 더하여 네 여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각자의 처신법은 캐릭터를 어떻게 빚어내야 훌륭한 소설이 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교본과도 같다.


한국어에는 미래 시제가 없다는 저자의 지적은 독자로 하여금, 책은 좀 읽는다는 독자로 하여금, 국어국문법은 좀 안다는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말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정말 우리말에는 미래 시제가 없는가.


"한국어의 미래는  시간을 말하고 있지 않다. 미래는 한없이 개인적인 의지에 기생해 존재하고, 언제나 틀릴 가능성을 포함한 추측 속에서 떠돈다. ...

나는 내일 떠난다.

한국어 문법은 때로 예정된 미래, 혹은 확실한 미래를 현재형으로 표현한다. 너무 확실하기에 현재로 표현하는 것이다." (220쪽, 한희 강사편)


그렇게 '미래시제'라는 국어국문법의 한 단면을 사용하여 이야기의 끝을 희망적인 미래로 이끌어 가려는 작가의 내공은 참으로 대단하다. 다만 그 희망, 그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는 점 때문에 책을 내려 놓으면서도 우리는 가볍게 털어내지 못한다. 여전히 손에는 아직 그 묵직함이 남아 있는 것 같은 환상통을 경험한다.


한국어 강사 일을 하면서 한희는 언제나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고, "잘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교수가 되겠다" 생각하고 있었고, "H대에 남을 것이다"라고 선언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 누구보다 한희가 더 잘 알았다. (221~222)


마지막 한희 책임 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겨울학기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저자의 욕심을 읽는다. 너무 묵직하고 칙칙하고 어두워 보이는 이 소설을 밝게 끝마치려는 욕심은 지나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를 발견한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다음 세대. 그들에게는 어떤 사회가 펼쳐질까.


그러나 아기를 가지면서 한희의 시제가 모두 뒤바뀌었다. 한희의 배 속에 무언가가 살고 있었다. 지금은 한희가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언젠가 숨을 쉬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세상에 나올 거라는 미래가 생겨났다. 아기가 만들어내는 미래라는 시간이 한희에게 새로운 시제를 주었고, 그 시제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아는 한희는 매일이 불안하기만 했다. (222)



마지막 주인공에게 미래를 안겨주면서도 저자 역시 그 미래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한다. 결국 미래는 오늘 현재가 계속 이어지면서 미래로 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대한 최대한 자신의 모든 미래 희망을 끌어 모아 마지막 문장을 희망으로 끝내지만, 글쎄. 한희 주인공의 마지막 바람은 참이 될지 거짓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이와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 (223쪽)


한희는 아기를 안은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기의 따뜻한 체온이 아기를 감싸고 있는 하얀 천을 통해 건네졌다. 한희는 이렇게나 따뜻한 아이가 자신의 품에서 고르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한희는 앞으로 아기와 맞이할 미래를 그려보았다. (258)


택시가 둘의 아파트 앞에 섰다. 제이콥이 먼저 내려서 문을 열어주었고, 한희는 아기에게 눈을 고정한 채 최대한 천천히 내렸다. 그들이 살아온 아파트가 서 있었다. 아침 해가 잘 들고, 한희가 아끼는 고무나무 화분이 있는 곳, 이제는 그곳에서 아기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한희는 지금 아주 분명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 (259)



(선한리뷰)

올 1월에 직장을 그만 두고 나오면서 나도 한국어강사 자격증을 따볼까 생각을 잠시 했었다. 최근 K-POP, 한류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한국에 대한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매우 많아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나도 미래 희망적인 직업군 하나 정도 비상식량처럼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니까 적성에도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한글과 우리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순수함이나 사회적인 경향만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처럼 그런 x판 같은 정치적인 학당만 있는 게 아니라면, 순수하게 우리말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일은 참으로 보람 있을 것이다. 그래서 꿈, 미래는 소중하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물론 책에서는 시간강사라는 한정된 직업군에 대한 욕망을 중심으로 서사를 만들면서 부정적인 사회 단면을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책에 없는 따뜻한 곳 따뜻한 공간 따뜻한 향기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어떤 곳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이집트에서 한국어 선생님으로 살기> 같은 책을 보면 이번 소설에서처럼 그런 버텨냄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을 정말 좋아하는 외국인과 한국어를 정말 잘 가르치고 싶은 선생님만 보였다. (한국어강사가 되려면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루고 자격증을 따야 한다. 이제는 공부를 하고 암기를 해고 시험을 보고 합격 불합격을  듣기에 너무 지친 내가 되었다.)


한국 사회의 아픈 단면을 잘 버무린 이 소설을 읽고, 생존과 버티는 삶에 대한 가여운 우리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미래 시제를 빌어 응원하고 축복한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한국어도 한글도 행복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한때 우리말과 한글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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