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동아리 동기 단톡방 멤버는 8명이다. 여자 넷, 남자 넷. 스물 아홉 그 해에는 두 명의 학생을 제외하면, 나머지 여섯명은 모두 직장인이었고, 그만큼 놀 시간도 돈도 여유도 늘어난 상태였다. 우리는 굉장히 자주 만났다. 특히, 항공사에 취직한 C가 저렴한 비용으로 당일치기, 혹은 1박 2일의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사온 기념품이나 맛있는 것들을 나눴다. 때로는 실적이 필요한 은행원 친구의 펀드를 다같이 들어주고, 한강에서 피맥을 얻어 먹었으며, 때로는 그냥 어딘가 맛집을 찾았다며 다같이 가보자고 만나기도 하였다. 언제나 아무나 발의를 하면, 시간 되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모임. 주말, 평일을 가리지 않았다. (아마 당시에 동기 안에서 10여년째 연애중이었던 한 커플을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 대부분이 솔로여서 더 자주 만났던 것 같다. 특히, C가 솔로부대에 편입하면서 더 자주 모이게 되었다.)
뜨거웠던 여름, 8월 중순, 광복절 공휴일이 금요일이라 마침 딱 놀러가기 좋은 주말에 우리는, 나의 고향 울산에 있는 본가에 놀러갔다. 부모님께서 나에게 연락할 때 맨날 동기들과 같이 있다고 하니, 다같이 울산으로 놀러오라고 초대를 해주신 것이다. 마침 일정도 좋고, 숙박 걱정 안 해도 되니 친구들을 꼬득여 2박 3일 울산(경주) 여행을 짰다.
일정이 되는 사람만 최종 정리를 해 보니, 여자 넷은 모두 가능, 남자는 이른바 '10년 커플'의 남자와 C만 가능했다. 그렇게 여섯명이 울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KTX를 타고 울산에 가기로 하였는데, C는 항공사 직원이라 비행기값이 저렴하여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왔다. (KTX 반값도 안되는 가격이다.) 혹시나 모든 일정을 함께 하기 위해 C도 같이 KTX를 타지 않을까 싶었으나, 알뜰한 C는 인천집에서 공항이 가깝고, 서울역이 먼데 굳이 멀리 가면서 돈을 더 쓸 필요가 없다며 단호하게 따로 오는 길을 선택했다. ㄷㄷ (덕분에 이후 상황이 묘하게 되었다.)
첫 날 일정은 대왕암공원+슬도+정자 횟집에서 저녁이었다. 부모님께서 저녁을 사주기로 하여서 이 날 하루는 부모님도 우리와 함께 다니기로 하였다. 따로 오는 C와 합류하기 전, 집 근처에서 5명이 차를 나눠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친구 넷이 모두 후다다다다닥 두번째 차에 홀랑 탔다. 정말 순식간에, 일사분란하게, 어떻게 나눠타자는 말도 없이 그들은 웃으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번째 차에 타버렸다.
정말 거의 동시에 4개 문이 열렸다가 순식간에 닫혔다. ⓒ구글 검색
첫번째 차는 아빠가 운전하고, 엄마도 같이 있으니, 나는 그 차를 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따 C가 합류할 때는 C가 첫번째 차에 타게 된다. 하하, 오늘 하루 부모님과 C가 한 차에서 같이 다니겠네..... 이거 엄청 재밌는 상황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부터 첫 날 일정을 고민하면서, 차는 어떻게 나눠타는게 좋을지 혼자 고민을 좀 했었더랬다. 3명, 5명 이렇게 나눌까? 하다가 그러기엔 두번째 차는 모닝이라 좀 작다. 제일 편하고 모양새 좋은건 4명, 4명인데 C와 같이 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래도 나와 부모님이 같이 있는 차에 자연스럽게 C가 앉게 될 모양새를 만드는 것이 조금 애매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에 C가 본인은 혼자 비행기를 타고 따로 오겠다고 한 것이다. 아, 이렇게되면 고민할 것도 없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측한대로 그렇게 우리는 차를 같이 타게 되었다. 그것도 부모님과 같이 있는 차에.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대왕암공원 가는 길에 C를 픽업했다. C에게는 전화로 앞서 오는 검은 차를 타면 된다고 알려줬다. 잠깐 길가에 정차를 하고, C가 차 문을 열고 나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면서 차에 탔다.
안녕하세요. C입니다.
일단 예의 바르고 깍듯한 인사. 나의 부모님과 C의 첫만남.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10년여 동안 매우 친한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만 했는데, 오늘 그 친구를 보게된 것이다.
"응 그래, 오느라 고생했다. L 엄마, 아빠야"
아무렇지 않은듯하지만 약간은 긴장한 공기가 주변에 흘렀다. 그는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는데, 안전벨트를 맸음에도 불구하고 자세가 아주 군대 다시 온 것마냥 각이 잡혀있었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 말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야, 왜 목소리가 떨리고 그래. 긴장하지마."
"아 내가 그랬나? 아냐 아냐 괜찮아"
"친구 부모님이야 긴장 안해도 돼. 하하하하하하하"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웃음이 나왔다. 사실 오히려 친구 부모님이기에 긴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여년을 알아온 사이라지만 부모님을 보는 건 처음이니까. 그래 잘보이고 싶으면 긴장이 되겠지. 잠깐, 잘 보이고 싶다? 잘 보이고 싶은건가? 어라?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가 이내 에이, 누구라도 어른들께 잘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거니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자, 좋다. 지금 분위기 나쁘지 않아.
그날 대왕암공원의 사진. 폴더를 뒤적뒤적 원본 그대로 ⓒ과거 사진첩
바닷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었지만 우리는 그래도 즐겁게 놀았다. 남는 건 사진뿐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거의 사진을 찍기 위해 논 것 같다. 그렇게 관광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을 먹을 때도 두 개의 테이블에 4명, 4명이 차에 탄 그대로 나누어 앉았다. C는 아빠 옆에 앉았다. 후식을 먹으러 가서도 C는 부모님 맞은편, 내 옆에 앉았다. 보아하니 친구들이 일부러 그렇게 몰고 있었다. 먼저 네명이 들어가 이렇게 앉을 수밖에 없도록 자리를 잡는 것이다.
집에 와서 짐 정리를 하면서 C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C를 애타게 찾았다. 이건 꼭 C가 드려야 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뭔가 했더니,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나 모르게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선물을 산 것이다. 엄마 화장품 선물이었는데, 이건 꼭 C가 줘야 한다며 친구들이 C를 앞장세워 엄마에게 말을 하게 했다.
어머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마음이에요.
아니 그냥 와도 되는데... 고마워~ 재미있게 놀아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이라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나 모르게 준비하면서, 이걸 꼭 C가 줘야 한다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 웃겼다. 이제 이쯤되면 친구들은 C와 나를 미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그동안 다같이 모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챙기고, 은근슬쩍 신경 쓰는 모양새를 보면서 주변 사람들이 낌새를 못챘을리가 없다. 친구들은 그동안 우리를 두고 "쟤네 눈빛 봐라~", "쟤네 저거 뭐냐" 하면서 간간이 우리를 놀리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그 서막이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