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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Mar 18. 2022

세상의 보살핌, 유년기의 끝

눈의 여왕

눈의 여왕이 카이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카이와 게르다는, 그리고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데르센 동화집, 백설 여왕> 야누스 그라비안스키

어쩌면 카이는 '성공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냉혹한 범죄자로 자랐을 지도. 게르다와 할머니가 슬퍼할 테고 게르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거울 조각을 없애려고, 카이를 예전의 그 아이로 인도하려고 할 것 같다. 하지만 과연 행복하게 마무리될까? 게르다는 눈의 여왕의 궁전을 찾아가는 여정보다 더 마음이 부서지는 고달픈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거울 조각을 없애지 못하거나,  없애더라도 너무 늦어서 게르다는 지치고 카이는 후회와 고통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린이의 행동이, 자주 쓰는 말(단어), 즐겨하던 놀이가 달라졌다면? 그 아이의 나이가 11-14세 정도라면 왼팔에 흑염룡을 키우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많겠지. 아이의 환경이 급격히 변했다던가, 그 아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데 거기서 힘들어하고 있다던가. <The Sleeping Beauties>에서 몇 달이고 길게는 몇 년이고 잠들어 깨지 않는, 스웨덴에서 정착할 수 있기만을 바라며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난민 가족의 아이들에 대해 읽으면서 어쩐지 카이가 생각이 났다.

가엾은 카이! 그 거울 알맹이 하나가 곧장 그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 거의 심장을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카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알맹이는 심장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 p. 199 <안데르센 동화집, 백설 여왕>

거울 조각은 아무런 전조 없이 떨어져 심장과 눈에 박히고 심장을 얼려버린다. 눈은 세상을 곡해한다. 마치 굴러와 부딪히는 재앙처럼.

 

거울 조각은 보이는 것을 일그러뜨린다. 이 거울 조각 자체가 재앙이라면 일그러뜨리는 것은 어쩌면 그 재앙이 남긴 상처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눈의 여왕이 카이를 그 눈 속에서 썰매채 주워간 건, 눈의 여왕 나름의 일종의 구조 작업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눈의 여왕은 겨울 조각을 없앨 수는 없지만 두 번의 키스로 심장과 조각을 얼려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게 해 준 것이라고.

카이는 길고 긴 겨울밤 내내 달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낮이 되면 백설 여왕 발치에서 잠을 잤답니다.
- p. 203 <안데르센 동화집, 백설 여왕>
Christian Birmingham

게르다는 사라진 카이를 찾기 위해 아끼던 빨강 구두를 강에 흘려보내며 기도한다. 어느 블로그에서, 빨강구두는 게르다의 '어른이 되지 않고 어린이의 순수함을 간직하겠다는 서약'이라는 글을 봤다 (다시 찾을 수가 없네...어딘가 적어 뒀을텐데…). 흠. 안데르센은 왜 이렇게 빨강구두를 - 더 나아가 그 구두가 상징하는 여성성을 - 싫어하는 걸까. 어쩌면 두려워하는 걸까. <빨강구두>에서 카렌이 겪는 일을 생각하면, 대체 카렌한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물어보고 싶다. 안데르센은 빨강구두를 끌어안고 프로이트의 소파에 누워 이야기를 좀 할 필요가 있다.


빨강구두는 어린이의 순수함의 반대편에 있을까? 오히려 게르다는 자신의 소중한 보물 - 빨강구두 - 을 떠내려 보내면서 친구를 찾기 위해 유년기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릴 때 <눈의 여왕>에서 마녀의 정원 이야기와 라프란드/핀란드 여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둘 다 게르다를 보살펴 주는 이야기라서 읽던 어린이(=나)도 같이 안심해서일까. 마녀의 정원은 다시 보니 힐링 파트다. 게르다의 정신건강에 꼭 필요한. 게르다의 입장에서 보면 여름에 카이가 갑자기 변했고 겨울에 사라졌다. 게르다는 반년 넘게 걱정, 슬픔, 서러움 같은 감정을 안고 살았다. 마녀의 정원에서 모든 것을 잊고 마녀 할머니가 황금 빗으로 머리를 빗겨 주고 버찌를 먹는 나날을 보내는 것. 그 아이에게는 이런 시간이 꼭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안데르센은 이 마녀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라고 땅땅 못을 박아 우리를 안심시켜준다. 그래서일까, 게르다가 장미와 카이를 떠올려 마녀의 정원을 나가는 장면은 탈출 이라기보다 낙원에서 추방되는 것 같다.

게르다의 조그만 발은 너무 지치고 아팠답니다. 주위의 풍경도 얼마나 싸늘하고 쓸쓸해 보였는지 몰랐어요.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잎도 누렇게 변했습니다. 축축한 안개가 마치 비가 오듯 숲에 내렸지요.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탱자 열매*만 아직도 달려 있었어요. 그러나 그 열매는 너무 시어서 씹으면 이가 아플 정도였습니다. 정말 넓은 세상은 얼마나 창백하고 슬프게 보였는지 알 수 없어요.
- p. 216 <안데르센 동화집, 백설 여왕>
*영어판에는 sloe라고 되어 있음.

다시 맞이하는 현실처럼. 유년기가 끝나가면서 더 이상 상상의 세계의 주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게르다는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두려움을 겪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카이의 행방을 찾아 나아간다. 핀란드 여인은 세상의 모든 것이 게르다에게 애정을 가지고 돕고 있다고 말한다.

게르다가 지금 갖고 있는 힘보다 더 강한 힘을 줄 수는 없어. 너는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보지 못했어? 사람이며 동물들까지 모두가 저 애를 돕고 있는 걸 말이야. 어떻게 게르다가 맨발로 세상을 나아갔는지. 하지만 그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서는 안 돼. 그 힘은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거야.
- p.237 <안데르센 동화집, 백설 여왕>

이 이야기의 소중함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세상은 어린이들에게 마땅히 애정과 도움을, 관심과 보호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아이의 힘이 된다는 것.


거울 조각을 녹이는 데는, 카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눈의 여왕의 보존 조치, 카이 자신의 노력 ('영원'을 완성하기 위한) 그리고 '모두의 도움'을 받고 나아간 게르다의 눈물이, 다 중요했다.


친하게 지내는 직장동료 - 취향이 잘 맞다: 나는 그에게 BBC셜록을 추천했었고 그 후 그는 셜록 4기를 먼저 본 후 나에게 없는 셈 치라고 선인의 가르침을 주었으며, <시간의 딸>과 안소니 트롤럽을 추천해 주었고 나는 제임스 야페의 <My mother, the detective>를 빌려주었다 - 와 잡담을 나누다가 그가 '<눈의 여왕>은 슬퍼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라는 말을 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째서, 싶다. 해피엔딩이쟎아. 마지막 장면도 장미와 아기 예수를 노래하는 여름인데. 그러다가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유년기의 끝이라고 받아들이면 슬프겠다. 삽화마다 좀 다르지만, 블라디슬라프 예르코의 삽화 처럼 마지막 카이의 표정이 슬프게 묘사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여름의 밝음을 덮을 정도로. 하지만 카이와 게르다는 멋진 어른이 되었겠지.


- 인용한 구절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생일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안데르센 동화집>에서 가져왔다. '읍니다'는 '습니다'로 고쳤다. 이 동화집의 삽화가 간결하면서 묘하게 섬세하고 예뻐서 지금도 좋아한다. 내 취향의 한 부분이 또 여기서 나왔겠거니 한다.

- 마녀의 정원에서 꽃들의 이야기는 어릴 때 뭔가 두근두근하다고 생각했다. 음유시인의 시대였으면 즉흥적으로 이 부분을 만들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음악으로 치면 카덴차 같은.

- 내 취향의 많은 부분은 <눈의 여왕>에 뿌리를 두지 않았나 싶다. 황금 빗과 버찌, 온갖 꽃이 가득한 마녀의 정원, 궁전에 숨어들었을 때 게르다가 본 그림자 꿈들, 공주와 왕자의 꽃 모양 침대, 폭신폭신한 토시, 마른 대구에 편지를 쓰는 라프란드 여인과 핀란드 여인... 그리고 눈의 여왕의 궁전.

Errol Le Cain

- Errol Le Cain 삽화의 <눈의 여왕>은 도쿄 여행 기념으로 사 온 것. 그때는 ELC를 몰랐었는데 우연히 찾은 이 그림책 삽화가 독특해서 샀다 (百年서점에서). 몇 년 후 ELC삽화 그림책 찾아 헤매면서 나 자신을 매우 칭찬했다.

- <눈의 여왕> 그림책은 몇 년 전 우연히 블라디슬라프 예르코의 그림책을 발견하고 모으기 시작했다.

예르코의 삽화, 그리고 다른 멋진 삽화들은 카페에서 책 읽기 님의 글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flatb201/290

정말이지 매우 쎄벼판 (이 표현 외에는 뭐라 할 수 있을까...) 삽화라고 생각한다. 너무 좋아함.


<안데르센 동화집>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야누스 그라비안스키 (삽화) / 한기찬 옮김, 현암사 1988

<The Snow Queen> HCA, Naomi Lewis / Christian Birmingham (illustrations), Walker Books (2007)

<The Snow Queen> HCA, Marta Baziuk, Vladyslav Yerko (illustrations), A-BA-BA-HA-LA-MA-HA (2006)

<雪の女王> HCA, Naomi Lewis / Errol Le Cain (illustrations), HOLP Shuppan (1999)

<Tne Sleeping Beauties: And Other Stories of Mystery Illness> Suzanne O'Sullivan, Picado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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