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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우물 Jun 29. 2020

인간 디스커버리

구상나무, 베이컨, 체 게바라

*

아침을 시작할 때 그날 느낌이 오는 단어들과 영상들을 검색하는 습관이 있다. 신문기사, 백과사전도 찾는다. 

  

나는 오늘 기후변화로 지리산 구상나무가 고사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검게 뒤덮던 침엽수가 없어진 자리에 초록의 어린 활엽수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변화는 해가 갈수록 가파르다고 한다. 땅은 공기의 변화를 읽고 땅 속의 벌레와 박테리아와 나무의 씨앗들은 땅과 함께 손을 잡고 생의 의지를 햇빛 속으로 밀어 올린다. 햇빛이 이렇게나 많은데 더 이상 춥지 않은데 뾰족하고 길어질 필요가 없으니까 둥그러지고 넓어진다. 여러모로 따져 보면 나도 침엽수과에서 활엽수 과로 변해온 것 같다.  
해녀들은 겨울에도 두꺼운 잠수복을 입지 않으며, 해조류가 급감했기 때문에, 소라는 더 잘 보여서 많이 잡을 수 있지만, 많이 잡은 날도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바다생물의 개체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아, 그것을 모르고 나는 해삼과 멍게를 맛으로만 먹었구나. 
어느 날엔가 '우리가 젊은 시절에는 해삼과 멍게라는 것이 있었단다 얘들아.' 그 모양과 맛을 설명하기 위해 갖은 묘사를 갖다 붙이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혹은 특급 호텔에서 아주 큰 접시에 두서너 점 올려진 해삼 멍게 플레이트를 지금으로부터 1만 5000일 정도 지난 시점인 80세 여름에 먹을지도 모르겠다. 1만 2천 봉이라는 금강산도 그때쯤은 노구를 이끌고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

어제 자기 전에 읽었던 베이컨에 관련된 책을 생각했다. 애인님이 빌려준 책인데, 그도 내가 가진 책 중에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골라 빌려달라고 해서 고민 없이 희곡 칸에 있는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를 가리켰다. (나는 내가 무대에서 보고 싶은 에쿠우스를 언젠가 한번 그려보고 싶다.) 
그러한 연유로 아침에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 한 소절이 담긴 영상을 보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사실을 기록하고 즉각적으로 진실로 다가오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또한 작업을 하는 도중에 그는 무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작업을 할 때 기록하려는 일환으로 그리며, 그리는 대상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투영됨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림은 이중적은 행위이기에 어떨 때는 작품의 대상이 아니라 작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도 있었다. 많은 부분에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여전히 신체적으로 몹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인터뷰를 통해서도 인터뷰어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많은 신체적 불편함을 느낀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자기가 그리는 대상들이 모두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러한 모습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비명을 그리고 미소를 그리지 않기를 바랐다고 한다."  입과 구강구조 등에 큰 관심을 느낀다는 전함포텐킨에서 비명을 지르는 피 흘리는 여자의 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게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성적학대가 영향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번뜩이는 눈빛이 어딘가 그물에 잡힌 메기 같아 보이는 그였지만, 이 말을 할 때는 주꾸미 같은 표정이 되어 눈을 내리깔며 둥그런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는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를 좋아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한 에피소드는 로마에 체류하던 동안 기분이 몹시 우울했고 분리된 듯 혼자 조용히 돌아다녔다고 했는데 그것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그의 그림에 한 짓을 생각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

아침에 만원 지하철 안에서 익숙한 붉은 장정의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남자를 보았다. 사람들의 엉덩이와 다리 사이를 피해 사진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도덕적 문제는 없는지에 대해 깊고 짧게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약간 스릴을 느끼면서 한 장 남겼다.

체 게바라 평전을 읽던 때의 기억이 났다. 학교에 새로 지은 도서관에 자주 갔다.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이었다. 주로 혼자 먹고 읽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집엔 중고등학교 때처럼 12시가 다 되어 들어갔다. 서가를 돌아다니고 새 책들을 읽고 만지는 게 좋았다. 보여줄 곳이 없었지만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그때는 영화에 좀 더 빠져있었다.   

하고 싶은 것과 알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많은 '인간 디스커버리'에겐  운동과 영양제 챙겨 먹기는 필수다. 무엇보다 건강한 정신과 몸을 위해 명상에 더욱 수행 정진하여야겠다는 생각을 체 게바라 평전을 든 지하철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에그 샌드위치를 사려던 생각을 물리고, 들고 온 마들렌과 우롱차로 아침을 시작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고 하는 영화를 국제영화제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파리에서 결혼을 하고 여전히 영화를 하고 있는 엠디와 함께 보았다.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나는 무언가 진실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간절하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미루지 않고, 과감성을 가지고

당장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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