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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소민 Jul 21. 2024

영화 퍼펙트 데이즈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를 추천 받아 주말에 시네큐브에서 보았다.


영화를 보기 전 습관처럼 서촌 구석구석을 걷고, 월트 휘트먼의 책 ‘바다로 돌아가는 사랑’을 사 카페에 가서 읽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머리 끝 부터 구두 속 까지 비에 젖었지만 간만에 비를 맞으며 걸으니 자유롭고 좋았다.


비 샤워로 인해 젖은 생쥐 모양으로 영화관에 들어가서 구두 속에 휴지를 공처럼 뭉쳐 넣어 말리면서 영화를 봤는데. 영화 러닝타임도 길어서 끝나고 나니 다 말라 있었다.  이게 여름 낭만이지 하며 괜히 웃음났다. 그리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화의 분위기 덕분에 다 본 후에는 나른하고 녹진한 기분이 되어 나왔다.


볼 것도 들을 것도 많은 세상. 시끄러운 세상. 말 하는 사람도 들어 달라는 사람도 많은 세상에서 이 귀한 침묵과 시적인 서정이 가득 담긴 영화가 참 귀했다. 교토가 그리워지는 이유도 그것. 오래된 침묵의 유산.


오래 전 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를 봤을 때나 피나 바우쉬를 기리는 다큐 ‘피나’ 볼 때처럼 그는 영상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고 침묵을 효과적으로 잘 쓰는 감독이라고 느낀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정갈한 쇼트들도 떠오르는 건 빔 벤더스가 그의 영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히라야마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그는 항상 정해진 루틴대로 생활한다. 창밖의 빗질 소리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간단히 씻고, 식물에 물을 주고 일렬로 정돈된 소지품을 챙겨 나간다. 그리고 집앞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하나 마신다. 청소도구가 가득 실린 파란 봉고 안에서 카세트 테잎을 하나 골라 듣는다. 루 리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니나 시몬 등의 옛 노래들이 깔리면 도쿄의 거리도 갑자기 더 아름다워진다.


점심 시간에는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찍는다. 간혹 나무 옆에서 삐죽 나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가 있으면 삽으로 조심스레 떠서 집에 가져와 화분에 심는다.

일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에 가서 씻고 늘 가는 노포에서 술 한잔을 마시고 집에 와서 자기 전까지 책을 읽는다.

그가 읽었던 책은 윌리엄 포그너의 ‘야생 종려나무’, 패츠리샤 하이스미스의 ‘11’, 고다 아야의 ‘나무’ 등이다.


이 인물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그가 침묵을 사랑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해야 할 말은 꼭 하는 깊이를 가졌다는 것. 오래된 좋은 음악을 알고 좋은 책을 알고 인간과 사물의 이면을 바라볼 줄 알고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산다는 것. 구도자적으로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것.


일을 하지 않는 주말에는 빨래방에서 작업복을 세탁하고, 카메라 필름 사진을 인화해서 남길 사진과 버릴 사진을 분류한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산다. 늘 가는 주점의 주인장은 간혹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그는 손님들과 그 노래를 감상한다. 그리고 늘 먹는 감자 샐러드와 함께 한잔 한다.

아무 엄살 없고 성실하고 반듯한 하루. 그의 정결한 하루가 끝나면, 하루를 복기하는 듯 흑백의 꿈을 꾼다. 꿈들은 그림자의 이미지로 흑백 슬라이드처럼 지나간다. 이 꿈의 이미지들이 아름다워서 따로 모아 보고 싶기도 하다.


그는 거의 말이 없지만 그가 간간히 사람들에게 짓는 미소나 친절한 행동 등에서 그 성격을 알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거울을 비춰보며 청소하는 그에게는 완벽함에 대한 집착마저 느껴진다.

주인공의 삶을 바꾸는 큰 사건이나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불성실하고 철 없는 동료와의 에피소드나 조카의 방문 여동생과의 만남, 주점 여주인에 얽힌 에피소드 등은 잔잔한 그의 일상을 흔들고 간다. 그는 어느 명망있는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족과 알 수 없는 한 사건으로 멀어진 후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 살게 되었다. 가족들은 히라야마가 남들과는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히라야마가 우는 듯 웃는 얼굴로 다시 일터로 나가는 얼굴이 클로즈업된 장면이다. 대사 몇 마디 없어도 영화를 무게감 있게 끌고 나가는 야쿠쇼 코지의 연기력이 소름 돋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오는 인상깊은 씬이었다.

도쿄 아트 화장실 프로젝트로 빔 벰더스가 다큐를 찍을 거라고 했는데 찍다보니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다큐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되었다. 화장실들이 다 하나 같이 깨끗하고 또 미학적으로 설계 되어 있어서 더럽거나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보다는 오히려 보는 즐거움마저 있다.


#퍼펙트데이즈 #야쿠쇼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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