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카슨의 시집<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투과하는 것이다. 또한 실제를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앤 카슨은 <유리 에세이>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게 하는 ‘황야’에 사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화자를 내세운다. 화자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바라보는 작가’의 입장인 ‘에밀리 브론테의 시선’과 최근 실연한 대상인 남자에 대한 느낌과 병든 노모에 대한 화자의 인상을 교차하며 풀어간다.
화자는 유리라는 처연한 투명함을 내포한 질료를 통해 에밀리의 시선과 자신의 시선이 겹쳐 보이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 환상에 동참하는 독자도 함께 황홀한 다차원적 체험을 맛본다.
“그녀는 신과 인간과 황야의 바람과 탁 트인 밤을 봤다. 인생에 대부분의 시간을 카펫 비질이나 하고 황야를 거닐거나 와칭을 하며 보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줬다“라고 말한다.
에밀리의 일기에서 발견된 이 구절은 그녀의 삶과 대조하면 이율배반적이며 아이러니하다. 에밀리의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옥, 지하실, 우리, 창살, 마구, 재갈, 빗장, 족쇄, 잠긴 창문, 좁은 창틀, 아파하는 벽에 대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그녀가 자유를 원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포로가 될 수 있다.”라는 또 한번의 아이러니를 화자는 ‘발견’한다. 차가운 유리에 볼을 맞대고 밖을 쳐다보는 것 같은 감각. 안에 있지만 밖을 보는 자(와쳐)의 시선이 가지는 매력은 유리 에세이에 담긴 시들이 가지는 묘미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대>라는 시에서도 재차 발견된다. “나는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외로움을 유예하는 한 방법은 신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그대가 있든 그대가 없든 나는 피난처를 찾지 못한다. 나는 곧 나 자신의 누드다. 바람에 뼈를 씻어내고 있었다. 뼈는 은빛으로 빛나며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내 몸이 아니요, 한 여자의 몸도 아니었으니,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몸이었다. 그것은 빛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나는 외로움을 유예하기 위해 신을 개입시킨다. 신은 곧 ‘빛’을 상징한다. 하지만 바람에 뼈를 씻어내며 그 뼈가 은빛으로 빛나면서 나는 스스로 빛이 된다.
그것은 ‘나’를 넘어서고 나를 규정하는 ‘여자’라는 굴레도 벗어나 ‘우리’가 된다. 시를 읽는 것이 황홀하고 아름답고 처절한 체험이 되는 이유는 시가 보여주는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는 일이 우리가 사회화된 개인으로서 일상을 무리 없이 살아나가기 위해 배운 교육적 관습을 철저히 부수는 행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교육받은 대로 세상을 흑과 백, 빛과 어둠을 나누고 나와 너를 구분 지으며 모든 구획으로 나눠 판별한다. 하지만 이 세계의 빈틈 속을 채우는 것. 혹은 세계 그 자체인 것은 ‘시’이고 ‘신’이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경계 마저도 허물면서 넘나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시를 통해서 그리고 ‘신이라는 하나의 인간의 위대한 발명’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여기서의 시는 음악이 될 수도 있고 그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색채나 음표 사이에도 무수한 색깔과 음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빗장 쳐진 마음도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이자 그림이며, 시’인 것. 즉,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 존재’는 다름 아닌 신이다.
하지만 이 규정 지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존재로 인해 우리는 때론 ‘이미지를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만들기도 하고, ‘신은 당신에게 발작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의 일’은 ‘감자나 돈의 놀랍도록 차가운 냄새’, 즉 침묵의 견고한 조각들 속에도 존재하며, 우리는 영구히 신의 존재를 ‘찾고, 바라보게’ 된다. 신은 말한다. ‘슬픔은 걷어버려라, 그것은 할일을 가리고 있는 덮개다.’
로마의 몰락은 신에 대한 부정 때문이라고 할 때, 그리고 신을 믿지 않는 자를 이방인이라고 할 때, 이방인은 어디에도 속한 기분 없이, 두려움 속에서 늘 ‘잘못된 날에’ 찾아오는 자가 될 것이다.
“제국의 신성함이란 무엇인가? 무너짐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너질 수 있다. 집도 육신도 그리고 적도 무너진다.
그것들의 리듬이 흐트러지면.” 거대한 문명도 권력도 리듬을 잃으면 무너진다. 그래서 세계의 리듬을 만드는 신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 신은 그것을 한 순간에 파괴해버릴 수도 있으므로.
“누가 새로운 두려움을 발명해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화자는 ‘이미지’라는 우상을 파괴된 몰락의 제국 위에서 ‘신’의 목소리를 끄집어 낸다.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는 작은 자서전이다.” 목 잘린 암탉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듯한 영국 첫 여성 하원 의원인 낸시 애스터의 목소리나, 비프스테이크 같은 웃음소리를 가졌다고 말하는 거트루드 스타인이나,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여성의 ‘소리’는 남성의 소리와 구분되는 특별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여성이 내지르는 특별한 종류의 비명인 ‘올롤뤼가’는 황량한 북부 잉글랜드에서 고지식한 목사의 딸로 평생 억압된 채로 살았던 에밀리 브론테가 쓴 거대한 비명 소리 같은 ‘폭풍의 언덕’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 비명은 캐서린이 떠난 히스클리프를 찾으며 지르던 소리 같고, 사랑하는 연인의 무덤을 파헤치며 울부짖던 히스클리프의 절규 같기도 하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둘이자 하나였던 영혼이기 때문에.
하지만 앤 카슨은 이 책의 마지막 챕터에 속한 에세이인 ‘소리의 성별’에서 “소리의 내면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는 궤적은 공적이다. 외부로 투영된 한 조각의 내부. 그러한 투영의 검열은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가부장적 문화의 과업”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검열할 수 있는 인간과 그럴 수 없는 인간이라는 두 부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다시 처음으로 이 시의 시작인 황야를 바라보는 ‘와쳐’를 떠올리게 한다.
황야는 나 이외의 것들이 삭제된 공간, 존재가 신을 찾는 공간, 그리고 오로지 자신을 대면해야 하는 공간이다.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스스로를 검열하는 공간으로서, 혹은 신을 만나는 공간인 광야를 다시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으며 내가 찾던 그 광야, 그리고 그 광야에서 울부 짓는 소리를 내는 사람을 얼마만큼 이해했는지 상기해보았다.
생의 중요한 시기 마다 우리는 광야를 이겨 먹으며 내지르는 비명을 한번쯤 내질러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소리를 내고, 내가 여지껏 내왔던 그 <소리의 자서전>을 고고학자의 마음으로 발굴해 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