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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소민 Oct 08. 2023

거미집

김지운 감독 부활 확정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은 그간 김지운 감독의 부진을 만회할 작품으로 기대하고 있던 작품이다. 한때 김지운이라는 이름은 ‘스타일’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의 작품 중에는 ‘반칙왕, 장화 홍련, 놈놈놈, 밀정’등이 특히 좋았다. 그 이유는 다른 감독들이 가지지 못한 촬영 스타일과 유머코드, 남다른 미적 센스 때문이었다. 그 말은 김지운 감독의 DNA가 박힌 영화는 ‘특유의 멋’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박찬욱, 봉준호 등 동 시대 한국 영화 감독에 대비해 봤을 때 그의 작품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그의 최대 망작으로 평가받는 ‘인랑’은 원작인 일본 애니 ‘인랑’의 팬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오리지널에 대한 모독이라는 평가까지 일어났다. 그는 한동안 큰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김지운 영화답게 영상미는 좋았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의 몰락을 믿고 싶지 않아 ‘인랑’은 보지 않는 편을 택했다.

그 사이 코로나가 터졌고 김고은 주연의 ’언택트‘를 만들기도 했으나 이전 영화 답지 않게 소소하고 따뜻하고 라이트한 감성의 소품이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인랑’ 때의 수모를 만회하는 복귀작은 이번 ’거미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OTT의 시대를 살고 있고 온라인 동시 개봉도 많다보니 전보다 영화관에 덜 가게 된다. 그래서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특별히 선호하는 감독의 영화여야 한다. 극장 가는 길에 나는 이렇게 한 사람의 관객을 극장으로 이끄는 원동력은 뭘까 생각했다. 영화표 한장 값이면 OTT로 무제한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결국 영화에 대한 사랑과 팬심을 넘어서서 그 영화가 ‘한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본다는’ 행위로써 의미가 있어야 사람들의 발걸음을 움직이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따지자면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만드는 것을 본다는 중첩 상황이 가진 확실한 재미가 담보되어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줄거리는 단순하다. 작고한 유명 감독의 머슴살이를 하며 어깨 너머로 영화를 배운 감독 김열이 사람들의 조롱과 제작자의 무시와 시대의 검열 및 압박을 이겨내고 예술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70년대 유신 시대때 충무로에서는 대중의 정신을 마취시키기 위해 통속적이고 저속한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창작자가 가진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던 시대, 돈도 명예도 갖지 못하고 오로지 열정과 광기만 가진 김열은 이름처럼 열에 들떠 있는 아이 마냥 애처롭다. 그의 열병의 발원지는 바로 ‘영화’이다.


밤새 꿈 속에서 허우적 거리다 깨어난 그의 방 안에는 거미 그림과 영화의 제목인 거미집이라는 글씨로 가득하다. 그 방은 오로지 거미집이라는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그의 머리 속과 같다. 문을 나서자 건넛 채에 한 노부인이 차를 마시고 있는데 그녀는 보일 듯 말듯 약간의 경멸을 담아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한다. 김열은 비굴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고 집을 나선다. 집에서의 첫 시퀀스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처한 심리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단지 영화 제작 때문에 이렇게 약을 수시로 삼켜가며 불안에 떨진 않을 텐데, 그의 숨겨진 마음 속 비밀이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지 않을까 예상할 수 있었다.

국밥집에서 그가 영화평론가들에게 받는 두번째 멸시부터는 더 가여워진다. 그리고 그 무참한 홀대는 영화사 사장 및 배우들에게도 이어진다. 이로써 관객들은 김열 감독을 응원할 수 밖에 없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너무나 비굴하고 찌질하게 보여서 ‘그래 어디 한번 잘하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만약 그 노선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그의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도 심드렁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김열 감독을 응원하는 동시에 위에 밝힌 이유로 인해 김지운 감독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초반에 몰입하였다.

김열은 마지막 부분만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것 같다며 영화 제작자를 설득한다. 하지만 그가 뚫을 난관은 한두개가 아니다. 지원군이 없어 보이자 그는 세트로 지어진 성당에 들어가서 신께라도 빌고 싶은 심정이다. 그가 고해소에 들어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한데, 그의 열정과 절망 속에는 ‘죄의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는 사실 신자가 들어가는 좌우측 고해실이 아니라 신부님이 들어가 계시는 자리였다. 이는 그가 신의 대리인 즉 자신에겐 영화의 ‘신’인 신감독의 대리인으로써 그가 못다 찍은 걸작들을 찍겠다는 암시 같기도 했다.


그의 목표는 절실했다. “싸구려 감독이라고 멸시 받고 싶지 않다. 걸작을 만들고 싶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이미 검열이 끝난 원본을 다시 찍을 때 발생할 심의 문제, 출연자들의 일정 조율에 대한 시간 문제, 그들에게 지급할 돈 문제 등이 눈 앞에 버티고 있다. 그러나 그건 돈만 밝히는 백사장의 입장이다. 감독은 작고한 신감독의 조카 신미도에게 하소연을 하며 대본을 보여준다. 모두가 자신을 비난하고 무시하지만 그녀는 그의 수정된 원고 속에서 그로테스크한 카프카적 문학성을 보고 “위대한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원고를 읽고, 자신은 ‘이제 꿈이 생겼다’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재력가가 되겠다.“라는 포부까지 밝히며 그를 적극 지원한다. 그렇게 절망 속에 있던 김열은 미도라는 부스터를 달고 나아간다. 그리고 연출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촬영을 강행한다.


김열이 바꾸고 싶었던 ‘거미집’의 마지막 부분은 절정과 결말 부분이다. 원래는 가족 치정극에 지나지 않는 졸렬한 작품이지만, 그는 여기에 계층 하이라키와 그것이 전복되는 상황을 새로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불’을 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독이 원했던 것은 배우들에게 ‘진짜’를 연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속 배역도 모두 자신의 본명들로 바꾸고, 거미 소품도 실제 거미를 사용해 배우 얼굴에 떨어뜨린다. 그래야 영화가 ‘진짜’ 같아진다고 말한다. 그는 “’가짜‘를 연기하는 자신의 얼굴을 영화로 볼 때 부끄럽지 않느냐”라고 반문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배우들은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점입가경, 변경된 배역과 내용에 불만을 품은 배우들은 더 다루기 힘들어진다. 술독에 빠져 연기를 못하게 된 배우도 생겨난다. 재밌는 것은 이 배우들이 거미집 속의 인간 군상들과 똑같이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는 멍청하고 힘 없는 아들 역을 맡은 강호세. 그는 유부남이지만 극중에서 내연녀로 만나는 상대역 유림과 실제로 관계를 가졌다. 극중 공장 직원에서 호세의 첩으로 신분 상승을 노렸던 영악한 유림은 그의 아이는 아니지만 호세를 조정할 목적으로 호세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한다.


김열은 취해서 쓰러진 배우 대신 공장장이었다가 집에서 쫓겨나 ‘사냥꾼’이 된 남자 역을 맡아 연기한다. 아이를 낳자 쫓겨난 유림이 자살기도를 하자 그녀를 구해주는 사냥꾼은 자신의 처지가 바뀐 후 각성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운명에 맞서라고 말하며 ‘노예의 삶이 어떤 줄 아느냐.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삶이다.“ 라고 절규한다. 그 말은 감독의 내적 고백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핵심을 말해주기도 한다. 노예의 삶이 아닌 해방과 자유의 삶을 위해서 감독은 이 영화를 새로 완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불타는 세트장에서 신감독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그의 원고를 도둑질한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할 기회로써 그는 거미집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 절정 부분에서 배우와 스텝의 합이 철저하게 들어맞아야만 성공하는 롱테이크 기법인  플랑 세캉스를 감독은 제시한다. 제한된 촬영 시간 안에 끝내기 위해 불만 많던 배우와 스텝들은 모두 돌변하여 집중하고 끝내 성공시킨다. 숨겨 두었던 문공부 직원과 술취한 배우들은 불 붙은 2층 바닥을 뚫고 떨어지고 아수라장이 펼쳐지지만 감독은 몇초만 더 버티면 끝난다고 촬영을 강행한다. 불타는 세트장을 바라보며 그는 죽은 신감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신감독이 죽음을 불사하고서 느꼈던 카타르시스를 자신도 느꼈을 것이다.

극의 목적은 카타르시스 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핵심이다.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통해 관객의 내면에 있던 상처를 치유하는 작용이다. 이 영화는 김열 스스로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 자기 안에 숨겨둔 괴로움을 게워내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그는 진짜가 되었는가?


마지막에 거미집에 찾아온 손님이 발견한 다섯명의 거미 먹이집 장면은 기괴하면서도 이 영화의 매력과 가치를 한번 더 끌어 올린다. 밟지 않으면 밟히고 그리하여 죽기 않기 위해 죽이는 인간들의 끝. 한 없는 욕망을 추구하다보면 그 끝에는 결코 승리란 없다. 인간이 날고 뛰어 봤자 그 위에 선 또 다른 존재로 인해 파멸된다. 결국 영원한 승자는 없다. 언제나 내 머리 위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인간에게 완전한 해방과 자유는 없다는 아이러니도 깨닫게 된다. 김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숙명적 한계를 짚어봤다고 볼 수 있다.


거미집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감독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드디어 그가 바라던 인정을 건넨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영 석연찮다. 그 이유는 뭘까 생각을 해 보았다. 거미라는 동물의 상징은 신성, 혹은 창조 이다. 이 영화에서 거미는 김열 감독의 열망이다. 모두를 집어 삼키고 맨 꼭대기에 앉고 싶은 파괴의 욕구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치지 않는 창작의 욕구이다.

거미집은 그가 만든 영화 그 자체이자 그의 내면이다. 내부를 보면 볼 수록 엉망이며, 욕망으로 얽혀 있다. 그는 자신의 인정 욕구와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는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완벽했느냐 혹은 그래서 걸작을 만들었느냐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열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에 만족을 했느냐 목표를 이루었느냐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보면 그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예술을 승화시켰다. 그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는 그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실제 영화로는 자신도 관객의 한명이기 때문에 숨겨진 비밀을 또다시 마주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숨겨진 욕망과 거짓들을 다 드러내고 죽지만 자신의 비밀은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희극이지만 비극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영화를 성공 시킨 뒤에도 계속 불안에 시달릴 것처럼 보인다. 그건 예술가로써 가진 도덕적 순결주의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몇가지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 첫번째로는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열악한 영화 제작 환경 속에서 고투하던 전 세대에 대란 기록 영화라는 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영화 속의 영화라는 액자 구성의 영화 중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써 앞으로 자주 언급될 것이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김지운 감독 스스로의 고투가 뭍어나는 작품이자 그의 재기를 알리는 작품으로써 의의이다.

영상미도 좋았는데 특히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서의 화면들은 고전영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기대 이상으로 즐겁게 감상했고, 그의 재기도 성공한 것 처럼 보인다. 이로써 그의 영화에 대해 다시 기대를 갖게 되었고 김지운 감독의 차기작이 나오면 망설이지 않고 극장으로 달려 갈 것 같다.



덧붙임>

1. 각본 : 거미집은 동주, 러시안 소설, 카시오페아 등 꾸준하게 각본상을 받아온 신연식 감독이 각본을 맡았다. 이번에도 거미집으로 각본상을 받지 않을까? 영화제가 주고 싶은 각본일 것 같다.


2. 김기영 감독 : 김지운 세대의 감독들은 특히 김기영 감독의 작품을 발굴하고 재조명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영화를 촬영하다다 불에 타 죽는 감독이라는 ‘신감독’ 설정은 사실 김기영 감독의 죽음과 같아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유족들의 항의를 받을 수 밖에. 하지만 원만히 합의는 이뤘다고 한다. 컬트 영화 애호가들은 김기영 감독을 아직도 좋아하고, 그의 영화가 가진 기괴함과 애로티시즘을 특별하게 여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영화가 담고 있는 에너지가 ‘찐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도 실제로 여배우들 얼굴에 진짜 쥐를 떨어뜨리며 촬영을 했다고 한다.


3. 쁠랑 세깡스 : 이 영화의 막장 소동극이 극에 치닫을 때 나온 반가운 음악. 이 장면에서 내가 틈만 나면 흥얼거리곤 하는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서 좋았다. 프랑스의 노래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뒤 유명해졌던 France Gall 의 Pupee de cire, pupee de son. 인형 같은 외모로 좋은 가창력은 아니지만 ‘잘 못하는 매력’도 매력이란 걸 어필하는 듯한 그녀에게 프랑스는 한때 열광했다.

https://youtu.be/s5aeeSmkPwQ?si=5KbmZogrsrcvKA-1

4. 이제는 안심하고 인랑을 한번 봐볼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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