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독서모임 트레바리에 남긴 글 입니다
https://trevari.co.kr/bookreviews/show?id=bbf3fdb4-fc76-461c-80af-16e3a78fe6b0
+내게 남은 생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삶과 죽음. 그의 작품들을 꼽아 볼 때 가장 중요한 책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일 것이다. 여러 번 읽고 살 때마다, 주변 친구에게 선물했던 특별한 소설. 그리고 몇 해전 명동극장에 연극이 걸렸을 때 우연히 지나치다 혼자 들어가 숨죽이고 눈물을 훔치며 본 적도 있다. 그로부터 몇 년에 지난 지금 이토록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처음엔 20페이지를 다 못 넘기고 닫았다 열다를 반복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끝까지 찡한 마음이 남았다.
이 책은 내게 ‘사랑’에 대해 가르쳐준 책 중 하나이다. 불어를 배우고 있어 최근 원서로 읽고 있다. 원서로 같이 읽는 덕분에 눈물은 쏙 들어갔다. 살아있는 국어의 힘을 새삼 느꼈고 모국어를 통해서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음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불어 원제를 보면, 사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말은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고 곡해의 소지도 있다. 실제에 더 가까운 원제의 의미는 ‘여생’, 즉 ‘남은 생’이라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사랑 없는 삶
하밀 할아버지에게 모모는 '사랑없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나요?' 라고 묻는다. 하밀 할아버지는 자신의 단 하나의 사랑의 기억에 의존해 추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랑 없이도 살 수는 있다는 대답을 전했다. 하지만 모모의 결론은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이다. 이 대화는 어린 내게도 '진짜 사랑’이라는 것은 뭘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한때 내게 사랑은 책임감이나 희생과 같은 의미였는데 지금 내게 사랑은 상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걱정, 믿음, 배려 등 조금 무게가 덜 한 단어로 대체되었다. 그전에는 사랑이란 타인의 삶에 개입되어 같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군분투에 가까울 정도였다면 지금은 상대가 원하는 바를 '이해' 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랑은 멀리 있는 것도 그리 어려울 것도 아니고,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그 관계에 우리가 얼마나 집중하고 나를 열어 내어 그 사람을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고 귀기울이고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아무것도 나눌 수 없을 때조차, 곁에 있어주는 게 가능한 사이인지도 사랑의 척도가 된다. 그렇다면 내 주위에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되나? 나는 오늘 밤 곰곰히 그 이름을 떠올려 본다.
+엉덩이로 사는 일
소설을 읽다가 인물을 칭하는 고유명사만큼 많이 나온 단어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다. 바로 ‘엉덩이’ 가 아닐까 싶다. 엉덩이로 벌어먹던 로자 아줌마는 50세에 은퇴를 했다. 그렇다면 대략 그녀의 나이 25세부터 시작한 매춘부 생활은 그녀의 65세 인생에서 35%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은퇴 이후 그녀는 창녀들이 맡기고 간 아이의 엉덩이를 닦아주며 여생을 살았다. 그 중 가장 맏이, 모모가 어린 아이들의 엉덩이를 닦아주고 그것을 하나의 놀이로 만들기도 했다는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모모는 보통 똑똑한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여기저기 똥을 싸고 다녀 로자 아줌마를 괴롭게 했던 일은 로자 아줌마가 얼마나 평생 '엉덩이'에 메인 삶이었는지 희화적으로 보여준다. 섹스와 배설은 결국 기본 욕구,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더욱 밑바닥의 인생을 표현할 때 절묘한 비유가 되었다. 종국에 병들어 의식을 놓을 때마다 로자 아줌마의 배설물이 묻은 엉덩이를 닦아내는 일을 어린 모모가 어떻게 해냈을까 싶지만 모모는 수년 간 로자 아줌마네 아이들에게 단련되어 누구보다 엉덩이에 대해서는 아주 노련하게 해냈던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헛튼 경험을 결코 주지 않으신다. 인샬라.
+결핍된 사람들
내 삶에 많은 사랑이 지나갔는데, 그들 중 부모와 일찍 헤어져 조부의 손에 길러진 사람, 입양인,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 등이 숱하게 존재했다. 물론 부족함 없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을 만나기도 해보았지만, 내가 늘 마음 쓰여 가슴 아파하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는 사람은 결핍이 있는 쪽이다. 그래서 모모를 보며 내가 사랑한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연기처럼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하는 동안 나 자신은 모모가 되었다 로자가 되었다 롤라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는 왜 결핍에 끌리게 될까? 소설에서도 등장하지만 결핍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결핍으로 인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비워진 쪽을 채워주고자 하는 본능은 술잔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좋아하는 시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게 당신의 상처를 말해봐, 나의 상처에 대해서 말할 테니' 우리는 서로의 결핍, 상처, 모자람을 통해 더 끈끈한 관계를 형성한다.
+로자와 롤라 아줌마
모모와 그 주변 사람들은 정체성, 인종, 종교, 계급 등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프랑스 사회 내에서 겪고 있는 인물들이다. 로자 아줌마는 유대인으로서 항상 아우슈비츠의 공포를 간직한 신경증 환자이며,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돕는 롤라 아줌마는 세네갈 출신의 이민자이다. 그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제대로 보호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불안을 안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주변인으로써의 외로움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권투 선수 출신의 트랜스젠더인 롤라 아줌마는 볼로뉴 숲에서 번 돈을 모모에게 서슴없이 건넨다. 그 돈이 어떻게 벌어들인 돈이건 간에, 롤라는 자신의 이웃을 성녀처럼 아낌없이 돕는다. 모모는 롤라 아줌마의 돈으로 식료품을 사서 로자 아주머니를 먹이고, 종국엔 그녀의 돈으로 '자연의 법칙' 대로 썩어가는 로자 아줌마의 냄새를 지우는 향수를 사서 뿌리고 화장품을 사서 분칠을 한다.
+모모 앞 그리고 뒤의 삶
나딘 아줌마와 라몽이 마지막에 모모를 거두어 주는 것으로 결말이 나긴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결말이다. 나딘의 별장에 머무는 모모의 고백은 비현실적이다. 특히 ‘…그래서 여러분이 모두 왔고. 내게 어떤 의무도 없는 여러분이 나를 이곳 여러분의 시골 별장으로 데려온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독자들이 모모에게 느꼈을 도덕적 책임감으로 인해 조숙한 모모가 지어낸 거짓말, 우리가 듣고 안심할 결론을 만들어 냈다는 걸 난 느꼈다. 모모의 입성과 얼굴을 보고 멸시하던 나딘네 집 아이들이 '모모가 더 있길 조르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모모의 아르튀르도 라몽이 일부러 가서 가 왔을 리가 없고. 모모는 상상 속에서 아르튀르를 안고 어느 빈민구제소 구석에서 눈을 감고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한동안 긴 잠에 들었을 것이다.
+연관된 이미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 장 삐에르 쥬네의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등의 이미지가 생각 났다.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혁명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보면, 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곁에서 몇 달간 함께 하다가 썩은 육신 옆에서 미쳐버리는 혁명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모의 모습을 보며, 실제 프랑스에서 그러한 일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죽은 육신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곁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모모처럼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려주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이야기는 아직 들은 바가 없고, 작품으로도 접한 적이 없다. 하밀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로자 아줌마의 병증을 보면서는 프랑소와 오종의 '사랑의 기억'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점점 늙고 병들어 안락사만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로자 아줌마의 비참함을 보면서, 미하엘 하네케의'아무르'도 떠올랐고, 나의 노년과 존엄사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
장발장이 빵 훔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레미제라블의 뜻을 아빠에게 물었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그건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이다'라는 말에 먹먹한 기분으로 책을 꼭 안았다. 그때 나는 비참한 사람들을 아직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스스로의 깨달음을 위해서 인지 몰라도, 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비참한 삶에 대해 책이 아닌 실체를 알고 싶었다. 일을 위해 자청하여 떠난 남수단 톤즈의 한센병 환자 마을에 갔을 때, 소를 죽인 이유로 살인자가 된 소년을 인터뷰했을 때, 인간에 대한 존엄성 없이 몰살된 캄보디아의 거대한 해골탑 앞에서 섰을 때. 죽음을 선고 받고 한 달간 사막을 걸었던 신부님의 이야기, 겨울 영하 60의 추위에 맨홀 아래서 생활한 몽골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나는 책보다 더한 비참한 삶들을 보고 들었다. 그리고 변방에 있는. 자기 삶의 주인공과는 먼. 잊혀지고 쓰러지고 사라진 그들에 대해 내가 만난 혹은 만나고 싶은 모두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간성의 위대함을 믿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밀 할아버지의 손 아래 꼭 들려있던 한 권의 책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건 의미있다. 모모에게 인생의 참다운 것, 아름다운 것을 가르쳐주고 니스에서의 대모험에 대한 행복한 환상을 심어주고, 아름다운 양탄자를 탄 신에 대해 이야기하던 하밀 할아버지. 그가 그저 눈 뜬 장님이 아니라 벨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비참함을 다 알고도 신의 위대한 무관심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나날
모모는 비참한 삶 속에서도 하밀 할아버지, 로자 아줌마, 롤라 아줌마, 나딘 가족 그리고 힘들 때마다 자신들 민족의 방식으로 도와주는 선량한 이웃들, 길 가는 행인의 작은 선의 등을 받는 사랑스럽고 복 많은 어린아이였다. 모모의 이야기가 비참한 결말로 끝나지 않고 그의 환상인 듯 끝났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하겠지만, 그 이후의 삶이 어떠할 지 우리는 그들 이웃의 삶을 통해 감히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지혜로운 하밀 할아버지의 말처럼 모모는 위대한 시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그 어리고 가여운 모모는 에밀 아자르 자신 혹은 책을 읽고 있던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우주의 시작에서 부터 우린 너와 나로 나누어지기 이전부터 모두 하나였기 때문에. 비참함도 고귀함도 추함도 아름다움도 없이 모두 온전한 영혼들이고 하나이다. 나의 비참한 어느 날이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의미를 깨달아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깨달음의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