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사람의 가치에 값을 매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 아니 삶도 죽음도 오로지 돈이 되는 시대. 물질에 치우친 생각들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의 잔인함이 만연한 시대에. 가난한 청년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는 분명 고전 시대의 사랑과 다르다.
구의 증명을 읽었다. 나온 지는 9년 정도 되었는데 작년부터인가 역주행해서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에 상위 랭크 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서 일 것이다. 10-20대 학생들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읽는다고 했다. 모두 구와 담이 거쳤고 끝난 시절이다. 어린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가 과연 괜찮을까? 싶었지만 읽다 보니 어른들보다 그들이 더 잘 이해하는 감정일 거라 생각했다.
만약 내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무척 매료되었겠다 싶었다. 읽는 도중 시간의 방이 하나씩 열리는 경험도 있었다.
구와 담은 서로 어린 시절부터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들은 함께 성장하고 정체성을 찾고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을 서로 위로받는다.
그들의 삶과 사랑은 무중력을 지향한다. 그만큼 저 깊은 땅 속에서부터 그들을 끌어당기는 삶의 무게로 그들은 애처롭게 지쳐있다. 고통의 바다 위에 위태롭게 놓인 종이배 같은 존재들이다. 누군가 훅 불거나 손가락으로 찌르면 바다 깊이 푹 잠길 것만 같다.
그들은 둘만 있는 우주 속에서 유리 돛단배를 타고 동동 떠다니며 천만년 만만 년 살기를 원하고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청설모가 되어 살기를 원한다. 그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들의 삶을 서로가 기억하며 살기를.
구는 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 끝에서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그 죽음도 넘어서는 이야기였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는 것과 사랑의 여러 빛깔과 형태에 대한 소설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버릴 수 없고 먹어버리고 싶고 먹히고 싶은 마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파격적이고 기이할 테지만. 그런 무시무시하고 고어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쓰인 스토리는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글을 쓰는 내내 들었다던 9와 숫자들의 ‘창세기’가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은 본질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유튜브에 가면 구의 증명 읽고 찾아왔다는 사람들의 댓글로 가득하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고 그의 삶을 곱씹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삼켜 내는 애도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무겁고 어둡고 소리 없는 절규에 차 있지만. 남김없이 털어내는 마음으로 하지만 나직하게 이런 삶과 생각도 이 세상 어느 곳에는 존재하는 거라고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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