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다
아마 내가 책을 낸다면 저자 소개는 이렇게 시작하겠지.
금일봉. 1991년 서울 태생.
소개 그대로 대도시 서울 태생인 나는 서울 중심부의 3층짜리 주택에서 태어나 쭉 살았다. 서울 어디든 이동 시간이 30분 내외인 데다, 급행을 타면 신세계 강남점에 10분 안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집이었다. 독립 후 얻은 두 번째 집도 서울이었다. 회사는 판교였지만 오래 살았던 서울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회사에서 30분 거리의 원룸을 얻었다. 처음 경험하는 혼자만의 생활은 미치도록 좋았다. 밤새 통화하는 옆집 남자만 빼면. 그렇게 매일 밤 벽간소음으로 괴로워하던 내게 거취를 옮길 새로운 이벤트가 발생했다. 바로 결혼. 나는 결혼 후 서초동의 한 빌라로 이사했다.
예술의 전당, 대법원,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는 서초동은 비싼 동네였다. 이불 가게에서 이불을 결제하며 주소를 적으면 번쩍이는 금붙이를 주렁주렁 건 사장님이 ‘어머, 서초동 살아요?’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자긴 언제쯤 그 동네에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한탄도 따라왔다. 금붙이 때문에 반사된 빛에 눈을 덜 찡그리려고 노력하며 ‘어차피 전세’라고 해도 반응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린 직주근접 때문에 서초동에 살았지만 진짜로 가진 돈이 거의 없었다. 당시엔 전세 이자가 무척이나 쌌고, 집값의 80퍼센트를 대출해도 웬만한 집 월세보다 저렴했을 뿐이었다. 투룸 빌라라곤 하지만 크기는 원룸과 별로 다르지 않았으며, 창문을 열면 30cm 정도 떨어진 옆집의 세간살이가 모두 보였고 햇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집은 꼭 해가 드는 집으로 가리라 굳은 다짐까지 할 정도였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아니, 서울에 집 구하기 힘든 세상이니 그냥 참아졌던 걸지도.
그렇게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해갈 무렵, 회사에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나, 지방에 내려갈까 해.’ 좋은 자리가 났는데, 쉽게 나는 자리도 아니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자리도 아니라고 했다. 커리어에 좋을 테니 가고 싶다며 내 생각을 물었다. 가고 싶어 하는 남편의 마음이 스마트폰 너머로도 느껴졌다. 가고 싶은데 어쩌겠나, 가야지. 그렇게 물 흐르듯 나 홀로 서초동 생활이 시작됐고 우린 주말부부가 되었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집답지 않은(전문 업체를 불러 청소해도 바닥에서 끝없이 검은 먼지가 나오는 블랙홀 같은 집이었다) 관사에서 자는 남편이 매일 피곤하다는 것,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오는 남편이 5시간씩 운전해서 녹초가 된다는 걸 빼면 말이다. 남편이 짠했지만 힘들 땐 올라오지 말고 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올라오지 않아도 관사에서 쉬는 건 별로 쉬는 것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주말부부 생활을 버티길 1년쯤. 익숙해진 일상을 바꾸는 갑작스러운 변화는 내가, 아니 내 회사 생활이 가지고 왔다.
나는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입사 초기엔 내가 만든 콘텐츠가 릴리즈되는 게 무척이나 뿌듯했고 일하는 보람도 크게 느꼈다.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일 외적인 곳에서 왔다. 각종 사건 및 사내 정치로 회사는 큰 변화를 겪었고, 그 결과 내가 있던 팀에도 폭풍우가 몰아쳤다. 마이크로의 마이크로의 마이크로 매니징이 시작됐다. 결국 기획 당시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결과물(더 좋아지면 말을 안 한다) 보기를 몇 년째. 이전과 달리 반복되는 삽질이 너무 지쳤고, 점점 떨어진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재직 6년 차를 꽉 채우던 무렵 편성준 작가의 책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를 생각 없이 집어 들고 읽다가 멈칫했다. 오랜 시간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로 살아온 작가가 자신을 ‘모나미 볼펜’에 빗댄 대목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평생 카피라이터로 살면서 쓰고 싶은 글보다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글만 썼던 내 인생이 모나미 볼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필처럼 향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만년필처럼 비싸지도 않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고 쉽게 버려지는 볼펜 말이다.”(『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편성준, 북바이북)
그의 통찰이 최근 몇 년간의 내 회사생활을 꿰뚫는 느낌이었다. 존재가치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불안장애와 희소 난치병을 얻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상담을 받고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어느 날,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와 회사로 돌아오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함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왔다. 이대로 살면 미래는(아마 건강도) 없어. 라고 저 너머의 내가 〈인터스텔라〉처럼 외치고 있었다. 참을 인을 385번쯤 쓰던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호기롭게 내 글을 쓰겠다고 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내 인생이 끝나는 줄 알던 사람이었기에 이직도 고려했으나, 일단은 건강 회복이 우선이라고 결론지었다. 절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부터 업무 외적으로 사이드잡을 하고 있었고, 프리랜서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직종이었기에 일단 그만둬도 굶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퇴직금도 있으니 오히려 회사 다닐 때보다 풍족해질 수도 있다는 황당무계한 희망 회로까지 돌리고(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있었다. 오래 다닌 회사였기에 마지막 날엔 눈물이 찔끔 났지만, 회사 문을 나오는 순간엔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다. 미치게 후련했다.
환한 대낮,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텅 빈 서초동 집 소파에 혼자 앉아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앞으로 어쩌지? 대문자 J형에겐 미래 계획이 필요했다. 비록 지키지 못할지라도… 안경을 올려 쓰고 미래를 걱정하며 달력을 확인했다. 회사까지 그만둔 마당에 전세 이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고, 은행에 매달 목돈을 갖다 바치는 중이었다. 이자 낼 날짜를 확인하는데 때마침 집 계약을 갱신할 날도 돌아오고 있었다. 문득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서울 한복판의 작은 집이 참을 수 없게 감옥처럼 느껴졌다. 사방의 벽이 나를 옥죄어왔다. 이 집을 유지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내는 일이 너무나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래, 더 이상 여기선 못 살아. 남편에게 전화했다. 우린 떠난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뼛속까지 대도시 삶을 살아온 내가, 뿌리 깊은 나무처럼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던 내가. 소도시로 떠나 새롭게 살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