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는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사교육’ 문제는 빈부격차의 문제라는 경제적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공정’, ‘평등’의 문제라는 사회적 이슈로까지 이어진다. 한국에서 사교육은 학원 교육을 주로 말한다. 한편, 영국, 미국 등에서는 사립학교 역시 사교육의 영역으로 인정된다. 다만, 이때 사립학교는 ‘public school’, 즉 학원과는 달리 시스템 면으로 볼 때는 공적인 부분을 띠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 ‘public school’은 소수에게만 공개된 특별 교육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국 역사 속에서는 ‘public school’의 개념이 언제부터 있었을까. 소수에게만 제공되는 특별 교육의 공간이란 측면에서 보면, 조선시대 ‘서원’은 ‘public school’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서원은 지방의 양반들이 건립하여 운영하였으며, 제사를 지내는 사당 그리고 공부를 하는 강당이 갖추어져 있었다. ‘지방 양반들이 건립하여 운영한다’라는 점에서 볼 때, 서원은 사립학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 양반들의 여론을 통해 서원 건립 논의가 일어나면, 반드시 지방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사립학원과 개념이 달랐다. 특히, 서원은 지방 사회의 공론을 토대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도 공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애매모호한 것은 서원을 반드시 ‘사립학교’로 단언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서원에는 배향 인물이 존재했다. 서원의 배향 인물은 이른바 道學者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선정되었다. 도학자란 성리학적 지식이 깊은 유학자 중에서도 명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의미했다. 예컨대, 이황, 이이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서원에 출입하던 지방 양반 중에는 배향 인물의 후손들이 있었고, 배향 인물의 제자, 직접 제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간접적인 제자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봄ㆍ가을로 선배 유학자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런 의식은 매우 중요한 활동이었다.
이런 제향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은 관에서 일부 부담해 주지만, 대부분이 배향 인물 후손들이 부담하였다. 서원의 제향 활동에는 지방 양반들이 참여했지만, 사사롭게 보면 서원의 제향 활동은 한 가문의 선조를 제향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사당의 성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조선시대 서원은 ‘~사’로 출발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는 ‘~사’와 ‘~서원’이 혼동하여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후손들의 재정만으로 제향 활동을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기 서원에서는 한 마을을 지정하여, 서원 제향에 필요한 물품을 부담하도록 하는 대신 국가로부터 국역을 면제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서원의 기본적인 역할은 제향과 강학에 있었지만, 지방 사회의 여론을 수렴하는 공간 역시 서원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원회(院會) 혹은 재회(齋會), 강회(講會) 등 서원에서는 운영회의, 의례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 독서를 하고 공부한 지식을 나누기 위한 회의 등이 열렸다. 그런데 이러한 회의에서는 지방 사회의 문제들이 거론되었다. 특히, 강회에서는 단순히 독서한 내용을 시험 보는 것이 아니라, 향약을 기반으로 하여 지방 사회에서 벌어진 하극상 문제, 인륜의 기강 문제 등이 다루어지고, 여기에 대한 처벌 혹은 규탄도 진행되었다. 이때 향약은 한마디로 도덕 윤리 지침서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서원은 지방에 양반들이 지방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일 장소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사립학교’라는 이미지와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서원을 사립학교로 단언하기 어려운 부분은 ‘사액 제도’에 있었다. 사액은 국가가 서원에 내려준 일종의 공인인증서 같은 것이었다. 사액서원은 여러 혜택이 있었는데, 국가로부터 서적을 받고, 가장 큰 혜택은 면세지 3결을 받았다는 점이다. 특히, 소수서원 유생들은 자신들의 서원이 사액서원이란 이유로 그들의 서원은 ‘國學에 버금간다’라고 자부하였다. 이러한 자부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액은 당시 지방 양반들에게 국가로부터 내가 진짜 양반임을 입증받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대부분 양반들은 자신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건립한 서원을 사액 받기 위해 관료들과 연대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의 수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숙종 연간에만 새롭게 건립된 서원이 230여 곳이 넘었다. 이 기록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에 불과했으니, 실제로는 더욱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액서원 수를 줄이고, 사액을 받지 않은 서원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감소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통해 서원에 지원되는 재정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 최종 결과가 바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명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서원은 사회 기구로서 500여 년을 조선왕조 역사와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명령으로 47개소 서원만 남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배향 인물 후손들에 의해 서원이 복구되는 등, 서원의 역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특히, 서원은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서원은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할 뿐만아니라,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지역별로 서원을 복구하거나 문화콘텐츠로 서원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