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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예 Nov 26. 2023

지하철 1호선에서 천사 만난 썰

다정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이 추워지니 따뜻했던 기억 하나가 떠올라서 적어본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이니까 한 4년 전쯤, 아직은 쌀쌀한 꽃샘추위가 느껴지는 이른 봄이었다.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하철에 빈자리가 없어서 손잡이를 잡고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 찬 의자 앞에 섰다. 하객룩으로 원피스에 힐을 신고 계속 서있는 일이 꽤 고역이긴 했지만, 힐을 신고 지하철 타 본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내릴 역까지 서서 가는 게 큰 무리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조금 더러운 이야기일 수 있으니 주의)


  그렇게 몇 정거장을 갔을까,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이명 비슷한 게 들리더니 속은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갑자기라는 표현보다 더 속도감 있고 긴박한 표현이 무엇일지 떠오르지 않지만, 갑자기보다 더 갑자기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디쯤 왔나 보니, 내리려면 아직 멀었고 빈자리가 날 기미는 안 보이고 식은땀만 흘리면서 지하철 손잡이에 그야말로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선 채로 끙끙 앓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내 대각선에 있는 자리에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어디 아픈 것 같아 보여서.. 여기 앉아요"


  아주머니는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자신의 자리로 오라고 손짓하며 말씀하셨다. 호의를 거절할 여유가 없었던 터라 감사인사를 드리고 쓰러지듯 양보해 주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괜찮아지기를 기다렸지만, 울렁거리는 속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상태였는데, 아주머니가 또 말을 걸어오셨다. 


  "토할 것 같고 그래?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계속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내 모습을 알아차리시고는 말을 걸어오신 것이었다. 나는 "네" 하고 겨우 답을 했다. 내 대답을 들으신 아주머니는 일행 분들과 몇 마디를 주고받으시더니 비닐봉지 하나를 얻어다 주셨다. 


  "이거 갖고 있어요."


  감사인사를 드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봉지를 붙잡고 있었다. 그대로 내려서 찬바람이라도 쐬면 괜찮아질까 생각도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면 몇 걸음 못 가 쓰러질 것 같았다. 1호선에서 쓰러져 119 구급대에 실려나가는 그런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조금만 참아보자'라고 온갖 신체 장기에 말을 걸었다. 내 옆에 앉아계시던 분들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싶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사람이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끙끙대며 옆에 앉아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비닐봉지를 쓸 일이 없길 바랐는데 결혼식 뷔페에서 먹은 해산물이 말썽이었던 건지 먹은 걸 전부 비닐봉지에 쏟아냈다. 그러는 동안 봉투를 건네준 아주머니와 그 일행분들은 내가 앉은자리 가까이로 오셔서 나를 둘러싸 주셨다. 얼핏 등도 좀 두드려주셨던 것 같기도 하다. 울타리처럼 나를 둘러싸 주신 것은 구토장면을 직관하게 될 내 옆자리 사람들을 위한 보호조치이자 피치 못한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구토를 하게 된 내 체면을 지켜주려고 하신 행동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편하게(?) 게워내고 나니 거짓말처럼 속이 편안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분들은 어느새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나도 곧 내려 들고 있던 봉지를 처리했고, 뒤에 오는 열차를 타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살면서 몇 번 안 되는 '죽다 살아났다' 싶은 경험이었다. 아주머니들께 작게나마 사례를 하고 싶었는데 다시 그분들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 도와주시고는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셔서 '천사들이 내게 왔다 간 건가' 싶기도 했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자리에 앉지도 못했을 거고, 비닐봉지를 얻지도 못했을 거다. 봉지가 없었으면 가방이라도 열어서 구토를 했겠지만,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자기 가방에 토하는 1호선 구토녀'로 찍혀 숏폼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가지고 있던 봉투를 나눠주고, 곤란한 모습을 가려주는 게 하나하나 보면 별거 아닌 행동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알기에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게다가 그분들이 보여주셨던 다정함이 사례를 바라거나, 언젠가 보상으로 되돌려 받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그 일 이후로 가끔 뉴스에 보도되는 그런 대단한 선행이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용기를 내서 다정함을 실천하자고 다짐했다. 그게 그분들께 받은 선의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도와주셨던 그분들이 보여주셨던 다정함이 나로 하여금 또 다른 다정함을 베풀게 하고 있으니 그분들은 정말 천사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위기에서 나를 구해주신 1호선의 천사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며, 내가 행하는 사소한 다정함도 누군가에게 닿아 또 다른 다정함으로 이어지고 있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Unsplashpure ju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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