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만남보다 이별이 많아지다는 것.
주말 새 아는 사람의 아버지 부고가 두 건이 있었다. 직접 장례식에 참여할 만큼 평소에 교류가 많았던 인연은 아닌데, 알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정도의 관계. 부의금을 얼마를 해야 적당할지 고민해야 하는 인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하지 않는 이유는 언젠가 이 인연이 이어질 거라는 미련 때문일까.
누군가에게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가슴 아픈 이별이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를 가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씁쓸하다. 우리는 그런 계기가 있을 때만 그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일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들. 과거의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고 가느다란 인연의 끈이 어찌어찌 이어져오고 있는 관계. 카톡 프로필을 들여다보거나 인스타 계정을 들어가 보지만 연락은 하지 않는다.
한 때는 그래도 나와 연이 있었던 사람의 상실의 슬픔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표현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도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 마음의 이면에는 나의 슬픔과 기쁨에도 그들이 보답할 거라는 기대 심리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고, 앞으로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모르니 최소한의 예의는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학교를 다닐 때는 같은 반 친구들과 모두 다 친구였고, 같은 동네 사는 애들끼리도 놀이터에서 한두 시간만 놀다 보면 친구가 되었다. 더 많이 친하건, 덜 친하건 그냥 다 친구였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은 모두 친구가 아니었다. 직장 동료, 선배 또는 후배, 직장 상사, 동네 아는 엄마, 동호회 회원 등등 관계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 연을 맺은 상황에 따라 구체화되었고 당연히 거리도 달라졌다. 대부분의 관계는 사회생활의 결과였으며, 내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서 그들과의 관계도 변하였고, 대부분의 관계는 상황 종료와 함께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사를 가면 끝났고, 직장을 옮기면 끝났고, 동호회를 그만두면 끝났다. 유통 기한을 가진 인연들 안에서 유통 기한을 넘어서는 인연들은 매우 드물었다.
다만 그런 인연을 만들려면 정성을 들이고 애를 써야 했다. 나와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인연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물론 그러다가 안 맞는 부분을 알고 멀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친구였던 인연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 마음도 멀어지고 나의 삶과도 멀어졌다. 결국 인연이라는 건 소모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고 나면 끝나는 것일까. 작년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조퇴를 하고 비행기를 타고 갔었다. 진심으로 친구의 슬픔에 나도 함께 슬펐고, 반나절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 하나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위해 기꺼이 나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관계. 그런 관계가 나에게는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나의 기쁨과 슬픔에 기꺼이 함께 해 줄 인연은 얼마나 될까.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게 만드는 계기라는 건. 결국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누군가도 인연의 깊이와 거리 앞으로 관계에 대한 전망을 가늠하며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나와 인연이 계속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과는 나는 이별을 한 거다. 마흔이 넘으니 40년의 삶의 과정에서 이별한 사람들이 참 많다. 나는 내 삶이 바빠 이렇게 많은 이별을 겪은 줄도 모르고 살았다. 어른이 될수록 외롭고 삶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새로운 만남보다 이별이 더 많기 때문인 걸까. 나와 이별한 사람들은 마치 내가 모르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도 그들에게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