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을 선호하는 이유.
요즘 세상은 모든 걸 전자기기로 해결할 수 있는, 실로 엄청나게 편리한 세상이다. 굳이 멀리 있는 대형마트까지 가서 낑낑대며 무겁게 장을 볼 필요가 없어졌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다양한 음식들을 둘러보며 손쉽게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을 일이 요즘 세상에선 너무도 가까이, 그리고 너무도 당연히 일어나고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전자책 한 권을 구매하면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책을 읽을 수 있다. 서점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이 '나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외치는 애원을 듣지 않아도 되고, 무거운 책들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안 그래도 멀쩡하지 않은 척추 건강을 해칠 필요도 없다.
예전에 책을 구매하기 위해 대형 서점 K문고를 찾아간 적이 있다. 책을 둘러보던 중, 이런 안내방송이 나왔다(내 기억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다). '200페이지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나무 한 그루가 베어집니다.' 그 안내방송의 메시지는 종이책을 사지 말라가 아니라 비치된 책을 소중히 다뤄달라는 것이었지만, 어찌했든 책 한 권에는 소중한 나무 한 그루가 희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십수 년을 살아온 나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지구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더 거창하게는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서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읽는 것이 더 좋을 편일 것이다. (과연 전자책이 친환경적일까에 대해서는 살짝 물음표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한다. 아니, 종이책만 읽는다. 앞에서는 그렇게 전자책의 편리함과 친환경을 강조했으면서 정작 종이책만 읽는다니? 웃기게도 나는 종이책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똑같은 내용의 책인데다가 심지어 가격은 종이책에 비해 전자책이 20~30% 가량 저렴한데도, 나는 종이책을 고집한다.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종이 냄새 때문이다.
종이책에서는 종이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종이 냄새가 난다. 재생지를 쓰는 책도 있고 일반 모조지를 쓰는 책도 있는데, 어느 종이든 나는 그 냄새 자체에 매력을 느낀다.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는 그런 냄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묘한 냄새, 묘한 향기가 좋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코에 책을 처박고 그 냄새를 음미할 정도의 변태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저 책을 펴서 인쇄된 활자를 읽고 종잇장을 넘길 때, 그 순간 코끝을 살짝 스치는 그 정도의 은은함을 좋아한다.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를 바란다.) 언제부터, 어떻게,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쌓여온 즐거움의 기억 때문일 것 같기는 하지만. 나른한 오후에 아무도 없는 방에 나 홀로 침대에 누워, 쳇 베이커나 빌 에반스의 음악을 틀어놓는다면 그 향이 더욱 짙어지는 것만 같다. 때로는 종이 냄새와 나른함에 묻혀 책을 읽다말고 잠에 빠질 때도 있다.
종이 냄새하니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대학생 때 종이 냄새가 좋아서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한 적도 있었던 것. 한 학기만 근무하는 일반적인 근로장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두 학기가 넘는 꽤 오랜 시간을 근무했었다. 도서관도 한 곳이 아니라 중앙도서관과 새벽벌도서관 등을 옮겨다니며 근무했었는데, 제일 즐거웠을 때는 보존서고에서 일할 때였다. 보존서고는 10년이 넘는 책들, 그러니까 신간에 밀려 도서 대출율이 낮거나 오래된 책들을 보관하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보존서고에 있는 책을 빌릴 때는 꽤 귀찮은 과정을 겪어야 했기에 학생들이 잘 찾지는 않았다. 그래도 빌려야 하는 경우에는 내가 직접 보존서고에 들어가서 해당 책을 찾아와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책도 있었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작가의 책도 있었고, 엄청난 크기의 책도, 다 낡아서 금방이라도 바스라져 먼지가 되어버릴 것 같은 책도 있었다. 어쨌든 그 일을 하면서 책들이 갖고 있는 세월의 흔적과 그 안에 고스란히 담긴 종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누가 해봤으려나. 이런 일들과 그로부터 경험한 종이 냄새가 내게 종이책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을 남겨준 것 같다.
나 또한 종이책을 포기하고 전자책으로 넘어가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앞서 말한 편리성과 친환경성 등의 이유로 말이다. 아쉽게도 번번이 실패했고, 읽으려던 책은 반도 읽지 못하고 종이책으로 다시 돌아왔다. 가장 큰 이유였던 종이 냄새는 물론이거니와, 부차적인 이유였던 종이 넘기는 느낌도 없었으며 완독하고나서 책장에 꽂는 재미도 없었기에. 제 아무리 편리하고 환경에 좋은 전자책이라 하더라도,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유형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르겠다. 아주 먼 훗날 종이책이라고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책들만 남게 되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책이라고는 전자책 뿐인 세상이 올 지는. 그래도 바라는 건 내가 죽기 전까지는 종이책이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고, 종이 냄새가 주는 기분 좋은 경험과 기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도 종이 냄새를 맡으며 책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