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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시고랭미고랭 Oct 09. 2019

너의 작은 걸음을 응원해

조금 느린 아이와 천천히 함께 걷기

아이의 두 번째 School term이 끝났다. 올해 1월 말에 인니로 건너왔으니 벌써 9개월이 지났다. 지난 9개월을 반추해보면 다음과 같다.


2~3월 : 엄마와 인도네시아 현지 적응 기간

4~6월 : 첫 등원 (아이 입장에서는 첫 번째 텀. 어린이집에서는 Nursery class final term)

6~7월 : Summer Camp (어린이집 여름방학이 무려 2개월이라ㅠ_ㅠ 두 달간 여름방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다른 어린이집을 다님)

8~10월 : Pre-K class 첫 등원 (아이 입장에서는 두 번째 텀. Pre-K class first term)


지난 9개월 간 아이에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 텀에서는 교실에서 내내 겉도는 것 같던 아이가 두 번째 텀부터는 클래스메이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선생님과 눈 맞춤, 다른 언어라도 대화를 하려는 시도, 친구들의 이름을 인식하고 호명하는 것, 아침과 오후에 안녕이라고 인사를 하는 것 등등. 참으로 큰 발전이었다.


당연한 것들인데 무슨 큰 발전인가 싶겠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감사하고 은혜로운 아이의 성취였다.


우리 아이는 발달이 조금 느리다. 말도, 행동도.


추측컨데 우리 부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하던 시기에 아이는 불안 증상이 생겼던 것 같다. 당시 아이의 행동(특히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사람이 많거나 조금이라도 소리가 큰 장소에 가면 극도로 불안해하며 우는 것)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쁜 직장과 남편과의 감정싸움에 지쳐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그맘때 즈음 그러려니, 양가 어르신들도 애기들 다 그렇게 큰다 하셔서 별일 아닐 거라 애써 자위했다.


어느 순간 아이의 발달은 아주 기본적인 점에서 멈추어 있었다. 혼자 밥 먹는 연습, 칫솔질, 배변훈련 등은 물론 간단한 의사표현을 위한 몸짓조차 없었다. 영유아 검진을 위해 찾아간 소아과에서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발달상담을 좀 받아보시는 게 어떠세요,라고 하셨을 때 가슴이 철렁했지만 남편과 나는 때 되면 알아서 하겠지, 하고 우리의 역할을 외면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일과 가정을 동시에 챙기기 위해 노력은 했어도 실제론 아이에게 못난 부모였던 것 같다. 돈만 벌어다 주는 게 부모의 전부는 아니었는데...

 

아이의 발달에 대해 본격적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건 인니에 건너오기 직전 사직을 전제로 한 육아휴직을 냈을 때였다. 회사를 정리하고 아이의 하루를 함께 하다 보니 아이가 더 잘 보였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그 어떤 어른들의 말에도 반응을 거의 하지 않는 것,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혼자 웅얼거리는 것, 머리를 쿵쿵 의자에 찧거나 신경질적으로 계속 우는 것, 혼자서 아무것도 시도해보려 하지 않는 것, 사람이 많거나 시끄러운 장소에 데리고 가면 극도로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 등이 보였다. 남편은 나보고 괜히 예민한 거 아니냐 했으나 더 이상 괜찮다고 여기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발달상담센터를 찾았다. 다행히 자폐는 아니지만 아이가 굉장히 예민하고 불안한 상태이며 언어와 행동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과를 받았다.


아이가 뭔가 보통의 또래와 다르다는 결과를 받으면 엄마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린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상담 선생님은 엄마와 아빠가 그동안 아이와 '적절한' 교류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즉, 아이의 말과 행동을 종합적으로 보고 '적절한' 반응으로 아이와 커뮤니케이션을 못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랬다. 남편은 아이를 예뻐했지만 아이와 단 둘이  3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는 육아의 '육'자도 모르는 아빠였고,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와 이야기할 뿐 아이가 내게 원하는 반응에 무감한 엄마였다. 그래서 이모님이 그리 쉽게 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육아가 우리에겐 너무나 어려웠었고, 꼬박 주말 이틀 아이를 챙기는 시간이 그리 힘들고 귀찮았었다. 둘 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니 집에서는 지쳐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아이가 말을 배우는 상대는 핑크퐁과 타요, 뽀로로였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부재는 아이를 더 움츠리게 했고 엄마의 서툴고 거친 케어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죄책감과 미안함에 마음이 쓰리다.


인니로 가기 직전이라 남편은 옆에 없었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언어나 행동발달 상담을 받긴 어려워 한 달간 주 2회 총 8번 아이와 함께하는 놀이상담을 받았다. 선생님과 함께 아이와 노는 시간을 보내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고 배웠다. 인니로 떠나기 하루 전날, 선생님은 아이가 예민하니 반드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아이를 낯선 환경에 노출시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일시적으로 퇴행이 있을 수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끊임없이 말해주고, 많이 안아주고, 다독여주라 했다. 아이가 엄마와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해야 새로운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래서 인니로 넘어오고 첫 두 달간 불안해하며 엄마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아이를 어깨가 부서지도록 안고 다녔다. 그동안 내가 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만회하고 싶은 마음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모두 견디게 했다. 아이는 지극히 예민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관찰하고 본인의 방식대로 충분히 소화한 다음에야 새로운 환경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아이의 감정을 온전히 감당하면서 회사 업무에 지친 남편의 짜증과 화풀이를 받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했다. 아이를 위해 버텨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만큼 견고했다. (그리고 6개월 후, 어깨는 완전히 내려앉아 팔을 들어 올릴 수 없게 되어 인니 현지에서 한방 치료를 받고 있고, 몇 주간 열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에는 장사가 없다)

 

첫 번째 텀이 새로운 생활의 맛보기와 같았다면, 여름방학부터 두 번째 텀까지의 기간은 아이의 삶에 '일상'을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 뽀로로를 보아도, 체육 수업을 가도, 수영을 해도, 놀이터에 가도 꼭 일정한 요일 일정한 시간에 했다. 반복되는 패턴들을 지속적으로 인식시켜서 아이가 일상에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한테도 이를 공유하고 아이의 매일을 함께 체크하며 어린이집과 집 양쪽에서 안정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또 새로운 장소에 가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물러가거나 도망가려고 하면 억지로 붙잡고 안에 들어가거나 강요하려 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아이를 안정시킨 후 아이가 스스로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에는 1시간이었던 준비시간이 30분, 20분, 마침내 10분으로 줄어들었다. 아이도 성장하고 나도 성장하는 매일의 연속이었으나 부단한 인내력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차분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아이의 많은 면들을 새로 더 많이 발견하고 아이를 이해하는 눈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다.


예전에는 아이가 도망가거나 소리를 지르면 다른 애들은 안 그러는데 우리 아이는 왜 그럴까, 하고 속상한 마음이 앞섰다. 아이 아빠는 너무 속상해서 사람들 앞에서 아이 엉덩이를 팡팡 때린 적도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또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사실 아이를 배려하며 함께 걷는 매일이 내게는 속박이기도 하다. 만나는 사람도 가는 곳도 제한되어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전혀 쉽지 않다. 하다 못해 밖에서 밥 먹는 것도 어려워 삼시 세끼 집에서 밥을 챙겨 먹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아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애써 아쉬운 마음을 내려보냈다.


두 번째 텀을 마치며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과 1:1 상담을 하는데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웠다.


언어가 다르니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어린이집 교실 내의 기본적인 규칙들도 본인에겐 온통 낯선 것들이었을 테고 이미 친구 그룹을 형성한 아이들 사이에서 같이 노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Nursery class부터 이미 아이들은 어느 정도 영어로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는데 우리 아이는 아예 영어가 불가능했으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아이가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웃으며 선생님을 안고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감사하던지. 자기들끼리 인사하던 아이들이 우리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해주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뭉클하던지. 아직 영어가 트이지 않아 우리 아이가 웅얼거리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이의 반응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반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다.


어느 날은 아이와 같은 반 여자아이 학부모가 다가와 우리 아이가 네 아이에게 준다고 요구르트를 하나 더 챙겨가도 되냐고 물어봤어,라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나는 그 날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집에 오는 길에 남편, 친정, 시댁에 모두 전화해 한참을 자랑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펑펑 울고 말았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어도 아직 트이지 않은 상태에서 영어, 중국어, 인니 3개 국어가 자유자재로 오가는 교실에서 입을 떼고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이. 그래도 선생님이 이제 무슨 말을 하면 어렴풋이나마 무슨 의미인지 인식하는 것 같고, 중국어 선생님한테는 발음이 너무 좋다고 극찬도 받고, 인니어로 숫자도 세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경이롭다. 내가 아이였다면 힘들고 무서워서 숨어버리거나 가기 싫다고 우겼을 텐데, 씩씩하게 적응하는 아이에게 고맙고 대견한 마음만 한가득이다. 늦었지만 다시 배변훈련도 시작해서 이제는 오줌도 변기에 제법 잘 싼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함께 시도하자고 먼저 제안해주신 덕분에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아직 응가를 가리지 못해 매일 응가 묻은 바지와 팬티를 빠는 게 나의 주 업무이지만 그래도 아이가 보여주는 작지만 꾸준한 발걸음에 고맙다.


아이가 자주 보는 사람들과는 눈 맞춤을 시작하고, 언어를 인지하기 시작하고, 단순하게나마 한국어로 말도 하고, 영어와 중국어, 인니어 동요에 맞춰 친구들과 흥겹게 춤추기 시작하고, 어린이집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고, 색종이와 플레이도우를 만지기 시작하고, 혼자서 수저와 포크를 쥐어보고,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는 이 작고 사소한 것들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지 나는 안다. 그래서 매일의 속박에 지치다가도 세상에 조금씩 나아가는 아이의 발걸음에 맞춰 다시 힘을 내 함께 걷는다. 어느 날에는 아이의 또 다른 작은 발걸음에 놀라고 기쁘다가, 어느 날엔 낡아버린 나의 경력과 사회생활이 아쉬워 헛헛하다가, 다시 아이의 작고 따뜻한 손을 잡으며 현재에 충실하려 마음을 다잡다가. 그렇게 매일매일 아이와 함께 걷는다. 너의 시간만큼 나의 시간도 조금씩 성장하길 바라면서. 아가, 너의 작은 발걸음을 언제나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한단다. 언젠가 네가 혼자 뛰어가는 날이 오면 그땐 엄마도 엄마의 발걸음으로 다시 세상에 나아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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