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투영된 집단 심리
지난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일, 런던에 있는 아들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거기 오늘 투표일이라면서요? 누구 찍으셨어요?"
"비밀"
"어느 당?"
"야당"
"여당 과반수 차지 못한다면서요."
"글치. 내가 투표해서. ㅍㅎㅎ!"
나는 서울에서 여당 텃밭이라 불리던 지역에 살고 있다. 새누리당의 공천 갈등 때문에 여당 후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결국 근소한 차이로 야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다음 달이면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고 내년엔 우리도 새 대통령을 맞아야 한다. 정치 유세라기보다 리얼리티 쇼에 가까워 보이는 미국의 경선 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일 년 후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
8년간 소외된 주류의 불만이
트럼프 후보라는 무리수를 초래했다
2015년 6월 미국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모습은 이제껏 보아온 미국 대선 후보들과 확연히 달랐다 -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색으로 여과되지 않은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 냈고 누군가에게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허공에다 대고 삿대질을 반복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법한 이런 언행들을 국민을 상대로 거침없이 행하던 그가 2016년 7월 공화당의 공식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독일의 나치당을 이끌었던 히틀러가 떠오른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미국 언론은 인종차별, 보호무역, 반이민자 정책을 주장하는 트럼프 후보를 neo-fascist로 규정했다.
그러나 KKK단과 미국 나치당과 같은 보수 극단주의 집단들의 지지만으로 트럼프 후보가 공화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의 위치에 오른 건 아닐 것이다. 미국 사회의 보수 지배층을 대변하는 정당의 리더가 되었다는 건 그들의 필요를 트럼프 후보가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부시(Bush) 가문은 미국 주류 사회의 핵심층인 WASP에 속한다. 앵글로 색슨(Anglo-saxon)계의 백인(White)으로 신교도(Protestant)인 이들은 오랫동안 미국 정치와 경제계를 장악한 지도층이며 그들의 조상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개인의 신념과 자유를 규제하는 정부의 권한은 최대한 축소하고 건강과 자기방어는 개인이 알아서 책임지는 미국이란 나라의 독특한 틀을 헌법으로 확립했다.
그러므로 지난 8년간 오바마가 이끈 민주당의 의료보험제도 개혁과 총기규제 입법화는 백인 지배층의 정신적 뿌리와 의료, 무기 사업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것이니 그들의 내면에 축적된 불만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공개석상에서 금기시되어있는 인종차별, 성차별, 이민자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후보가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대변인으로 비췄을지도 모른다. 제삼자인 우리의 눈에 비이성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트럼프 후보의 대선 공약들이 그들에겐 과거에 누리던 기득권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 'Make America Great Again'. 마치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과거의 번영을 빼앗긴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맹신했던 것처럼.
과거의 전략으로
오늘의 번영을 이룰 수 없다
2012년 12월 대선 때 호주에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 한 표를 보태지 못했다. 설마 아니길 바랬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박근혜 후보의 당선. 대선 결과를 보면 경북, 대구 지역의 득표율이 80%를 넘었다.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이 남아있는 보수적인 지방에서 여성 대통령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박근혜 후보는 여자이기 이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한국 경제의 엔진 역할을 했던 1970-80년대 고속성장을 가능케 했던 지도자의 부활을 바라는 50-60대 이상 유권자의 열망이 박근혜 후보를 청와대로 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과거의 성공전략은 현재의 시스템을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는 지난 대선에서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려는 기성세대를 막지 못한 젊은 유권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때 내가 부재자 투표에 참여했더라면 노란 리본의 아픔을 피할 수 있었을까?
2016년 1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총기규제 행정 명령을 발표하면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총기 사고에 희생된 아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Every time I think about those kids,... they get me mad. By the way, it happens on the streets of Chicago every day."
2008년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일등 공신은 민주당 선거전략가들이 아니라 월가의 부도덕성을 묵인한 공화당 정권이었다. 당시 부족한 정치 경력에도 불구하고 오바마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절한 시대정신을 파악하고 미래의 미국이 나아갈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We can believe in CHANGE."
다가오는 5년 동안 우리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이제부터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그래야 우리도 국민의 슬픔을 함께 하고 기득권의 잘못된 성역을 무너뜨리는 지도자를 갖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