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벽꽃의 이야기
이 험난한 탱고판에서 그녀는 오래도 살아남았다. 그 시간 만큼(투자한 시간 만큼) 그녀는 수많은 수업 동기들과 밀롱가에서 만나는 지인이 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어제 본 식구처럼 반갑게 포옹으로, 또 눈짓으로 인사를 나누고는 한다.
음악이 나온다. 서로가 눈짓과 눈짓으로 바쁘게 서로를 탐색하고,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눈다. 무언의 대화 끝 남녀가 짝을 지어 플로어로 나가는 그때, 그녀는 한 곡이 지날 때까지, 두 곡이 시작되도록 말없이 맥주를 마시거나 와인을 홀짝거린다.
한 딴다(Tanda)가 끝났다. 음악이 끝나고 사람들이 물밀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번 곡 너무 좋지 않았어요?” 따위의 말을 사람들이 할 때 그녀는 철저히 그 대화 속에서 유리된다.
무심하게도, 또 잔인하게도 밀롱가의 다음 곡이 흐른다. 그녀는 무언의 대화 대신 벽에서 술을 홀짝이는 밀롱가 안 동기와 지인 중 하나를 잡아 손짓하는 것을 택했다. 남자는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그럴까요? 다음 곡에 나가시죠.’라고 말한다. 사바나의 굶주린 암사자에게 포획된 가젤인 양 그는 10여 분을 그녀에게 할애해야만 한다.
걷고, 돌고, 걷고, 다시 뒤로 걷고, 다시 돌고. 단조로운 동작 속에서 남자의, 여자의 냉혹한 순간이 흐른다.
그에게는, 아니 가련한 사바나의 가젤에게는 어느 악단의 곡인지, 지금 추고 있는 춤이 밀롱가인지 발스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의무적이고 소모적인 섹스처럼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 뿐이었다. 잘 하면 또 신청할 테니까. 최대한 재미 없게.
이런 여자를 우리는 ‘벽꽃’이라 부른다.
#2. 벽곰팡이의 이야기
음악 소리를 따라 내려간 밀롱가. 그는 만 원을 내고 ‘기필코 오늘은 만 원이 아깝지 않게 춤을 춰 보자’ 다짐한다. 댄스화로 갈아신은 뒤 자리에 앉고 정확히 15분 후 그는 생각한다.
‘아, 만 원어치 음악을 듣고 가겠구나’
밀롱가는 겨울에도 난방을 세게 하지 않는다. 춤을 추고 나면 몸이 더워지기에, 서서 춤을 추는 이들 기준으로 온도를 맞추게 된다. 그의 몸이 점점 싸늘해진다.
그는 예쁘게 다리를 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녀들의 시각의 사각(死角)에 있다. 보여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흡사 사바나의 생태계 맨 아랫자리를 담당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마른 풀 같은 존재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의 자괴감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뚫어지게 쳐다보면 한 번쯤 눈이 마주칠 법도 한데, 왜 그녀들의 눈에 나는 투명인간인가?
지금 플로어에서 나 말고 다른 연놈들이 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돌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아, 수업을 같이 듣던 동기가 왔다. 한 시간 가까이 자리에 앉아만 있는 내가 불쌍한지 그녀가 적선처럼 춤 신청을 받는다.
음악이 나오고 긴장이 시작된다. ‘이거라도 잘 춰야 할 텐데…’
실수 연발이다. 앞뒤의 이 XX들은 왜 이렇게 동작을 크게 펼치며, 음악은 왜 이리도 빠른지. 내가 보내는 애타는 동작의 신호를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50%는 무시한다.
큰일이다. 무리하다 그녀의 발을 밟았다. 그녀는 ‘괜찮아’라며 귓가에 속삭이지만, 말끝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난다. 네 곡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는 시간이 지났다.
그 뒤 그는 밀롱가가 끝날 때까지 밀롱가 구석에서 혼자 가공의 땅게라와 스텝을 밟는다. 마음만은 마에스트로처럼.
외면받는 이유
앞의 두 사례는 실제로 밀롱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다. 나도 벽꽃이었고 너도 벽곰팡이였다.
벽꽃이 되는 이유는 뭘까. 성격이 나빠서? 나는 그녀보다 성격이 나쁜, 심지어 반사회적이라는 단어로 표현이 가능한 ‘썅년’들도 몇 알고 있다. 그녀보다 뚱뚱한 여자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벽꽃의 탄생은 근본적으론 슬프게도 외모에 일차적으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근 20년간 이 판에서 살아남은 L의 명언을 되새긴다.
“다른 건 제쳐놓고 66 사이즈가 넘는 건 좀 쉽지 않다”
그래서 밀롱가에 오는 여자들은 예쁜 원피스와 귀걸이, 화장으로 본인을 무장한다. 남자들도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외모에 신경을 쓴다.
밀롱가는 사바나 같은 곳이다. 아프리카 어딘가의 야생국립공원의 우아한 버전이랄까? 동물들 사이에 먹이사슬이 존재하듯, 이곳에도 먹이사슬이 있다. 최상위 포식자에게 밀롱가는 골라잡는 배스킨라빈스이고, 아래 피지배층에게 이곳은 사바나보다 더 험난한 곳이다.
인간이라는 것들은 모두 예쁘고 잘 추는 것들을 탐하기에, 수요와 공급의 경쟁에서 밀려나면 가차 없이 벽꽃이요 벽곰팡이가 되어 버린다.
물론 우리는 성별을 떠나 사람이 평등해야 하는 것을 안다. 밀롱가에 있는 이들은 모두 탱고판 밖에서 서로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20대 때 봤듯 클럽에서 춤을 춰도 예쁜 언니와 잘생긴 형은 쌍쌍이 짝을 이뤄 어딘가로 떠나지만, 나머지는 새벽 4시에 24시간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할 운명이다.
실력보다 외모가 탱고판에서 살아남기 좋은 조건이라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예쁜(잘생긴) 초급은 누군가 독수리같이 채간다. 그 뒤 갖은 방법으로 밀롱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실력으로 만들어 놓는다. 솔직히 부정할 수 없을걸?
물론 외면의 이유가 외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는 땀이나 냄새다. 땀으로 셔츠를 적시거나, 담배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사람은 돈을 받아도 안고 싶지 않다. 향수로 샤워를 하고 오는 이들도 ‘가까이하기에는 좀 먼 당신’이다.
세 번째는 주로 벽곰팡이에게 적용된다. 춤 실력이나 코드가 안 맞을 때. 서로가 청도 소싸움 같은 춤을 출 이유는 없기에,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실력을 닦아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고는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즐기고 나면 또 새로운 즐거움이 탱고 안에서 펼쳐진다. 스스로를 가꾸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지지리도 먹기 싫었던 샐러드를 먹었다. 저녁에는 밀롱가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