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게임 '매드니스티어 라이브' 개발기
게임 개발 외적인 활동을 평소에 활발하게 하지 않다 보니, 게임을 공개해보고 싶은데 어디에 내놓고 반응을 얻어야 할지 난감했다. 개발 중인 버전이라 일반 게이머 커뮤니티는 시기상조라 생각했고, 먼저 개발자들의 평가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페이스북 커뮤니티인 인디게임 개발자 모임(https://www.facebook.com/groups/indiera/)에 글을 올렸다.
자기애는 충만하지만 어디 나서서 나 이런 거 하고 있으니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는 말은 죽어도 못하는 성격에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이 게임 만드느라 오랜 세월이 걸려 스토리가 참 많다는 신세한탄을 일단 해야 했고, 이어서 중요한 게임 소개도 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저곳에서 오늘도 열심히 게임을 만드는 인디게임인들에게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구구절절해 보이지 않는 쿨 내 가득함이 느껴져야 한다는 정서적 제한사항까지 더해서!
그래서 10월의 어느 주말 저녁 글을 올렸다.
얼마나 호응이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랜 시간 혼자 만들고 있던 어떤 것을 외부에 내놓으면서 얻는 평가나 반응이라는 게 참 중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흥분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올림으로 인해 몇몇 퍼블리싱 회사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고백하건대 그 시절까지만 해도 퍼블리셔라는 회사에 대해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오랜 기간 작업한 내 파이를 그냥 빼았긴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절대 그렇지 않다. 파이를 뺏기는 게 아니라 키워서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큰 수업을 받고서야 배웠다. 건방진 싹은 이렇게 큰 매를 맞아봐야 잘리는 법이다.)
온라인 게임을 만들면서 퍼블리셔들과 작업한 경험이 있긴했지만, 규모가 작은 모바일 인디게임과는 어떻게 협업하는지 잘 몰랐던 때였다. 그래서 오는 제안에 대해서 다 만나보았는데, 딱히 퍼블리싱에 대해 간절하지 않던 그 시절의 내가 이 기회를 귀하게 여겼을 리 없으니 그들이 쥐고 있는 카드만 확인하고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만났던 형님 누나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쓰레깁니다.)
또 다른 이유로 퍼블리셔와 작업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추가적인 시간이 발생하게 되니, 그 늘어나는 시간의 충격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다. 그냥 빨리 출시하고 결과를 보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중에 이 회고록의 마무리에 우리가 실패했던 이유에 관해서 정리를 할 예정인데, 이 시기의 퍼블리싱 미팅으로 인한 사고의 전환도 우리가 실패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임을 만드는 여러 공정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이 바로 개발 막판에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폴리싱 단계다. 시간에 그렇게 쫓기면서도 내가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않았던 일정이 바로 이 폴리싱이다. 최소 한 달은 무조건 확보하고 추가되는 작업 없이 오직 폴리싱만 한다라고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표대로 진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12월 출시를 목표로 열심히 마감질을 하고 있던 즈음, 2016년 인디 게임 제작 경진대회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 서류를 냈다. 이전에 BIC Festival을 비롯해 원스타, 게임 창조 오디션 등 수없이 많은 낙방 경험을 통해 우리 게임의 경쟁력에 대해서는 이미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차피 떨어질 대회 충격이라도 완화하자는 차원에서, 앞선 대회들은 전용 이미지와 영상도 일일이 만들고 최대한 힘을 실어서 준비했던 것에 비해 제출 작업을 최소화해서 진행했다. 어느 정도로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 지원이었냐 하니 같이 일하는 강재봉에게도 지원 사실을 알리지 않을 정도였다. (몰래 지원해서 떨어지고 나면 혼자 슬퍼하고 치워버리면 된다는 사려 깊은 마음이었던 것… 이라고 미화해서 쓰려고 보니 강재봉은 그 당시 '앉아서' 너무 열심히 일 하다가 엉덩이가 아파하는 병을 얻어 병원에 누워있었다는 기억이 돌아왔다.)
그리고 지원 사실에 대해 잊고 살았다. 폴리싱이라는 제작 스텝은 심리적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작업이기에 다른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저녁 TV를 보며 낄낄거리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인디게임 제작 경진대회에서 수상하게 되셨으니, 어떤 폼을 채워서 급히 보내달라고 했다. 드라마를 아는 이 담당자는 어떤 상을 받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장려상 정도 받았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싶어 기뻐하고 있었다.
강재봉과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낄낄거리다가, 얼마 후 사이트에 선정작 공지가 올라갔는지 강재봉이 수상 소식을 전해왔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 게임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당사자로서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나도 혼자서 방구석에서 주먹 쥐고 만세 한번 부른 뒤 눈물 닦고 나와서 태연한 척 부인에게 한마디 건넸다가 죽도록 맞을 뻔했다.
“에헴! 거 원래 사람이 살면서 장관상 정도는 다 한 번씩 받으면서 크는 거잖아?”
무조건 죽으라는 법 없이 그렇게 살 길이 조금은 열리는가 싶었다. 열심히 한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게임을 알릴 기회를 얻었고, 남은 건 우리만 잘하면 된다고 다독거리며, 출시를 위해 계속해서 달려갔다. 괴롭지만 너무 즐거운 이 생활을 좀 더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은 미래를 그렸다.
수상에 대한 감동을 간직한 채 마지막 담금질을 하던 12월의 어느 날, 언론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이라는 것을 받았다. 인디 게임 개발자의 삶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으니 시간을 내달라는 것이었다. 도리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않나 싶어 무조건 하게 해달라고 해서 인터뷰라는 것을 해봤다. 인터뷰는 한 시간 가량 진행되었었는데, 수다쟁이인 나로선 아직 할 말이 한가득 남았는데 끝나버렸다는 느낌이었다. 게임에 관한 어떤 주제라도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즐거운 일이다. 인터뷰 자체로 막혀있던 정서도 많이 환기되었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대도 들었다.
이 인터뷰에서 특별했던 경험은 마지막에 사진을 찍을 때였다. 보통 인터뷰 사진은 개발자 공식 포즈인 회사 로고 앞에서 팔짱을 낀다던지, 회의실 의자에 앉아서 손을 이렇게 올리고선 무언가 말하고 있는 사진을 떠올리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는 인터뷰 막판에 따로 오신 사진 기자님이 회사의 구석진 스튜디오 같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더니 온갖 신나 하는 포즈를 다 시키셨던 기억이 난다. 사진 찍을 때가 정말 어렵고 힘들었었다.
인터뷰 링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50&aid=0000042909
출시 막판에 상상도 못 하였던 여러 행운을 누렸고, 그 와중에도 페이스를 잃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서 출시를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2015년 11월에 시작된 험난한 일정의 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지점에 서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길게 걸렸을지언정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이었다. 고민하고 만들어보고, 맘에 안 들면 부수고 새로 만들면서 일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랐다. 우리 손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될 참이었다.
2017년 1월 14일 출시
게임은 우리 손을 떠났고, 앞으로 우리는 게임을 만들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영역의 일을 해야 했다. 게임을 알리는 일, 나아가 그것이 효과적으로 잘 되도록 하는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5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