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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나 (MALE'NA)

그녀는 이미 전설이다

영화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판타지다. 영화가 아무리 골치 아픈 이야기를 늘어놓을 지언정 현실과 동떨어진 은밀한 욕구를 해소시키기 위한 적절한 도구로서 이만한 예술도 흔치 않을 것이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애든 어른이든,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섹시한 배우’에 대한 판타지를 갖는다. 마릴린 먼로를 떠올려본다. 두차례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유형무형의 대공황기를 겪었던 시기가 지나고 잠시 들뜬 시대가 있었다. 소비와 향락의 바람이 불었던 시기, 그래서 공산주의를 말하고 민중을 말하면 아작을 내던 서늘한 매카시즘의 시기, 불어오는 바람에 흰 치맛자락 휘날리던 그 여인은 허세과 자유를 욕망하던 시대의 판타지 대리인이었고, 동시대 고독한 제임스 딘의 표정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삐딱해진, 그러나 섹시한 엄친아의 표상이었다.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은 시대를 대변한다.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며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영웅들은 지금 시대에도 그 계보를 계속 진행중이다. 21세기를 사는 당신에게 스크린 속 최고의 섹시 아이콘은 누구인가? 내게 떠오른 여배우, 단 하나 뿐이다.


이 영화는 여배우의 노출을 뻔뻔하게 보여준다는 면에서 전형적 유럽영화다. 그러나 유럽영화는 종종 야하지 않다. 스토리 전개상의 노출을 과장없이 현실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여배우는 좀 많이 섹시하다. 유럽감독 치곤 이 여배우의 소문난 육체를 현실과 판타지 속에 교차시키며 참 잘도 녹여냈다. 그녀의 섹시함이 하도 대단해서 이 영화는 ‘여배우의 벗은 몸 하나로 유명해진 영화’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 오해는 그 여배우의 몸 하나가 영화로서의 진짜 수준을 압도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도대체 얼마나 섹시하길래 그런 오해가 불러일으키는 걸까?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배우, 유럽에서 나오기 쉽지 않은 섹시 이미지 여배우, 천박하지 않으며 기품이 있음에도 서민의 그늘빛까지 풍기는 여배우, 바로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ci)’다.

그녀의 영화인생은 {라 빠르망} 과 {도베르만} 이후 이번에 소개할 영화로 정점을 찍었으며 그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전세계에 알렸다. 올 겨울 국내개봉하는 24번째 007시리즈에 그녀가 나온다던데, 개인적으로 007시리즈를 그닥 좋아하지도 않지만 아무리 그녀가 나온다 한들 챙겨 볼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영화에서 품게 됐던 그녀에 대한 ‘판타지’를 깨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매트릭스2}에 나와서 들러리 서는 역할을 했던 것마저 무지 별로였다. 순전히 개인적 바램이지만 제발 헐리우드에서 더이상 어슬렁거리지 말고 이제 그만 이탈리아 영화판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혹시 벨루치의 실제 경험담을 기초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었는데 아무리 웹서핑을 해봐도 그런 근거는 찾지 못했다. 그러다 다행히 그녀가 배우로서 서서히 이름을 알릴 무렵 남겼던 흥미로운 인터뷰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전 지방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그 마을에선 아름다운 여자가 한명 있으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었죠. 정말 힘들었어요. 남자들은 다들 ‘난 걔랑 잔 적 있어’라고 으스대며 말하곤 했죠. 남자들한텐 성적 대상이었고, 여자들한텐 창녀였던 거죠”

예언과 같았던 이 인터뷰 내용은 이후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스토리가 되어 모니카가 아닌 {말레나}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감독이 의도했든 안했든 영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전적 스토리가 된 셈이다. 작은 마을에서의 아름다운 여인이 어떻게 관심을 받고 어떻게 질투의 대상이 되는지, 또 집단이 광기를 품게 되면 어떻게까지 되는지 이 영화 한편이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 남편은 전쟁터로 떠나고 여인은 홀로 남겨진다. 평소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던 온 마을 남자들이 슬슬 그녀에게 들이대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문마저 퍼진다. 물고가 터졌다. 수컷들의 본격 레이스, 어처구니 없고 우스꽝스러운 각종 헤프닝이 빵빵 터진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을여자들의 질투는 점점 정점을 향해 치달린다. 그 와중에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마저 폭격으로 죽는다. 경제적 지원처가 끊긴 그녀는 할 수 없이 독일군에게 몸을 파는 일을 시작하지만 독일마저 곧 패전국가가 된다. 의지할 곳 없이 나약해진 그녀, 그동안 질투와 분노가 쌓일 데로 쌓였던 마을 여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다. 그녀는 그렇게 마을로부터 쫒겨난다.

영화는 그렇게 끝맺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적 요소는 그정도로도 부족함이 없었고 풀어가는 과정도 충분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영화가 끝나기 직전, 의외의 반전이 나온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이제 마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2차 세계대전 무렵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파시즘이라는 이념으로 대변되는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집단주의와 광기를 그대로 투영시켰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의 라디오연설에 귀기울이며 때로는 박수와 함성으로 파시스트를 옹호하는 마을 사람들, 잠시후 마을 외곽에서 하얀 원피스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원래는 타지 사람인데 이 마을 남자와 결혼해서 이주해 온)이 대단한 임팩트와 아우라를 동반하며 마을로 등장한다. 마을 주민들은 파시스트의 상징인 검정 계열의 어둡고 칙칙한 복장을 주로 입었고 주인공이 입은 의상은 하얀 드레스다. 이것도 일종의 대립구조의 암시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13세 소년의 전지적 관찰자 시점(아니, 그냥 스토커 시점)으로 진행된다. 말레나를 보자마자 성기가 발기되고 짝사랑에 빠지고,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연상의 유부녀에 대한 스토킹, 그리고 그 스토킹 과정의 나레이션, 그렇게 장면들이 지나간다. 이 영화에는 두가지 부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파시즘에 세뇌된 평범한 다수와 그 반대로 세뇌되지 않은 비범한 소수가 그들이다. 비범한 소수 가운데는 스토킹 소년의 아버지도 포함된다. 그는 파시스트 동원훈련도 불참할 정도로 무솔리니를 증오하는 의외의 반파시스트 인물이다. 마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파시스트 주민들과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소수의 주인공들, 영화는 이 대립구조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스토리는 거창하게 꽈배기를 만들어놓고 정작 결말은 예측 가능한 권선징악이었다면 너무 식상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데 냉정한 윤리재판이 아닌 감성적 휴머니티를 향해 달린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사람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다(과거 영화사를 주도했던 이탈리아의 신사실주의 영화들이 하던 일도 결국 사람에 관한 고찰이었다). 성폭행, 물리적 집단폭력에 이어 극단적 추방까지, 악행의 끝을 행하던 마을사람들도 결국은 이 주인공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그 집단광기의 주체자이면서 가해자였는데 그 피해자의 컴백을 맞이해야 하는 마음, 그리고 피해자로서 그 모진 자존심을 다 구긴 채 자신의 처형장소로 되돌아 와야하는 그 마음, 양쪽 모두에게 교차했을 그 만감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건 건조한 이성의 논리로만 설명될 수 없는 문제다. 그 고장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서민적이고 민중적인 정서가 없다면 불가능한 장면일 수 있다.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입장에 따라 조금은 억지스러울 수 있는 이 광경은 그런데 영화속에서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배경이 이탈리아이기 때문이며 정황논리가 정확히 이탈리아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메세지, 혹은 파시즘이라는 위험한 이념을 맹신하던 시대의 그들도 독기만 품고 살던 냉철한 존재들은 아니었다는 메세지, 현재를 사는 우리들도 큰 맥락에선 별다를 거 없다는 메세지, 이탈리아 예술과 철학은 자주 그런 식이다. 뜬구름 잡는 추상적 개념이 아닌, 현실을 기반한 강력한 돌직구성 표현, 그게 이탈리아 예술의 매력이다(르네상스로부터 인상주의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이탈리아의 예술은 그저 보이는대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의 다각적 패턴들이었다. 그러나 인상주의 이후 아르누보를 거쳐 피카소의 파격, 그리고 현대까지 계속되는 비사실주의 예술의 주무대가 어디인가를 보라, 명백히 이탈리아와 동떨어져있다. 이게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사실 이 영화를 만든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는 특히나 인간적이다. 감독의 이름이 낯설 지언정 그가 남긴 걸작 이 남긴 그 대단했던 휴머니티의 추억은 누구나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그의 20여편이 넘는 영화 중 {말레나}를 전후로 만든 영화 네편 ; {Baarìa}, {La sconosciuta}, {La leggenda del pianista sull’oceano}, {L’uomo delle stelle} 를 본 경험이 있는데 {시네마 천국}의 탄생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느꼈을 정도로 ‘동화같은 감성의 소유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이 영화는 모니카 벨루치의 아름다움과 마을사람들의 집단광기와 꼬마 스토커의 성장 스토리를 한데 엮었다. 물론 감독과 이탈리아가 주는 특유의 휴머니티가 진한 육수로 깔려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의 걸죽하고 해학적인 구어체는 엄청 웃기고 시종일관 이어지는 황색톤 스크린 영상은 시칠리아의 토양색을 일부러 강조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상 깊다. 또 말레나와 스토킹 소년의 고독한 마음을 후벼파는 음악은 죄다 영화음악의 거장인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품이다. 두말하면 무엇하랴, 팔을 움직여 오케스트라의 현악파트를 지휘하고 싶을 정도로 음악 역시 끝내주게 서정적이다.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다. 바람끼, 토속적, 외향적, 연극적, 가족적… 시칠리아 태생의 감독이 이런 다양한 이미지들을 시칠리아와 파시즘을 배경으로 두시간의 화면에 아주 매력있게 담았다. 그가 어떻게 {시네마 천국}이라는 걸작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기 바란다. 더불어 섹시한 여배우의 섹시한 노출로 유명해진 영화라는 오해가 풀리길 바란다. 그런 오해로 이미지가 낙인찍히기엔 여러모로 좀 아까운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의 영화들은 냉철한 이성이 아닌 적당히 풀어제친 인간의 본능과 판타지를 자주 건드려 깨운다. 벨루치와 말레나, 감히 예상컨데 그녀들은 이탈리아의 판타지 대리인의 역할로서 충분히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모리코네, 그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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