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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과잉시대

가짜 인문학이 너무 많다

인문학 강의가 유행이다. 유튜브만 뒤져도 수많은 영상들이 보인다. 그 많은 강의중에 제대로 된 강의는 무엇이며 얼마나 될까? 제대로 된 강의만 국한시켜 말하자면 요점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인간답게 사는 길…’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게 뭐그리 어려운 일이냐 반문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근데 왜 그 간단한 일을 두고 수천년동안 지구촌 현자들이 고민을 해왔던 걸까?

동물은 속이 편하다. 삶을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적 삶이란 고민없이 본능을 따라 살다가 죽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고 넓고 따뜻한 집을 추구하고 자손의 번식을 추구하고… 그렇게 살다 죽는 것이다. 타인들을 보면서 내 의식주를 감사히 여긴다거나 언행을 반성하거나 홀로의 고독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물은 없다. 본능을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동물적 본능 말고, 눈에 안보이는 무형의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추구하며 사는 일, 그게 인문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최고의 선은 대중들의 그 흔한 표현인 ‘행복’이 될 수 없다. 대중들의 행복이란 결국 본능을 추구하는 일에 거의 대부분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아실현을 표방한 ‘성공실현’ 강의들을 보라.

“나도 어려운 고비가 있었고
이렇게 넘겨 성공했으니
당신들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힘내라”

는 식의 강연들, 본능적(동물적) 욕망을 달성하는 방법을 말하는 이런 강의는 인문학 강의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강의가 더 무섭다. 인문학의 진정성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실패를 딛고 꿈을 이루었다는 것은 좋은데 왜 그 꿈이란 것이 하나같이 돈 잘 벌고 명예를 얻는 일 뿐인가?

"돈되고 명예가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자아를 실천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래서 행복하다”

는 말을 듣는 건 왜 그리 어렵단 말인가? 제대로 된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 말초적 ‘힐링’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고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 쾌락의 기준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기준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유행하는 강의를 통해 ‘힐링’되는 쾌감을 얻으려 한다. 하도 그러하니 누군가 이런 기막힌 표현을 뱉었다.

"성공한 사람의 스토리는
성공한 후에 포장되어
평범한 사람들을 망친다"...

'자기계발'이나 '자기관리'에 관련된 서적들은 인문학 분야가 아닌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지향성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타인에게 어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난 유감이지만 국내기업들이 인문학을 언급하면서 잡스나 빌게이츠나 앙네피엘을 예로 드는 것에 동의가 안된다. 잡스나 빌게이츠가 남겨놓은 '수익 이후의 분배'에 관한 정신이 무엇인지에 관해선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지향성은 쟁취가 아닌 내려놓음이며, 나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혹은 타인의 이익이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수천년을 고민해 왔던 것이다. 왜냐,

동물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염세적인 쇼팬하우어는 자아실현의 가치를 놓치고 있고 생즉고(生卽苦)를 말하는 불교는 다소 기운을 소진케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논한다는 점에선 맥을 같이 한다.


‘인간다운 삶 ≠ 쾌락’ 이라는 부등식, 그 부등식을 전제로 하여 풀어놓는 수많은 이야기, 그게 진짜 인문학 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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