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해 Apr 21. 2020

추크슈피체에선 세 가지를 챙겨라

독일




여기는 독일 알프스. 그중에서 추크슈피체 (Zugspitze). 더구나 9월이다. 독일어 zug는 '갑작스러운' spitze는 '눈사태'란 뜻이다. 나는 독일에서 가장 높고 가장 위험하다는 추크슈피체 정상에 올랐다.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불리는 이곳, 2962m 봉우리엔 가을 햇볕, 서늘한 바람, 느닷없이 날아오르는 까마귀 가 있다.


황금 십자가가 박힌 바위산 정상은 빙하가 녹아 속살을 다 드러냈다. 처연한 바윗살은 고집  등반가의 종아리 근육을 닮아 보는 이의 다리 힘줄을 괜히 당겼다 놓는다. 나는 기펠알름(Gipfelalm)에서 공짜 맥주를 받아 야외 덱크에 나와 앉았다. 바람이 가슴을 베고 저만치 달아났다. 하늘의 키를 가늠하려는 듯 비조(飛鳥)가 날아올랐다. 꽁무니를 눈으로 다가 '이곳은 새들이 그리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세상 같아' 라는 생각을 했다.



황금 십자가는 산을 오르다가 목숨을 잃은 순례자와 산악인을 위해 세웠다. '독일에서 가장 높은 비어가든'이라 쓴 표지판


아침 나절 나는 가르미슈(Garmish)역 공터에 차를 세웠다. 거기서 산악 열차가 출발한다. 톱니바퀴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산을 오르다 긴 터널을 벗어나면 9부 능선, '추크수피츠 플라트'에 도착한다. 플라트(platt)는 '평평하다'란 뜻으로 기차가 서는 종점이다. 밖은 사람이 돌아다닐 수 있는 운동장만 한 크기의 언덕이 있다. '탑 오브 저먼'(Top of German)이라 써 붙인 벌룬 아치를 반환점 삼아 헐레벌떡 한 바퀴 돌아왔다. 여기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5분만 더 올라가면 추크슈피체 정상에 닿는다.


 

추크슈피체에서 아이브제 호수로 내려오는 케이블카, 가르미슈에서 추크수피츠 플라트까지 연결하는 톱니바퀴 기차.


정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나눠 가진다. 독일 쪽이 조금 더 높아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린다. 사람들은 나처럼 데크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암벽 길을 따라 십자가가 꽂힌 바위산까지 오르기도 한다. 이만만 해도 '좋으다' 싶은데 나는 성에 안 찼다. 눈앞의 풍경 말고 다른 것이 보고 싶었다. 나는 여행이 새로운 장소나 볼거리 넘 인식이 확장하는 경험이었으면 한다. 높은 산을 올랐다고 시야가 풍성해지진 않는다. 중요한 건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 (attitude)라는 걸 알지 않던가. 아까부터 한 무리의 까마귀가 하늘에서 윤무(輪舞)를 추었다.



지상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추크슈피체에 오른 사람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교회 '마리아의 시련 예배당'(Maria Heimsuchung)


추크슈피체엔 특이하게도 까마귀가 산다. 산악인들은 이 종족을 '알스의 기침' (Alpine Chough 알파인 쵸프)이라고 부른다. 새 울음이 기침하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학명은 '노란부리 까마귀'. 노란부리 까마귀는 어떤 새보다 높은 곳에 둥지를 튼다. 이름처럼 부리는 노랗고 다리는 빨가며 몸통은 검은색이다. 공교롭게도 독일 국기를 빼닮았다. 그 때문인지 독일 구역에선 꽤 으스댄다. 내 발등을 쪼며 소시지를 달라고 조르더니 자기들끼리 난간에 올라 이야기를 나눈다.


독일 동화작가 비투스 드뢰셔는 노란부리 까마귀의 말을 연구하였다. "그리잉그 피코"는 "먹을 것을 줘", "치야크 와후"는 "그만 가버려"이고 "치야크 치야크 호크 호크 와후"는 "위험해. 살고 싶으면 도망쳐" 라고 한다. 또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이는데 수다스럽던 까마귀가 하나 둘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새는 고체상태의 바람'이라고 쓴 문장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새는 고체고, 그 어느 속도 이상 빨리 날으면 다시 원래의 바람으로 돌아가는구나 라고.



새의 그림자는 새보다 위대하다. 하늘로 새를 날려보낼 뿐 자신은 결코 날지 않는다. 이곳 출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교향곡(An alpine symphony)을 보는 듯하다.


추크슈피체의 무릎께에 아이브제가 있다. 아이브제(Eibsee)는 추크슈피체의 만년설이 녹아 만든 호수다. 고도 973m. 아이브제란 이름은 호수 주변 붉은 빛이 도는 나무, 아이베(Eibe)에서 따왔다. 추크슈피체 정상에서 아이브제로 바로 내려가는 케이블카(Eibsee Seilbahn)가 있다. 그게 지름길이다. 올라갈 땐 산악열차를 탄 채 호수를 지나친다. 내려올 땐 아이브제까지 케이블카로 와서 호수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가르미슈로 가면 된다.


정상에서 아이브제까지 케이블카 10분이면 내려온다. 사람들은 허공에서 아이브제를 내려다보며 너도나도 '더바'를 외친다. 더바(Wunderbar)는 영어로 '원더풀'이다.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 둘레는 7km. 2시간이면 한 바퀴 둘러보지만 다시 기차를 타야 하기에 망설이다 만다. 호숫가 모래사장이나 바위 주변엔 어디나 있기 마련인 용감한 사람들이 수영을 다. 물이 맑고 숲이 청량해서 잠깐 거닐기만 해도 흡족해진다. 나는 입구 쪽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이브제는 수심이 평균 12m로 그리 깊지 않다. 물이 맑아 '리틀 캐나다'로 불린다. 이곳까지는 가르미슈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다. 여기서부턴 케이블카나 산악 열차를 타야 한다.


독일 가을 장터에서 먹어야 할 게 있다면 고등어구이다. 딩켈스빌의 중세 축제 한 귀퉁이에서 처음 발견했는데 아이브제 호수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호숫가 유일한 레스토랑, '아이브제 파빌리언'(Eibsee Pavillion)에서였다.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줄을 서 맥주와 소시지, 학센을 사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마당 한복판 숯불 위에서 팔뚝만 한 고등어가 구워지고 있었다. 꼬치에 거꾸로 꽂힌 채 기름을 뚝뚝 흘리며 말이다. 며느리에게도 주지 않는다는 가을 고등어. 노르웨이 산 대서양 고등어다.


독일오스트리아는 생선을 통째로 내놓는 슈테케를피슈(Steckerlfisch) 요리가 있다. 고등어는 야외 바비큐 같은 데서 바로 구워서 팔기에 요리 축에 넣지 않고 그냥 고등어라고 부른다. 벽에 붙은 메뉴에 '마크레일러'(Makrele)라고 쓴 게 있으면 그것이다. 영어 맥커럴 (mackerel)과 철자가 비슷해 단박에 알 수 있다.  마리에 6유로. 접시에 종이를 깔고 레몬 조각과 고등어 한 마리를 얹어 준다. 맥주 한 모금에 아이브제 풍경 한 번, 들숨 한 번에 잘 익은 고등어 갈비 한 점을 뜯었다. 사이 막 시간이 가까워졌다.



왼쪽은 추크슈피체 정상 야외 데크에서 파는 소시지. 오른쪽은 아이브제 호숫가에서 파는 소금 간을 한 고등어구이


느지막이 가르미슈로 돌아왔다. 야산에 풀어놓았던 소들이 목동도 없이 귀가하고 있었다. 나는 '가스트호프 프라운도르퍼' (Gasthof Fraundorfe)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앞에 차를 세웠다. 프라운도르퍼 씨네 게스트하우스란 뜻이다. 저녁이면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식당이라 확실하게 테이블을 잡아놓고 싶어서였다. 이 동네는 아직 전화나 앱(App)보다 눈 마주치고 말로 하는 예약이 더 잘 통한다.


이곳 가르미슈(Garmisch)와 파르텐키르헨(Partenkirchen)은 원래 따로따로였다. 그런데 히틀러가 1936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두 도시를 하나로 합쳐버렸다. 그때부터 한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아우라는 영 다르다. 파르텐키르헨은 차만 쌩쌩 다니는 신도시다. 딱히 할 말이 없다. 가르미슈는 로마 시대에 베네치아와 아우구스브르크를 연결하는 교역로였다. 당시 일화들이 마을 건물 외벽에 벽화로 남아있다. 색깔이 하도 뚜렷하길래 최근에 손 본 거냐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회벽이 다 마르기 전에 칠을 해서 '벽위'(on the wall)가 아니라 '벽안'(in the wall)에 그린  생생한 프레스코화가 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이에른 전통 복장을 한 아코디언 연주자, 가르미슈 마을에 있는 가스트호프 프라운도르퍼 식당 외관 .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텐은 평창과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를 놓고 겨뤘다.


늦어도 6시 반에는 식당에 도착해야 한다. 매일 저녁 7시에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스트호프 프라운도르퍼는 1929년에 문을 열었다. 건물 외벽에는 1949년 하인리히 비켈(Heinrich Biickel)이 그린 당시 결혼식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인 이곳은 마을 토박이 프라운도르퍼 가족이 6대째 꾸려가고 있다. 여든이 넘은 주인 할머니 '바바라' (Barbara)는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누구보다 열심히 시중을 들고 계신다. 마을 남자들이 소처럼 어기적거리며 들어왔다. 그들은 당연한 듯 '슈탐티쉬' (stammtisch)라는 팻말이 놓인 식당 한복판 긴 테이블을 차지했다. 슈탐티쉬는 '단골'이란 뜻인데 동네 남정네들 계중(契中)이라 했다. 바이에른 아코디언이 알프스 민요를 연주하여 흥을 돋웠다.


7시가 가까워지자 앳된 소년 2명이 티롤 지방 전통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둘은 3/4박자 렌틀러(ländler)풍 곡조에 맞춰 '슈플라틀러'(Schuhplattler)를 추기 시작했다. 렌틀러란 남부 독일에서 유행했던 느린 춤곡이다. 또 슈플라틀러는 '구두치기'라는 뜻이다. 알프스 산간 마을에서 전해오는 '무례한 구애의 춤'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은 무려 신석기 시대에 이른다. 젊은 남자들이 손으로 허벅지와 발, 심지어 신발 밑창까지 두드려대는데 동작이 150가지나 된다고 한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여기저기서 '분더바' 소리가 터졌다. 테이블마다 바이스 비어 (Weissbier)의 잔이 무서운 속도로 비워졌다. 얼마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든이 넘은 식당 주인 바바라 프라운도르퍼(Barbara Fraundorfe) 할머니, 슈플라틀러를 추는 두 소년


 추크슈피체를 여행할 땐 세 가지를 챙겨 봐야 한다. 까마귀의 윤무, 아이브제의 고등어, 슈플라틀러가 바로 그들이다. 높은 산을 오르는 여행에서 풍경 말고 다른 걸 찾는 당신에게 들려주고픈 귀엣말이다. 그런데 당신이 아직 추크슈피체를 갈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다면, 독일까지 가서 '웬 등산'하며 고개를 갸웃한다면, 그런 당신이 어느 젊은 새벽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멈춰섰다' 라고 시작하는 이웃나라 소설가의 문장에 밑줄을 치던 바로 그 사람이라면, 한 편의 글을 당신도 읽어보는 건 어떨까. 내가 추크슈피체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기차를 내려서 굴 속을 나왔을 때 내가 받았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주위의 온 세계가 다만 흰 빛이었고, 알프스의 봉우리 끝이 병풍처럼 전개되어 있었으며 멀리 우리의 발밑에 구름이 흘렀다. 나는 영하 15도가 주는 추위도 잊고 이 장대한 설경이 주는 감동에 넋을 잃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한니발, 나폴레옹 같은 옛 영웅들이 대군을 이끌고 이곳을 지나서 넘어갔을 옛날을 눈 앞에 그려보고 있었다.  이곳을 다녀간 후 한동안은 알프스의 눈부신 만년설과 시린 백석과 지나치게 큰 달과 기나긴 노을과 흰 카오스가 나의 뇌를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다시 가보고 싶은 향수에 가슴이 불탔다.'  전혜린, 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osted by chi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 속으로 떠난 기차를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