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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Oct 02. 2019

알자스의 '현기증 3총사'

프랑스




프랑스의 왼쪽 어깨에 알자스있다. 여기는 포도밭과 중세 마을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중에서 리보빌레(Ribeauville), 리크위르(Riquewihr), 에귀샤임(Eguisheim)을 묶어 '현기증 3총사'라고 부른다. 아찔할 만큼 예기 때문이. 나는 초가을 내내 프랑스와 독일 국경을 넘나들었다. 스트라스부르나 콜마르 같은 알려진 도시는 패키지 관광객에게 양보하고, 알자스의 포도나무 그늘에 숨은 중세 마을을 뒤지고 다녔다.

 


영어 교과서에 실린 《마지막 수업》을 배우며 regiment니 forward march! 따위를 익혔다. 중학생이던 그때 나는 이런 단어가 얼마나 신기하던지.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가 마지막 수업 이곳을 배경으로 썼다. 소설처럼 프랑스 주민과 독일 세력이 까칠하게 립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정작 마을 사람들은 알퐁스 도데를 잘 모르고, 역사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소설은 랑스 영토에 프로이센 군대가 들어오면서 시작 사실은 그 반대, 이곳은 오래전부터 독일 땅이었다. 그러다 1697년에 프랑스가 점령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한사코 독일말을 고집했다. 소설 보면 생님이  '프랑수아'라고 부르지 않고 독일 이름 '프란츠'로 부른다. 퐁스 도데는 일 이름을 가진 게르만 소년이 침략국 프랑스어를  이상 쓰지 게 된 걸 슬퍼한다는 모순드러낸다. 


이곳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국적이 동프랑크왕국, 독일왕국,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프로이센에서 다시 프랑스로 바뀌는 역사를 겪으며 자랐다. 어느 때부턴가 사람들은 프랑스니 독일이니 한쪽을 정해 줄을 서지 않고 '알자스는 알자스일 뿐 어디도 속하지 않는다.' 라는 의식을 싹 틔우고 길다.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보통 사람들에겐 그게 외려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었으리라. 나라 잃은 애통함이나 소영웅주의 모험담을 기대했던 나는 평생 키우던 두 마리 강아지 '편견'과 '선입견'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리보빌레 길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리즐링 때문인지 식사를 마친 내 코가 빨개졌다.


첫 마을은 리보빌레. 현지 발음은 '히보빌레'에 가깝다. 마을은 아랫동네, 윗동네로 나뉘나 실제는 한 줄로 쭉 이어진다. 마음 내키는 곳까지 걸어갔다가 터벅터벅 도로 내려오면 된다. 내 글이 골목 풍경을 다 말해주지 못할 게 뻔해 발길 멈출 때마다 마음이 먼저 안타까웠다. 마을 문장(紋章)이 '피리 부는 소년'이다. 큰길 어귀에 피리  소년 동상이 있고 길 양 옆으로 피리 물고 연주하는 소년간판이 계속 나타난다.


14세기 무렵 왕이 이곳을 지나다가 울고 있는 남루한 소년과 마주쳤다. 이유를 물으니 소년은 피리가 망가져 저녁거리를 벌 수 없게 되었다고 울먹였다. 왕은 소년을 가엾게 여겨 피리를 새로 구하도록 도와주었. 소년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피리를 연주하였다. 그 후 피리 부는 소년이 리보빌레의 상징이 되었다. 왕이 이곳을 행차하피리 부는 소년을  맞닥뜨린 모두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예나 지금이나 소박한 마을이다. 다행스럽게도.



구글에서 리보빌레를 검색하면  '... small town midst vinyard' 라고 씌어있다.  'midst' 라는 단어가 중세 느낌을 얼마나 살려주는지.  


마을에서 세 가지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건물 외벽에 갈비뼈 같은 목재 골격이 얼기설기 드러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창가마다 놓아둔 제라늄 화분이다. 세 번째는 '피리 부는 소년' 축제. 반목조 건물(half-timbered house)은 '꼴롱바쥬'(Colombage)라 부른다. 원조는 독일의 전통 양식 '파흐베어크 하우스'(Fachwerkhaus). 우리 말로는 '나무기둥 집' 정도로 번역한다. 알자스는 30년 전쟁 후 프랑스 땅이 되었지만 토착민이 게르만족이다. 언어는 독일어 알자스 사투리를 쓴다. 독일식 집이 남아있고 는 것도 독일 시골음식이다.



여행자는 보통 반나절 정도만 머물러 저녁이 되면 마을이 텅 빈다. 그러나 리보빌레에 피들러 축제가 시작하면 밤새 사람들로 북적인다.


창가에 꽃을 두어 자랑하는 버릇은 영락없이 독일식이다. 꽃은 알자스에 많이 자라는 붉은색 제라늄이 대부분이다. 특히 창문턱 빨간 꽃으로 장식하는 모습은 마치 건물이 입술 화장을 한 것 같다고 해서 '알자스 집의 립스틱'(Alsasian houses' Lipstick)이라 부른다. 매년 9월 첫째 일요일에는 '피들러 축제'(Fiddler's Fest)가 열린다. 피들러는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을 말하지만 중세에는 '악기를 연주하여 돈을 구걸하는 사람'이면 모두 이렇게 불렀다.



황새 둥지가 가득한 알자스마을의 지붕. 마을에 하룻밤 머문다면 주변 와이너리를 예약해 포도밭 투어를 할 수도 있다.


두 번째 마을은 리크위르다. 리보빌레에서 5.2km 차로 10분 남짓 떨어져 있다. 보주(Vosage) 산맥 기슭의 완만한 포도밭 사잇길을 달리다 라운드어바웃 세 개를 지나면 불쑥 마을이 나타난다. 인구는 2천 명. 크기는 리보빌레보다 작다. 남쪽 시청사 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와 한복판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길을 15분 걸으면 마을 북쪽 돌더(Dolder) 탑과 성벽이 막아선다. 마을 이쪽 끝에서 산 아이스크림이 채 녹기 전에 마을 반대편 끝까지 다녀올 수 있다.


사람들이 마을 성당 지붕을 다투어 손가락질하기에 쳐다보니 황새 가족이 둥지를 틀었다. 마을 상징이 황새다. 이곳 사람들은 황새(stork)가 아기를 준다고 믿는다. 사람의 영혼이 젖먹이 아기로 환생하는 장소가 근처 호수 밑바닥인데 황새가 그곳에서 아기를 물어온다고 한다. 아기를 문 황새가 늘씬한 다리를 펴고 누군가의 집 지붕 위를 배회하면 그 집에 갓난쟁이가 태어난다. 아기를 갖고 싶은 부부는 황새를 부르려고 요즘도 집 창가에 각설탕을 놓아다. 순진하게도.



알자스는 종이지도가 어울린다. 내비를 꺼버리고 차를 달리다 보면 길을 잘못 들기 일쑤.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과 마주친다. 사실 모든 새길은 잘못든 길에서 비롯하는 법이다


리크위르는 세 마을을 잇는 와인가도의 핵심이다. 총 170킬로미터 알자스 와인가도(Route des Vins Alsace)는 동화 같은 마을 73개, 나지막한 포도밭 4930개, 간을 닮은 와인메이커 1000개를 연결한다. 이들은 무려 1세기부터 와인을 만들었다. 마을엔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했던 시설이 곳곳에 남아있다. 리크위르 도브호텔(the Dove nest)은 1500년대 쓰던 와이너리를 고쳐 방을 만들고 침대를 넣었다. 베갯잇에 와인향이 배여 밤새 숙취에 젖는다고 했다.


와인은 전부 화이트 와인이다. 그중 리슬링(Riesling), 게뷰흐스트라미너(Gewurztraminer), 뮤스카(Muscat)가 유명하다. 골목마다 캐스크(cask)라 부르는 배불뚝이 나무통을 놓고 시음을 권다. 올해 작황이 좋은지 빈티지를 얘기하는 목소리가 왁자하다. 빈티지란 포도(vine)와 (year)를 합친 말이다. 술 중에 '만든 해'가 중요한 건 와인뿐이다. 다른 술은 17년이니 30년이니 숙성 햇수를 따진다.


그런 점에서 와인은 여행과 닮았다.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간 어여행지도 처음 갔을 받은  되살 못다. 장소는 바뀌지 않았지만 공기 질감이며 햇볕 농도, 거리 냄새 어찌 같을 수 있으랴. 설령 그게 다 비슷하더라도 그 사이 잘난 나는 오죽 달라렸을까. 하여 나는 지친 다리를 쉬느라 황새처럼 외발로 기대선 채 내 삶의 한 번뿐인 순간을 어떤 빈티지로 채울지 고민하며 리슬링을 홀짝거렸다.



오른 쪽은 '꺄브'( cave). 와인을 지하에 저장하는 창고를 말한다. 마을 한복판에 있기도 하고 아예 포도밭에 있는 곳도 있다.


세번째 마을, 에귀샤임으로 들어섰다. 생김새부터 독특하. 8세기 에베하트(Eberhardt) 백작이 귀샤임 들판에  둘레를 에워싸는 두 겹의 길을 냈다. 그 길을 따라 마을이 전복 모양으로 생김새를 키웠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따라 걷다가 패트릭(Patrick)을 만났다. 노년의 알랭 들롱을 닮은 패트릭은 사진 찍는 줄곧 옆에서 기다리더니 "어디서 왔느냐" 고 말을 붙였다. 대답을 듣자 그럴 줄 알았다며 손녀딸얘기를 꺼냈다. 길 복판에서 우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삶 속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가 한참씩 머무는 것. 나는 패트릭이 기차를 만드는 회사인 알스톰에서 오래 일했으며, 딸이 한국계 남자와 결혼해 마전 손녀를 안겨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신 패트릭은 내가 지난봄에 남프랑스를 여행했고 이번 가을은 독일 소도시를 찾아다닌다는 걸 들었다.


패트릭이 심상찮게도 "She divorced me a year ago."라고 아내를 주어로 내세운 이별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속절없을 그 사연이 듣지도 않고 안타까웠다. 그를 달래준답시고 "My Old man left me last year." 라고 작년에 입은 부친상 소식을 같은 형식의 문장으로 말해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영어에 연민을 느끼고 상대방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서툰 언어이기에 천천히 말하게 되고 그럴수록 이면의 뜻을 새기게 되어 마음이 곧 눅눅해졌다. 내 어법이 그에게 얼마나 공감을 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합의라도 한 듯 이내 신세 한탄을 거둬들였다.


나는 낯선 이에게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불필요한 말과 미소를 아끼는 부류였다. 그런데 여행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내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종종 '민폐를 끼치거나 낯을 가리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러면서 '수다가 느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패트릭도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승전결의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어정쩡한 시공간. 서로에게 애매한 뒷모습을 남기며 돌아서는데 '댕댕' 오후 다섯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상에 종소리만큼 원시적이고 거짓 없는게 있을까. 나는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에귀샤임에서만 가능한 풍경 수도 있었으리라. 게다가 우리가 약해지는 저녁이 가까워지질 않았던가.



독일 국경 알자스 포도밭. 밭 가운데 있는 건물이 성당이다. 성당의 위치야 어디든 어떠랴. 사람들이 일하다 말고 모여 신을 찾으면 그곳이 가장 마땅한 성당이 될 것이다


독일 블랙포레스트 마을, 호프굿 스테르넨으로 출발했다. 햇살이 리슬링처럼 찰랑거렸다. 포도밭에는 일꾼들이 종일 수확한 포도를 트럭에 옮겨 실으며 하루를 마감하였다. 아까부터 아내는 포도밭 한가운데 있는 지붕이 뾰족한 성당에 들러보자고 채근했다. 포도밭 옆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포도밭 어귀마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중세엔 주로 수도원이 포도를 키워 와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십자가에 포도밭이 어느 수도원에서 경작하는지 알려주는 글자새겼다. 그러다 포도밭의 경계를 구분하는 표지 석으로 사용하더니만 이제 십자가는 와이너리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포도나무와 와인은 성경에 520번이나 언급된다. 창세기를 보면 홍수가 끝난 뒤 노아가 맨 처음 시작한 일이 포도 농사였다. 포도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잎을 틔운 뒤 오직 포도송이를 잉태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뭄과 햇볕을 인내한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예수나 마리아를 상징하고 무 가지는 기독교 신자로 비유한다. 포도밭 십자가 앞에서 아내가 성호를 그었다. 삶은 노른자를 체로 친 것처럼 포슬포슬한 햇볕이 끔거렸. 찌르르 현기증이 났다. 나는 햇볕을 손바닥으로 가리릴케의 시를 떠올리는 것으로 머쓱한 기도를 대신하였다. 그것은 패트릭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구절이었다. 햇살이 포도에 배듯 그의 상처에 연고처럼 스미어 조금 덜 팠했으면 싶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누이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남은 열매를 맺게 하시고, 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며들게 하소서"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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