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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Mar 24. 2020

로텐부르크의 뒤로 걷는 시간

독일




뒤뚱거리며 해자를 건넜다. 성을 지키는 보초 격인 뢰더탑(Rodertrum)을 지나자 이번엔 수문장역을 맡은 마르크스(Markustrum)이 막아섰다. 탑의 높이를 가늠하려 고개를 순간 탑신에 걸린 시곗바늘 두 개가 '째깍' 한 몸으로 겹쳤다. 정오다.


기다렸다는 듯 성야곱교회(St.Jakobskirche) 종탑에서 비둘기 떼가 날올랐다. 종소리가 터져 나왔다. 종소리는 시간을 퍼 나르는 난쟁이붉은 지붕 위로 줄지어 뛰어내렸다. 그들은 때가 되었음을 알리려고 시청 앞 마르크트 광장을 향해 내달렸다.  다른 방향에서 달려온 숨이 턱에 받힌 종소리들은 환호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마구 뒤엉켰다. 바야흐로 9월 둘째 주 수요일, 축제가 시작됐다.



코볼젤러 성문으로 이어지는 플뢴라인(작은 장소라는 뜻)은 로텐부르크에서도 가장 중세 느낌이 난다.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타우버 강을 만난다.



남은 종소리들은 광장 게오르그 분수대의 청동 기사상을 돌아 플뢴라인(Plönlein)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경꾼과 가로수 린덴바움, 비상하는 벌새들은 종소리가 스쳐 지나가면 감염 중세로 납치되었다. 그러고도 산화되지 못한 남은 소리는 코볼젤러(Kobolzeller) 성문을 넘어 에스 자로 흐르는 타우버 강을 만나 900년째 몸을 섞었다.


나는 대장장이 거리인 슈미트가세(Schmiedgasse)를 지났다. 두 시부터 시청사에서 마이스터 트룽크 공연을 보고, 어두워지면 광장의 불꽃놀이에 참석할 요량이었다. 그전에 밑창이 덜렁거리는 신발부터 어떻게든 손을 봐했다. 벌어진 밑창으로 침입한 잔돌이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나는 추어 바펜카머(Zur Waffenkammer)에서 로텐부르크 성을 지키는 용병으로 분장했다. 옆에 선 사람들은 5년째 로텐부르크를 찾는다는 스위스 여행자들이다.



로텐부르크의 원래 이름은 로텐부르크 옵더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 우리말로 '타우버 강의 붉은 요새' 란 뜻이다. 프랑크 왕국 시절인 9세기에 건설되었다. 부르크(burg)는 원래 성이란 뜻인데 '부르주아'(성 안에 있는 사람들)란 말이 부르크에서 나왔다고 한다. 로텐부르크는 이름에서부터 부티를 내비친다.


독일의 배꼽인 뷔르츠부르크에서 로텐부르크를 지나 퓌센까지 이어지는 350㎞ 로만틱 가도는 로마로 가는 무역로였다. 로텐부르크는 이 길을 지나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하며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였다. 상업으로 돈을 모아 1274년에 마침내 '자유제국도시'가 되었다. 이는 영주와 사제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황제의 직속 관할에 들어 시민 자치권을 행사하게 됐다는 말이다. 당시 이런 도시는 독일에 50개뿐이었다. 가톨릭 사제들이 들어오지 못하자 루터교가 퍼졌다. 결국 중요한 사건 하나가 잉태되었다.



<마이스터 트룽크> 공연, '불꽃놀이'와 함께 로텐부르크 축제의 중요한 볼거리다. 축제의 정식 이름은 '자유제국도시 축제(Free Imperial City Festival)이다



신교와 구교 사이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31년 10월, 로텐부르크는 틸리(Tilly) 백작이 이끄는 6만 가톨릭 군사에 함락당한다. 틸리 백작은 시의회 의원을 모두 처형하고도 모자라 도시를 마저 불태우겠다고 윽박질렀다. 당시 시장 누쉬(Nusch)는 틸리 백작을 찾아가 든 할 테니 파괴를 멈춰달라고 애원했다. 틸리 백작은 시장더러 3.25리터짜리 포도주를 한 번에 다 마시면 그만두겠다고 호언했다. 요즘 와인 한 병이 750ml니 와인 4병 반이나 되는 양이었다. 누쉬 시장은 그 자리에서 말술을 들이켰고, 틸리 백작은 자기 말대로 군사를 되돌렸다. 시장은 사흘 동안 몸져누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로텐부르크를 구한 이 사건을 '시장의 음주', 마이스터 트룽크(Meistertrunk)라 불렀다. 로텐부르크는 1881년부터 매년 9월, 이를 재연하는 공연을 각별히 열고 있다. 독일은 맥주와 와인이 역사의 구석구석에 윤활유처럼 칠해져 있다.



시청사 건물에서 본 <마이스터 트룽크> 공연 모습. 중요 인물들은 극단에 소속된 전문 배우들이고 병사들이나 주민들은 실제 마을 사람들이 참가한다.



공연은 사건이 일어났던 시청사 3층, '황제의 방'에서 열렸다. 교실 두 개를 붙인 크기의 방 한쪽에 무대를 만들고, 객석엔 교회 의자를 줄지어 놓았다. 관객은 눈짐작으로 2백  들었다. 오랜만에 모인 주민들은 이쪽저쪽에서 아는 척을 해댔다. 나는 방 중간을 가르는 통로 가까이 앉았다. 공연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세련'을 기대하면 안 된다. 군사들이 우르르 통로로 뛰어들 때는 얼른 반대편으로 몸을 숙이지 않으면 그들 손에 든 방패나 창에 옆구리를 쥐어박히기에 십상이었다. 공연은 투박하고 서툴렀으나 이방인에게 건네는 주민들의 따뜻한 시선에 나는 금방 흡족해졌다.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중간중간 울리는 팡파와 호탕한 웃음, 느닷없는 달음박질에 지루한 줄 몰랐다. 이곳 사람들의 역사에 나도 직접 참가하는 듯해 안 그래도 착한 입장료 10유로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저녁 9시. 광장의 밤공기가 달아올랐다. 군터 로덴바흐(Gunther Laudenbacher) 로텐부르크 시장이 청사 앞 연단에 올랐다. 딱 한마디 개회선언을 했. "여러분, 오늘 밤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화포가 일제히 하늘을 향했다. 하마면 잿더미가 될 했던 30년 전쟁 당시 도시를 재현한다고 했다. 광장에는 중세 복장을 한 천여 명의 사람들이 스무 개 그룹으로 나뉘어 웅성댔다. 이들은 30년 전쟁 시절 로텐부르를 지키던 정규군 군사, 농부, 소년병, 외국인 용병, 아낙네, 다른 도시에서 온 원군, 신부와 수도사, 상인, 구걸 뱅이 등등으로 분장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성 밖 주둔지부터 구시가지 골목을 나팔을 불며 행군하여 구경꾼을 몰아 왔다. 주민 2500 명 중 절반 정도가 참가한다고 했다.



중세 모습으로 분장한 마을 사람들. 30년 전쟁 당시 골목을 행군하며 마을 사람들을 격려했던 모습을 축제 기간 내내 재현한다.



나는 시청사 맞은편, '사자 약국'이란 뜻의 뢰벤 아포티카(Lőwen Apotheke) 건물 계단에 걸터앉았다. 벽에 쓴 'Seit 1374'란 1374년에 건물이 세워졌다는 뜻이다. 아까 하펜가세(Hafengasse) 거리에서 새 부츠도 한 켤레 사서 신은 터라 내 기분은 사자만큼 용맹해졌다. 구둣방이란 뜻인 슐라든(Schuhladen)을 아예 가게 이름으로 쓰는 주인아저씨는 신던 신발의 해진 밑창에 넉넉하게 본드 칠을 해서 되돌려주었다. 아직 신을만하다면서. 나는 호의를 어쩌지 못해 광장 쓰레기통을 못 본 척 지나쳐야 했다. 그렇게 들고 온 헌 신발주머니를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마침 약국 계단은 높아서 구경하기에 좋았다. 



왼쪽은 뢰더탑 꼭대기까지 쏴올려저 터지는 불꽃. 오른쪽은 타우버강 계곡에서 성을 보고 쏘는 불꽃. 화염과 연기가 도시를 태워버리는 듯해 Burning City라는 이름을 얻었다



폭죽은 발작처럼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혼을 빼놓으려는 듯 처음부터 한꺼번에 쏘아 올렸다. 폭죽은 하늘을 태우고 어둠을 찢어발겼다. 주최 측은 시청사가 붉게 타는 모습을 만들려고 건물 안쪽에다 화염을 피웠다. 저러다 불붙으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였다. 한바탕 포성이 지나면 머리 위로 검댕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매캐한 화약 냄새까지 쏟아져 사람들을 혼절시켰다. 폭죽이란 건 불을 도구로 쓰지 않고 불 스스로를 파괴하여 만드는 폭발이라 사람들을 쉽게 흥분시켰다. 


불구경 나온 로마 황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모두 얼굴이 벌겋게 익을 때쯤 포성이 잦아들었다. 마지막 몇 발이 아쉬운 꼬리를 끌며 종탑 너머 사라졌다. 중세 병사들은 둥둥 북을 울려 군중들에게 마지막 신호를 보냈다. 해산이다. 이제 저들은 밤새 술을 마실 것이다. 누쉬 시장처럼 사흘쯤 드러누운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옆자리 레나타 할머니는 나에게 여행자는 그만 들어가는 게 좋다며 등을 떠밀었다. 대신 내일 밤 성 밖 계곡에서 성을 향해 쏘는 불꽃놀이가 근사하다고 귀띔해 줬다. 그게 축제 리플릿에 소개된 '불타는 도시'(Burning City)라나.   



로텐부르크의 나이트 웟처 조지(Jorge)를 따라 밤 골목 탐험에 나섰다. 누구라도 그의 낮은 목소리와 서늘한 밤 기운에 잡히면 총총 걸음을 옮기게 된다. 혼자 뒤처지지 않으려고.



사흘이 엉겁결에 지나갔다. 축제는 토요일 아침 쏟아진 가을비와 함께 끝났다. 혼란스러웠던 중세가 씻겨가자 해맑은 현재가 돌아왔다. 나는 중세와 현재가 뒤섞 시간 왜곡(time warp)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마을 복판에 커다란 타임 포털이 뚫려 중세 사람들이 현재로 쏟아져 들어온 듯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성 야곱교회를 찾아 '성혈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 갈겐가세(Galgengasse) 거리를 걸어 도시에서 가장 높다는 바이서 탑(Weißerturm)을 올랐다.


밤에는 본드가 잘 마른 옛 부츠를 꺼내 신고 나이트 웟처(Night Watcher)를 따라 로텐부르크의 고샅을 뒤지고 다녔다. 중세 사람들이 가장 꺼렸던 직업이 사형집행인, 무덤 파는 일꾼, 나이트 웟처인데 조지는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야경꾼이라며 소개했다. 그를 따라 중세의 밤을 순찰하려니 나도 오래된 부츠를 신는 게 당연해 보였다. 등불에 드러난 조지의 부츠는 내 것보다 더 구식이었는데 나는 그게 다 신뢰가 갔다.



왼쪽이 시청사 건물 오른쪽 흰 건물이 시의회 연회관이다. 붉은 벽시계 양쪽에 달린 창문에서 매 시각 틸리 장군과 누쉬 시장 인형이 나와  <마이스터 트룽크> 를 재현한다



결국 나는 낡은 부츠를 버리지 못했다. 그걸 다시 꺼내 신었다. 라리 책이면 두고 왔을 데 헌 부츠를 버리자니 슬펐다. 아침마다 부츠는 로텐부르크 호텔 침대 밑에서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낡은 부츠를 벗어던지면 내가 그걸 버리는 게 아니라 부츠가 나를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던가. 뮌헨에서 딩켈스빌, 뉘른베르크로. 그전엔 리스본에서 코임브라, 포르투로 부츠는 마음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나를 싣고 대륙을 가로질러 온 한 척의 배. 뒤축이 닳고 밑창은 덜렁거렸지만 내 몸뚱이를 싣고 중세로 시간 여행까지 다녀온 분신이었다. 이제는 과적으로 선복이 뜯어져 버린. 선주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고흐는 '낡은 구두 한 켤레'를 그려놓고 '을 경건하게 압축한 이력서'라고 제목붙였다. 이력서의 글자 이력(履)이 '신을 신고 돌아다닌다'라는 뜻이다. 이제 나는 9월이면 버리지 못한 부츠를 신고 로텐부르크의 시간을 거꾸로 걸었던 나의 '이력'을 추억할 것이다. 신발장 구석의 쓸쓸한 부츠는 슈미트가세 거리 신기료 아저씨와 나눴던 뻣뻣한 악수며, 마르크트 광장에서 만난 레나타 할머니의 등 떠밀던 손길이며, 그래서 호텔로 돌아오던 안전한 발걸음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 걸음걸음이 나의 이력이고 나의 세상이며 또 나 자신임을 이윽고 알게 되었다. 내게 여행은 그런 것이다. 떠날 땐 몰랐던 비밀스러운 깨달음을 또 하나 얻게 되는 바로 그런 거.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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