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남편이 외출했다. 두 사람을 배웅하며 현관문을 닫을 때의 홀가분함이란! 방금 내린 커피 향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창밖으로 장대비가 쏟아진다. 나는 혼자이고, 집은 깨끗하고,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무반주 첼로곡이 흘러나온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엄마는 외로울 틈이 없고 아내는 혼자 있고 싶다. 지난 휴가 후,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목마르고 애가 타서일까? 태어나서 지금만큼 책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비록 해외에 사는 이유로 종이책은 접었지만 덕분에 스마트한 장비들과 제법 친해졌고. 나의 e-book 서재에는 어느덧 400권에 달하는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나는 책부자다.
누적된 초고가 꽤 쌓였으나 묵혀두는 이유는 조급함이 사라진 탓(덕)일 테다. 아웃풋을 할 때가 되었다고 작심했던 것이 부끄럽다. 나는 여전히 뫼비우스 띠처럼 혼재된 시간에 살고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책을 펼친다. 나머지는 그저 사색이 메꾸어 줄 것이다.
독서 중의 독서는 재독(再讀), 삼독(三讀)이다. 시간이 흐르면 경험치가 달라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밑줄을 치는 건 무용하지만 나는 아직도 독서의 흔적을 남긴다. 어느 날 문득 질척이는 과거의 나를 소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책 읽는 지금,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시간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는다. 아마도 학교를 떠나 필독서가 사라지면서부터인 것 같다. 이제 내겐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이 필독서고 베스트셀러 목록 따위를 볼 필요도 없다. 인터넷 서점에서 관심 분야 키워드를 입력한 후 관련 서적을 느긋하게 검색하면 된다. 평소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소식을 받아보는 것도 좋다.
이어 꽂히는 제목이 있으면 클릭하여 목차와 문체를 훑고 양껏 내 서재에 담는다. 멤버십은 필수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보는 건 볶음밥과 비빔밥을 좋아하는 이유와도 같다. 단짠의 조화,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적절한 말은 대체 누가 했을까?
물론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보면 도태되는 책들도 자연히 생겨난다. 그만큼 매력이 없어서일 수도, 단순히 내게서 잊힌 책일 수도 있으나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게 넉넉한 책이 있음을 감사할따름이다. 오늘은 지금 읽고 있는 책 리스트를 공유하며 가벼운 책 수다를 나눠보려 한다. 먼저 나의 책 읽는 방식, 습관, 최근 취향은 어떤지 나열해봤다.
책을 선정할 때 -고전 예외- 문체가 깔끔하고 매력적인지 확인한다.
새 책을 들이면 먼저 목차와 서문을 읽는 습관이 있다.
매일 그날 그때의 기분에 맞추어 책을 선택하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권을 본다.
집중력을 내어줄 수 없을 때에는 최대한 흐르듯 읽어도 좋을 가벼운 책을 본다.
지적 호기심이 발동할 때마다 인터넷 서점에서 어슬렁 거린다.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에는 고전을 본다.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들여다볼 만한 여유가 생겨야 소설을 읽는다.
시는 수시로 소리 내어 읽고 -고전 예외- 난해한 시들은 살짝 피한다.
재독 삼독하는 책들은 자투리 말고 통째 시간을 이용해 메모하며 읽는다.
100년 이상 된 고전은 통곡물 탄수화물 섭취하듯 천천히 꼭꼭 씹어 소화한다.
음악, 미술, 영화, 미학 등 예술 관련 책들은 당떨어질 때 간식처럼 챙겨 읽는다.
최근 몇 년 관심 분야는 심리학이고 그중 분석심리학 관련 책을 즐겨 읽는다.
반려견, 반려식물 및 건강 관련 서적에도 관심이 많다.
중국어 원서 외에 한자어가 많은 한국어 서적은 꺼리는 편이다.
평균 5일에 한 권 읽고 그중 한 달에 한 권은 반드시 독후감을 작성한다.
부끄럽지만 책욕심이 많아서 미뤄둔 책, 읽다만 책이 많다.
내 인생 가장 꾸준히 낭독한 벽돌책은 성경책이고 현재 3독 중이다.
몇 년째 꾸준히 명상을 해오며 관련 서적에 관심이 많다.
그 밖에 지리, 역사 분야 책도 보지만 경제, 과학 방면 책은 전무하다.
금융, 경제, 투자 관련 책은 담아는 놨으나 우선순위에서 늘 제외다.
N잡러, 디지털 마케팅 관련 책도 집중해서 보려고 한다.
명리학도 궁금한 요즘, 무슨 책을 볼까 어슬렁거리는 중이다.
주저리 주저리 말도 많다. 누가 보면 책 생각만 하는 줄 알겠다. 사실 이렇게 신나게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기껏 최근 몇 년인 것을. 독서력도 변변치않다. 학교 다닐 때 너무 놀아서 늦깍이가 된 것일 뿐. 하지만 나의 수다력은 여전히 쓸만할 지도. 각설하고, 이번에는 재독(再讀) 중인 책을 포함, 현재 읽고 있는 책을 나열해 본다. 이야깃거리가 많은데 시간 관계상 최대한 힘 빼고 쓱쓱 소개해야겠다. 매우 주관적이니 믿거나 말거나.
1. 시몬 베유 <노동일지>: 번역서인 이유도 있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게 있다. 재독 삼독이 필요한 책이다.
2. 민병배, 이한주 <강박성 성격장애>: 어쩌면 모든 정신질환은 강박적 사고가 저변에 깔려있을지도.
3.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이라는 강열한 제목에 이끌려 책장에 모셔놓고 드디어 완독할 모양이다.
4. 제임스 홀리스 <나를 숙고하는 삶>: 책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이후 제임스 홀리스 책은 놓치지 않기로.
5.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다. 나는 언제 그리 되려나.
6. 초명 <명리, 나를 지키는 무기>: 명리학이 궁금해서 펼쳤으나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 문해력이 이리도 딸리다니.
7. 강신주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브런치 이웃 작가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다. 시인의 사상을 알기 쉽게 펼쳐놓은 책, 강신주를 따라 읽고 싶다.
8. 헤르만 헤세 <매일 읽는 헤르만 헤세>: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책.
9. 김나나 <지구별을 사랑하는 방법>: 실천하는 에코라이프를 위해 마련한 책.
10. 마크 베코프 <개와 사람의 행복한 동행을 위한 한 뼘 더 깊은 지식>: 애견인이라면 마땅히 읽어야 하는 책.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곁에 두고 읽으면 아이디어 샘솟을 듯.
2. 밀턴 에릭슨 <심리치유 수업>: 매우 상세하고 다양한 예시가 풍부한 심리학의 숨은 고전.
3. 린지 C. 깁슨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 어린 나를 위로하고 어른인 나와 만나는 시간.
4. 아들러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권으로 열등감 극복하기.
5. 톨스토이 <인생독본 1,2>: 야금야금 조금씩 낭독하며 읽기 좋은 책.
6. 개리 마커스 <클루지>: 사고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면?
7. 가바사와 사온 <당신의 뇌는 최적화를 원한다>: 한 권으로 쉽게 이해하는 뇌 속 '신경전달물질'
8. 크리스틴 퍼든 데이비드 <끊임없는 강박사고와 행동 치유하기>: 민감을 잘 다루고 싶다면, 강추!
9. 김혜남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에게 '24시간 아픈 것은 아니니까'라는 말을 남겨준 책.
10. 제임스 홀리스 <사랑의 조건>,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나는 나와 이별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심리학 서적 중 가장 심도 있고 쉽게 쓰인 책들, 겹치는 내용이 있어도 무조건 강추.
11. 박우란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애도의 기술>, <여자의 심리코드>: 정신분석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 책들, 박우란 선생님의 팬이 되었음.
12. 오카다 다카시 <애착 수업>: 애착에 관한 교과서, 나는 어떤 유형인가 발견하게 되었던 책.
13. 맥 애럴 <스몰 트라우마>: 문제를 발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구체적인 치유 방법을 제시해 준 책.
14. 알랭 드 보통 <불안>: 다양한 각도로 불안의 근원을 찾게 돕는 책, 예술과 여행, 종교로 승화되는 해법.
15. 세스 고딘 <린치핀>: 주체적인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책, 유일무이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겠다 선언함.
16. 찰스 두히그 <습관의 힘>: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나쁜 습관의 패턴을 끊어내는 데 성공, 체험이 필요한 책. 17.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전자책이 없어서 기어코 종이책을 마련함, 창의력을 자극하는 책.
18. 로렌스크레인 <자기 사랑>: 긍정만능주의에 반대하던 나에게 긍정의 심리학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책.
19. 이성복 <끝나지 않는 대화>: 난해한 시도 공감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 이성복의 철학적 인터뷰.
20.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작가에 대한 연민으로 힘겹지만 인간에 대한 공감으로 따뜻한 책.
21. 사이토 다카시 <혼자 있는 시간의 힘>: 혼자 있고 싶었을 때 동무가 되어준 책.
22. 안나 프로이트 <자아와 방어기제>: 방어기제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룬 책.
23. 휘프 바위선 <치매의 모든 것>: 치매를 이해하기 위한 교과서.
24. 프랜시스 젠슨 <10대의 뇌>: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라면 필독서.
25. 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속죄를 위한 여행, 펑펑 울면서 읽었던 소설.
26.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펼쳐보면 좋을 책.
27. 김승옥 <무진기행>: 문장력에 반한 책, 쓰기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
28. 온다 리쿠 <꿀벌과 천둥>: 숨 막히는 흡입력, 클래식과 친해지고 싶다면 더더욱 추천.
29. 브뤼노 몽생종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 음악으로 삶을 풀어낸 책, 최고의 선생님 나디아 불랑제.
30. 스티븐 이설리스 <젊은 음악가를 위한 슈만의 조언>: 음악 하는 딸을 위해 집어든 책,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리라는 다짐은 덤으로.
이 밖에도 <자크 라캉>, <강인함의 힘>, <글쓰기의 최전선>, <Jazz it up> 시리즈,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 <챗GPT는 심리상담을 할 수 있을까?>, <구토>, <뮤지코필리아>, <관계의 미술사>, <1984>, 프랭크 허버트 <듄 1부: 듄> 등 읽다 만 책들이 수어권임을 새삼 알아챘다.
이 중 <뮤지코필리아>는 뇌와 음악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1/3까지 읽고 잊고 있었다. 조지오웰 <1984>와 프랭크 허버트 <듄> 시리즈는 내 취향은 아니고 딸아이가 좋아하는 책이라 꾸역꾸역 읽어볼까 하는 책, 끝으로 샤르트르의 <구토>는 미안하지만 정말 구토날만큼 난해하다. 거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난이도로 맞먹는다. 평점도 높던데 사람들은 정말 무슨 말인지 알고 읽는 걸까?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쌓여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배가 부르니 지적 허영심만 하늘을 찌르지. 그런데 더 끔찍하게 신나는 일은 매일매일 서재에는 새 책이 추가된다는 사실이다.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
마지막으로 약 4년 전부터 정성스레 가꿔온 나의 소박한 베란다 서재를 공개해 본다. 세 식구 사는 집에 방이 세 개면 뭐 해? 침실 두 개, 딸아이 연습실을 제외하면 내 방은 없다. 문득 과거 살았던 집들을 떠올려보니 나는 언제나 기어코 나만의 공간을 만들곤 했었다. 이불집을 쌓았던 꼬마였을 때부터. 펑펑 눈이 쏟아지던 날 나만의 이글루(iglu)를 만들겠다고 온종일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즐거웠던 유년에도. 나는 늘 나만의 공간을 꿈꿔왔다.
일단 자기만의 공간이 생기면 공간을 채우고 꾸미기 위해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내 책상의 반은 작업실, 나머지 반은 작은 화원이 되었다. 내내 똥손이었던 나는 난꽃까지 키우며 나만의 작은 화원을 만들어냈으니 대견하지 않은가? 처음 나만의 방을 만들던 날은 어찌나 뿌듯하던지 눈물이 찔끔했다. 그런데 이젠 베란다 말고 넓은 창에 석양이 좋은 나만의 방이 갖고 싶어 졌다. 안될 건 또 없지. 아이가 훨훨 날아갈 2년 후를 기약하며. 설레이는 오늘의 책 수다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