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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Jun 10. 2024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집중력 검토의 시간


책 <도둑맞은 집중력>의 첫인상


일단 제목이 마음에 든다. 우리가 모두 혹할만한 내용인 현대인의 집중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둑맞았다니 마치 내 잘못도 아닌 것 같아 죄책감도 내려놓는다. 그런데 눈에 띄는 문제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매끄럽지 않은 번역으로 인한 가독성 저해였다. 아마도 참고서적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개인적인 관심분야인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도 많을 것 같다. 다양한 정보로 무장한 책, 지식의 퍼즐을 아름답게 맞춰 놓아 새로운 인사이트를 만들어내는 책이길 바라며 나는 집중력을 발휘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집중과 선택의 중요성


나 역시 집중력의 위기가 민주주의 위기와 함께 도래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정보가 넘쳐나고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는 것을 어려워하게 되었다. 실제로 현대인들 중에서는 결정장애(햄릿증후군)를 경험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 경우 결정장애 정도는 아니지만 쇼핑을 할 때도,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도 최대한 메타인지를 가동하여 내가 원하고 필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하곤 한다. 물론 이 때도 집중력은 소모된다. (* 메타인지: 내가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파악하는 능력)


다만 나는 집중력이 한정된 자원이라는 점에는 조금 의아하다. 책에서 저자는 스티브 잡스 검정티를 예로 들면서 집중력이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결정하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고 피력했다. 물론 집중력이 더 필요한 업무에 쓰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한정된 자원이라기보다는 선택적 자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스티브 잡스는 티셔츠를 제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티셔츠를 고르는데 집중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선택적으로 집중력을 사용하는 것이지 결코 사용된 집중력이 달아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시 번역의 문제일까? 해석하기 나름일지도 모르겠다. 큰 의미는 없으나 짚고 넘어가 본다.


멀티태스킹(다중작업)을 줄이자


한편 저자가 말하는 멀티태스킹의 함정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했다. 나 역시 꽤 자주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었다. 다만 집중이 필요한 일보다는 기계적인 노동 또는 소극적 태도가 가능한 일들에 주로 멀티태스킹을 활용한다. 가장 일상적인 예로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콩나물 삶을 물을 끓이고 동시에 드라마를 시청하는 일 등이 있겠다. 나는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은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는 편이다. 멀티태스킹을 하게 되면 긴장을 해서 실수의 부담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면서 영상을 보기보다는 오로지 운동과 호흡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멀티태스킹은 줄이는 게 맞다.


청소년의 멀티태스킹은 어떠한가? 주변에 청소년이 있다면 아마 많이 봐 왔을 것이다. 그들은 꽤 자신 있게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10대의 뇌를 살짝 살펴볼 필요가 있다. 10대의 뇌는 감정조절 및 공포에 반응하는 편도체의 발달에 비해 집행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전전두엽 피질의 성숙이 더디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불이 났는데 휴대폰을 보고 있다거나 음주 후 운전을 감행하는 10대를 떠올려보자. 어른의 경우 편도체가 전두엽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판단 후 집행이 가능하지만 청소년은 공포반응은 하지만 판단 및 집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에 반해 역설적으로 10대의 뇌는 인지능력과 학습능력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기 때문에 멀티태스킹이 된다는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고 하니 흥미롭다. 지금 당장 자녀에게 말해주자. (참고서적: 책 <10대의 뇌>에서)


디지털 디톡스에 대한 생각


개인적으로 나는 짧은 영상을 보면 울렁거리고 요약본 보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휴대전화 문자로 수다 떠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며 차라리 날 잡아 영상통화 하는 쪽을 선택한다. 텍스트 써넣는 속도 역시 인내심 없이는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유튜브 또는 틱톡은 보지 않는 편이며 혹 보더라도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보려고 한다. 때때로 좋은 영상이 눈에 띄면 나도 뭔가에 홀린 듯 시간을 조각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일단 저장을 누르고 여유가 생길 때 보기로 한다.


그래서일까? 디지털 디톡스는 나에게 매력적인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21세기에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방법은 없으니 차라리 자기 조절능력을 향상하거나 적당히 휴대폰 기능을 잘 활용하는 선에서 그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자기 조절능력은 다양한 동기부여로도 조절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디톡스 다이어트를 못 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디지털 기기에 의존성이 없는 편인 것도 한 가지 이유겠다. 휴대전화의 기능에 충분히 감사하지만 나는 심플하게 휴대전화가 거추장스럽다고 느낀다.


몰입과 자이가르닉 효과


집중력과 몰입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행동심리학자 스키너와 그의 이론에 반대하던 칙센트 미하이를 예로 들었다. 실제로 과거 미국에서 주를 이룬 행동주의 심리학이 바라보는 인간관은 '자극을 받아야만 행동하는 수동적 인간관'으로 이는 인간의 집중력과 몰입과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결국 행동주의 심리학은 1950년대까지 성행하다가 '환경을 파악하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관'이 강조되는 인지심리학이 등장하면서 몰입과 집중력의 중요성도 강조되기 시작한다.


칙센트 미하이는 특히 예술 활동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했는데 이를 통해 인간이 어떠한 보상(자극) 없이도 강열한 몰입의 상태에 이룰 수 있음을 깨닫고 스키너의 이론을 완전히 반박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책에서 미하이가 강조하는 몰입의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 번째, 몰입은 한 번에 하나만 할 때 이루어진다. 두 번째, 자신에게 유의미한 일을 해야 한다. 세 번째로는 능력의 한계에 가깝지만 능력을 벗어나지 않는 일을 하는 방법이 도움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메타인지를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러시아 심리학자가 제시한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개념인데 미완성 효과라고도 불리며 어떠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거나 방해받을 때 오히려 수행한 업무에 대해 더 잘 기억해 낸다는 이론이다. 예술가라면 일종의 휴지기가 이에 해당되며 때때로 긴 시간의 몰입보다도 강열한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책의 5장에서 언급한 딴생각에 대한 연구와도 일맥상통하겠다. 미완성 효과는 몰입의 다른 형태일까? 미완성과 실수를 허용하는 자이가르닉 효과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결국 인간의 뇌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과 맞물려 끊임없이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이 인간의 뇌의 가소성이며 경이로움 아닐까.


수면의 질과 방법


수면의 양과 질이 중요한 건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테다. 잠을 줄이면 교감신경계가 활발해지면서 우리 몸은 '투쟁 또는 도피' 즉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서적 신체적 반응이 잇따르게 된다. 교감신경계 활성의 대표적 증상으로는 심박수 증가, 혈압 상승, 혈당저하 등이 있는데 뇌는 집중력과 기억력이 흐려지고 심하면 환청, 환시, 망상 등의 일시적인 정신적 병리현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실제로 잠만 많이 자도 브레인워싱 효과로 인해 학습효과는 상승하고, 일상에서 기분장애가 줄어들며, 전두엽이 활발하게 집행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더 많은 실수와 범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10대가 밤에 잠 못 드는 이유는 10대의 멜라토닌 호르몬이 자정이 넘어야 분비되기 때문에 영유아에 비해 취침시간이 늦어지는 이유라고 한다. 게다가 청소년의 적정수면 시간인 9시간을 채우지 못하니 '수면부채'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또한 수면 후반의 렘수면 동안에 10대의 뇌는 일종의 쇼를 보여주는데 이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10대의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하는 '복습'은 매우 효율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10대의 뇌에게 수면의 질과 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청소년에게 부족한 건 잠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기를 쓰고 안 자고 안 일어날까?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류가 빛의 시간을 늘려놓은 것도 한 가지 이유겠지만 심리적인 이유도 있다고 한다. 21세기 현대인은 바쁘다. 낮시간에 스트레스와 각종 임무를 이행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찌들고 병들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리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은 지치면 지칠수록 보상받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내가 낮에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는데 이렇게 잘 순 없지"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때 우리 뇌의 도파민은 자극을 받을수록 일종의 중독 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이는 악순환되는 것이다. 성인도 '수면부채' 상황을 피할 수 없는 이유이다.   


디지털 빌런과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


소설의 수난시대라는 제목만 보고도 나는 순간 찔끔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소설을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책은 좋아했으나 천천히 서사를 즐길만한 심적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다. 사춘기 때는 소설과 시로 버텼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인문학 책으로 버틴 것 같고 중년이 되니 시와 산문까지 그리운 지경이 되었다. 다행이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적어도 책을 잊은 적은 없구나. 중학교 때 푹 빠졌던 순정만화책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e북을 즐겨보니 디지털 기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각설하고. 책에서 언급한 '긴 텍스트를 읽는 능력'과 '인지적 참을성'의 부족함은 이미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어쩌면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미 각종 SNS와 미디어 중독을 경험했거나 중독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소셜미디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역시 이미 알려진 바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SNS는 사뭇 문제가 많아 보인다. 마침 내가 가장 불행한 타이밍에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친구의 행복한 사진을 보고 불편함 또는 열등감을 느껴봤을 것이다. 심하면 이모티콘 하나로도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SNS는 많은 억측과 오해를 불러온다. 우리는 상대가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어느 누구도 일부로 자신의 불행한 사진을 전시하지 않는다는 점, 가능하다면 보이는 그대로만 보되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진리의 역설적인 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참고로 나는 언젠가 말했던 통제의 불안 때문에라도 스마트폰을 주야장천 들여다보지 않는다. 디지털 기기 따위가 감히 나를 지배하다니. 비록 나는 블로그, 브런치, 네프콘까지 하는 디지털 노마드를 자처하지만 어디까지나 글쓰기와 소통의 도구이며 수익의 창구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랜선상의 만남으로 좋은 인연도 맺었지만 상처받은 경험도 있기에 공동체 기능은 최대한 소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람은 찬찬히 오래 봐야 하고 사람사이에는 늘 아름다운 거리가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급하게 친해진 경우가 탈이 나는데 랜선상의 만남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


나는 종종 내가 이 시대의 청소년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1인 1 악기에 영어와 수영은 기본, 제2외국어에 능한 아이들도 얼마든지 많다. 심지어 해외여행에 봉사활동, 각종 대회와 스펙 쌓기. 이 모든 것이 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존중한다는 전제가 강조된다면야 나쁘지 않지만 더 많은 경우 우리는 그냥 잘해야 해서 열심히 하기도 한다. 특히 요즘 청소년들이 모였을 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현상은 끔찍하리만큼 우려된다. 내가 이 시대의 청소년이라면 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은따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딸아이가 이 점은 나와 비슷한데 친구들과 만났을 때 안 보던 휴대폰을 보길래 물어보니 '그럼. 나 뭐 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페이스북도 구글도 그 어떤 SNS, 심지어 마음 챙김 프로그램도 직접적인 가해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약간의 괘심함은 있지만 말이다. 특히 성인의 경우 각자의 정신건강과 자제력은 자율에 맡겨야 하는 게 맞다. 나는 저자가 어떤 대책을 가지고 올지 슬슬 궁금해졌다. 감시 자본주의의 폐해와 부정편향을 이용한 알고리즘의 집중력 공격, 인터넷의 순기능도 언급하며 양날의 검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블로그를 하고 있는 나로선 검색 알고리즘의 폐해에 대해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시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부정적인 내용에 더욱 집중하고 그럴수록 검색 알고리즘은 게시물을 상위노출 시킨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문제와 해결


나는 저자가 어떤 새로운 제안을 할지 점점 궁금해졌다. 명상을 제안하고, '잔혹한 낙관주의'(긍정만능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꾸준한 명상은 분명 도움이 된다. 나는 명상을 통해 우울, 불안,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수용하는 훈련이 가능해짐을 일부 체험했다. 명상은 잔혹한 낙관주의를 예방하거나 이에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부정적인 감정을 인식하고 수용함으로써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호흡에 집중하는 동안 감정이 충분히 흐르고 나면 부정적인 감정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기도 한다.


9장에서는 슬슬 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이익(집중력, 오프라인 친구 사귐 등)과 소셜미디어 기업의 이익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감시 자본주의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페이스북 사용료를 지불하거나 (50센트 또는 1달러/1인), 정부가 기업을 인수해 공공소유가 되는 것 또한 방법이라고 했으나 이는 독재자 언론 장악이라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동의한다. 유튜브를 볼 때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추천 영상이 극단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방법은 내가 이미 쓰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은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저자는 페미니즘의 역사와 자신의 커밍아웃을 통해 '소수의 꾸준한 노력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나 역시 지지하는 바이지만 문제의 해결책으로는 다소 극단적, 이상적이므로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어떤 시대든 인간은 자유를 갈구하고 자유로운 인간은 결국 양극단의 사회를 만들어 냈던 것도 같다. 공동체 문화의 폐단과 문제점을 생각하면 나 역시 자유로운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은 몰라도 소수 집단의 노력에 가담할 용기는 차마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스트레스


집중력 도둑의 원인으로 저자는 다시 스트레스를 언급했다. 출산, 노화 등 생활 변화는 수면의 어려움 및 수면 방해를 가져오고, 이는 다시 잣은 휴대전화사용으로 귀결하게 된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는 뇌의 과각성을 일으키고 집중력을 저하시킨다는 논리와 핀란드의 복리가 과각성을 낮추고 스트레스를 낮춰줌으로써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예시도 들었다.


원점으로 돌아와 우리는 왜 휴대전화를 놓지 못할까?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함이 아닌가? 집중력 도둑의 주범은 결국 스트레스로 인한 디지털 기기의 중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나는 모든 스트레스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과잉 정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잉 비교와 경쟁으로 인해 심지어 '즐기는 문화'조차도 주체적이기가 어려워졌다. 취업도 여행도 심지어 육아도 유행을 따르고 이에 조금만 뒤떨어져도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라고 했지만 '다수'라고 수정해 본다. 


그 밖에도


식단에 관한 내용 중 빵과 커피를 함께 먹으면 혈당이 쉽게 오르내릴 것이라는 경고 외에 아침에 단백질을 챙기고 '나쁜 탄수화물'을 줄이고 가공식품을 최소하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화학물질의 침투는 방어할 도리가 없다. 식품첨가물로부터 기인한 화학물질은 뇌에 마약처럼 작용하며 식용색소를 마신 아이들이 과잉 행동을 보일 확률이 훨씬 높다고도 하지만 철저하게 배제된 삶을 살아가기에는 이미 사회에 넓게 만연된 유해성 물질들을 어찌할까? 스트레스를 위해 나 역시 종종 '건강하지 않은 음식에서 위로'를 받고 있음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끊어낼 필요까지 있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마저 드는 건 왜일까?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ADHD

출처: 메디컬 타임스

국내 ADHD 환자가 4년 새 92% 급증했다는 기사를 봤다. 특히 소아, 청소년을 중심으로 증가세가 두드러지며 성인 ADHD 환자 역시 늘어나는 추세이다. 기사에서는 ADHD는 조기 치료가 중요하며 완치할 수 있는 질환이라고 밝혔다. 아직까지는 약물치료가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ADHD 환자의 70~85%에서 과잉행동이 감소하고 주의집중력이 증가하여 학업을 개선시키는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단 많은 경우 약물치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치료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ADHD의 원인으로 75~80%가 유전적 원인이라고 했으나 ADHD 진단 방식이 일종의 좀비 기법이라고 밝히며 오진을 하는 경우도 많음을 암시했다. ADHD의 경우 불안성향이 높아 실제 기타 정신질환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거나 오진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심지어 ADHD는 아니지만 집중력이 낮은 경우도 스스로 ADHD라고 믿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어 동물원의 멤버 김창기, 노홍철, 박봄, 박소현, 은지원, 빌 게이츠, 엠마 왓슨 등 연예인과 유명인 중에도 스스로 ADHD라고 밝힌 경우가 적지 않다.


아래 ADHD 진단 기준을 옮겨와 봤다.

출처: 나무위키

저자는 ADHD 진단 방법에 대해 의심을 갖고 유전자가 있다면 환경 속 트리거에 더욱 취약해진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주장하며 오로지 유전자의 확률에 기대는 건 위험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ADHD는 왕왕 양극성 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우울증, 뚜렛 증후군 등의 정신질환을 동반하기도 하며 환경적 요인이 주원인이라고 하지만 아동 학대 등이 가해졌을 경우 동반질환의 심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하니 나 역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게 된다. 연구가 더 필요한 분야이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신체적 심리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지 못하는 시간에 얼마나 많은 학습의 기회를 빼앗기는지,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서는 내재적 동기(자율적)가 외재적 동기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보다 폭력 또는 납치에 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반대로 과거에는 방치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고가 있었고 현재는 보호하기 때문에 줄어든 건 아닐까? 나는 종종 내가 살아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릴 때 위험했다는 생각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아이를 키우며 선택한 방법은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아이가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풀어놔주는 것이었다. 방치가 아닌 방목이다. 대신 울타리 안에서는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눈앞에서 좀 위험한 놀이를 할 때는 눈을 감아야 했고 지하철을 혼자 타고 다니는 건 허용했으나 제 때 연락을 하도록 요구했다. 사실 부모가 지켜보면서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님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럼에도 작년에 미국 보스턴 서머스쿨에 아이를 혼자 보내 기숙사도 아닌 원룸에서 한 달을 지내게 한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나도 저자처럼 언제나 배우는 게 좋았으나 학교의 수업은 싫었다. 책을 좋아했지만 공부는 싫었고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글짓기 독후감 숙제는 싫었다. 본문에서는 서드베리밸리 스쿨의 경우를 예로 들며 학생들의 성공이 오롯이 학교의 교육방식에 있는 것이 아닌 부모의 경제력도 한몫했음을 강조했다. 나는 문득 왜 느슨한 교육이 타이트한 교육보다 학비가 더 비싼가 짜증이 났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표준화된 무의미한 교육 현실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가장 답답한 건 알면서 고치지 않는 -못하는- 어른들의 현실이기도 했다. 불만 가득 볼멘소리를 하는 나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개인적인 노력만 할 뿐이었는데 마치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무력하게 느껴진 적도 많았다.


나의 경우 결국은 표준화된 교육을 벗어나 예중에서 적당히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쉽게 얻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나는 문득 '천재는 노력하는 이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오전 9시에 학교에 가고 오후 2시에 하교, 숙제는 거의 없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험도 거의 없는 학교가 부러워졌다. 자유롭게 놀지 못하고 전자기기에 길들여진 아이들, 각종 첨가제에 화학물질이 노출된 세상. 당연히 아이들의 잘못은 없었다.


에필로그를 통한 요점정리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집중력의 세 가지 형태에 대해 강조했다. 첫 번째는 즉각적인 행동에 집중하는 것, 이름하야 스포트라이트. 이 집중력이 약하면 분산 또는 방해받으면서 단기적 행동 수행이 어려워진다. 두 번째는 스트라이트 즉 별빛, 장기적 목표 및 시간이 드는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집중력이다. 책을 쓰거나 사업을 하거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계획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스트라이트를 놓치게 되면 장기적 목표를 잃게 된다. 세 번째는 데이라이트, 즉 햇빛이다. 통찰 또는 메타인지쯤으로 설명해도 될 것 같다. 즉, 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는지 방향성을 아는 것이다.


저자는 이 중 세 번째인 데이라이트의 상실이 가장 심각한 형태의 산만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데이라이트 부류의 집중력 상실의 위기에 당면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첫 번째, 두 번째 집중력만으로도 평범한 삶을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되며 두 번째 집중력의 진화 형태가 세 번째 집중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메슬로의 욕구단계설 중 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사이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또한 저자는 집중력 향상을 위해 배운 것들을 적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사전 약속을 이용해 지나친 전환을 멈추려 하는 것, 산만함을 자책하는데 머물지 말고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유의미한 활동을 찾는 것, 소셜미디어를 끊어내는 것, 멍 때리기(딴생각)를 지지하게 된 것, 충분한 수면 시간을 지키고 교육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 그 밖에 가공식품 줄이고 명상하는 등의 실천 방법이 최근 몇 년 내가 실천해 온 것들과도 비슷해서 반가웠다.


그런데 다른 점은 팬데믹이 집중력을 파괴했다는 저자의 경험과 달리 나에게는 집중과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으로 남았다는 점이겠다. 팬데믹 기간 동안 나는 오히려 운동도 더 열심히 했고 화분을 키우기 시작했으며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체험하며 새로운 목표와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책 <도둑맞은 집중력>을 덮으며


사실 지난번 책 <인간의 흑역사>에 이어 도둑맞은 집중력도 읽는 동안 적잖이 머리가 아팠다. 수많은 문제점과 원인을 분석하고 있으나 그렇다 할 해결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의식 있는 시민이 되어 '납중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법을 바꾸라고 정부에게 요구'하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충분한 사명감과 자기희생이 뒤따라야 함을 나는 안다. 변화는 언제나 작은 파문에서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끝으로 나는 저자의 에필로그가 꽤 길다는 생각을 하며 어쩌면 저자가 여전히 집중력의 전환을 멈추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책을 덮으려는 찰나에 길어지는 이야기를 보며 말이다. 중복되는 이야기가 비교적 많았고 나의 관심 분야 밖의 내용이었다면 가독성의 저해가 문제가 되었을 텐데 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데 마지막 참고도서 목록을 보니 이 책이 얼마나 방대한 내용을 기반으로 쓰였으며 번역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실제로 '집중력을 깨는 것은 다름 아닌 번역'이라는 재미난 한 줄 서평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집중력을 최대한 가동해 정성껏 책을 읽어냈다는 점이 뿌듯하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수십 개의 논문을 훑어본 셈이니 득이 많다. 문득 저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나의 감상문도 만만찮게 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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