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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May 06. 2024

<인간의 흑역사>를 읽고

결과론적 사고에 반대한다


<Humans: A Brief History of
How We f*cked It all up>
Tom Phillips


제목부터 저돌적인 이 책은 마치 작정하고 인간을 폄하하기 위해 쓰인 것처럼 무례했다. 이번 달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된 톰 필립스의 <인간의 흑역사> 첫 챕터를 읽고 느낀 점이다. 대체 이 책의 말미에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걸까? 나는 속이 베베 꼬이며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설마 단지 과거의 실패로부터 배우자는 경종의 의미는 아닐 테지? 그것도 아니면 인류의 흑역사를 통해 개인적인 위안을 얻기 위함일까? 일단 더 읽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역사서 또는 사례집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어쩔 수 없이 조금은 '감정적인' 감상문을 쓰게 될 것을 미리 밝혀둬야겠다. 만약 <인간의 흑역사>를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 글은 꼭 그냥 지나치길 바란다. 실제로 이 글은 발행취소를 눌렀을 만큼 소심한 마음으로 재발행을 결심한 글이다.


책을 읽기 전 사전에서 '흑역사'라는 단어를 찾아봤다. '흑역사'의 사전적 의미는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이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의 흑역사가 뭐 새삼스러울 일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인 흑역사를 포함해, 인간의 흑역사는 가까운 과거 또는 현재에도 충분히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웃픈 예로 유명 관광지에서 소위 인생샷을 찍다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난 14년간 자그마치 400명이나 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모두 사진밖에 모르는 멍청이였을까?


일단 몇 가지 느낀 점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감 및 애정 욕구, 존중 욕구, 자아실현 욕구 그리고 자아초월 욕구 6단계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 중 5,6단계인 자아실현과 자아초월 욕구는 실제로 실현되기 어렵다고 보았고 심지어 6단계에 해당하는 경우로 예수 또는 석가를 예로 들었다. 물론 5단계인 개인의 자아실현을 이룬 이들도 소수이며 아마도 완성보다는 과정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독재자를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면 좋을까? 나는 그들에게도 자아실현 또는 자아초월의 욕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들 중 다수는 전 단계인 애정 또는 존중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그로 인해 영웅의 투사나 구원자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으리라. 대표적인 인물로 편집, 강박, 애착장애와 양극성 장애를 앓았던 히틀러가 있다. 책에서 말한 더닝 크루거 효과(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처럼 그는 미치광이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를 추종하던 군중이었다. 대중의 무의식에 개입한 집단사고와 군중편승 욕구는 권위에 눌려 자신의 생각을 잊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실제 크고 작게 매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생존본능과 안전욕구는 끊임없이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더닝 크루거 효과(자신의 과대평가)와 집단사고(몰개성화)가 충돌하는 개념임에도 확증편향이 작용할 수 있었던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군중은 확증편향이라는 인지오류를 통해 안전감을 획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늘 양면성을 지녀왔고 양극 간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문명 발전의 득과 실


책에서 농경사회로 인해 부의 불평등, 전쟁, 기아, 폭정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면도 신선하진 않았지만 반박하고 싶은 면이 있었다. 나는 농경사회가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농경이 아니었더라도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고 지배하는 순간부터 그 모든 문명의 발전은 환경파괴를 야기했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문명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노력은 어떤가? 인간은 바보 같은 실수로 문물을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나 유적을 남기기 위한 인류의 노력도 때때로 환경파괴의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문명의 발전에서 득실을 따져봐야 할 때다. 만약 이러한 모순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흑역사, 우연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클루지(Kluge)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클루지 Kluge: 완벽하거나 세련되진 않지만 효과적인 해결책) 난해하다.


식민지에 대해서는 어떤가? 식민지화로 경제 근대화, 인프라 건설, 등을 주장하고 여전히 미개했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걸 왜 지들이 결정하는 걸까? “식민주의가 아무리 나빴다 해도 꼭 실패였다고 할 수는 없다. 윤리적 측면을 깡그리 무시하고 손익계산만 놓고 본다면 대략 성공인 셈”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그냥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윤리적 측면은 왜 깡그리 무시하는데? 지나친 결과론적 사고다.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저자는 책에서 인간의 흑역사를 비판하지만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긍정의 이면은 간과하고 있다. 과학연구 실험 중 유명을 달리한 과학자들의 명단을 나열하며 그들의 희생을 인간의 흑역사로 치부하는 부분도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졌다. 문득 이 책의 영문 제목이 궁금해서 찾아봤다.


Tom Phillips <Humans: A Brief History of How We f*ucked It all up>


이 책을 좋아하기 어려운 이유 한 가지를 더 찾아냈다. 나는 비속어를 타이틀로 삼거나 문장 대부분이 비속어로 쓰인 글을 선호하지 않는다. 영문 제목을 보니 이번에는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이 책의 저자 톰 필립스는 런던에서 활동하는 언론인이자 작가라고 한다. 그는 과거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고고학 및 인류학 그리고 역사와 과학, 철학을 공부했다고 교보문고 웹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데, 저자 소개말의 마지막 한마디는 "뜻밖에도 공부한 것을 실제로 써먹는 책을 쓰게 되어 흐뭇해하고 있다"였다. 정말 뜻밖의 소감이다. 한편 그는 인간의 흑역사 외에 '진실의 흑역사', '썰의 흑역사'라는 책을 출판했다. '흑역사' 시리즈였다. 마케팅 냄새가 진동했다. 책을 쓰는 궁극의 목적이 뭘까 다시 한번 씁쓸해졌다. 내가 안 보면 그만인 것도 맞다.


각설하고, 어찌 됐든 저자로서의 수고로움을 생각해서 나는 나머지 못 다 읽은 부분을 읽기로 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나열된 정보가 많아졌고 일부 연대표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스스로를 토닥이며 상식의 차원에서 읽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하다가 여전히 쏟아지는 그의 신랄한 비판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결과론적 사고에 반대한다.


마지막 에필로그 '바보짓의 미래'라는 소제목에는 살짝 기대감이 생겼다. 영화와 드라마도 해피엔딩이 대세인데 설마 인류의 역사를 새드엔딩으로 마치진 않으리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리라. 그런데 결국 책을 끝까지 다 읽는 시점까지 내가 기대하는 내용은 없었다. 마치 저자는 인류의 구성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순응적인 사람이고 책 편식이 없었다면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반박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그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책을 한 권 더 보리라 달래본다.


이제 나는 유감스럽게도 저자의 관점을 옹호할 수 없고 그 수고로움에 박수도 못 칠 것 같다...라고 결말을 지으려는 찰나에 에필로그 마지막 4행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인류는 지혜와 분별력을 점점 키워가고 있고 우리에게는 더 나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며 저자는 갑자기 독자를 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늦은 감이 있고 그마저도 매우 소극적인 회유였다. 나의 감상문도 다소 거친 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 책을 내려놓으며 이제는 더 이상 '바보'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게 참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흑역사는 저자의 결과론적 사고에 머무는데 그쳤다. 다만 내가 책을 꼼꼼히 읽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반성의 여지도 남겨둔다. 참고로 저자의 인스타에 방문해보니 강아지 사진이 많아서 훈훈했다. 글은 글일 뿐인가?   


마침 어제 읽은 제임스 홀리스 책 <사랑의 조건>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어 공유해 본다.


인간은 사실 늘 불안하다.
17세기에 파스칼이
저서 <팡세>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연약한 갈대일 뿐이지만
동시에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쓰고
강제 수용소를 만들며
자신의 죽음에 관해 상상할 수 있다.
- 제임스 홀리스 <사랑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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