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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Apr 08. 2024

원청(文城)을 찾아서

스릴러로 시작해 로맨스로 끝난 소설


원청이 어디 있는데?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 뜬구름 같은 원청은
샤오메이에게 이미 아픔이 되었다.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끊임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
-본문 中-



나는 독후감을 쓸 때 대략 글의 2/3를 읽은 시점에서 초고 쓰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책들은 1/3을 남겨놓고 절대 반전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원청> 전반부를 볼 때까지만 해도 이 글은 절대 내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야심 차게 준비했던 원서는 일찌감치 손을 뗀 직후였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장르가 소설임을 나는 왜 잊었을까?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먼저 간략한 책 소개 및 줄거리 그리고 작가 소개를 읽고 돌아와도 좋겠다)



평소 영화를 볼 때 나는 전쟁 또는 폭력 영화는 가급 피한다. 과거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홍콩 누아르, 공포, 스릴러, 오컬트 등 독특하고 신비로운 소재의 영화를 좋아했으나 나이 먹고 현실감각이 생긴 후로는 로맨스, 휴머니즘, 예술 영화 그것도 아니면 순수 오락 영화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곤 했었다. 적절한 예시일지 모르겠으나 안전문제로 마치 롤러코스터를 더 이상 타지 못하게 된 것과도 유사하다. 그중 부녀자 강간, 폭력 또는 성희롱 장면은 더욱 보기 힘든데 <원청>의 전반부를 보는 내내 불편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끔찍하고 잔인하기가 오히려 영화보다 더했다.


<원청>을 보며 과거 작가 위화(余华)와 쌍두마차를 이루던 모옌(莫言)의 소설 <檀香刑 탄샹싱>을 원서로 봤던 때가 떠올랐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탄샹싱 뜻을 알아볼까? 탄샹싱(檀香刑)이란, 참기름에 잘 삶은 매끄러운 박달나무 꼬챙이를 항문으로부터 박아 넣어 내장을 상하지 않게 관통시켜 목뒤로 빼낸 다음, 다시 십자가에 매달아 놓아 5일간 숨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형벌'. 이보다 잔인할 수는 없다. <원청>은 비록 탄샹싱에 비하면 덜했지만 이어지는 토비들의 만행에 비위가 상해 더 이상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비위가 상할 정도라면 작가의 필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사실 소설 전반에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서민적인 로맨스는 의아한 부분도 있었으나 제법 따뜻했다. 이후 샤오메이가 두 차례 집을 떠난 후 린샹푸가 아기 린바이자를 안고 원청을 찾아 나서는 전개 역시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토비가 나타나면서 점차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고 소설은 갑자기 전쟁소설로 바뀌어버렸다. 잠시나마 린바이자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와 착한 토비 스님의 등장은 이야기 전반의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주었으나 그것도 잠시, 이름도 흉악한 장도끼가 나타나자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구이민이 토비 장도끼에게 잡혀간 이후 그를 구출하기로 마음먹은 린샹푸는 그날 톈다에게 편지를 쓰고 추이핑과는 안 먹던 밥을 다 먹더니, 제기랄 그럴 줄 알았다. 주인공 린샹푸가 예외적으로 너무 빨리 죽어버렸다. 조금 괴기스럽지만 그는 귀에 칼을 꽂고도 웃음을 잃지 않고 죽어갔다. 나는 문득 남은 1/3의 소설 분량은 무엇으로 채워질지 쓸데없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한편 작가 위화는 소설 <원청>을 통해 스토리 구성 능력과 섬세한 필력을 아낌없이 자랑하고 있다. 어릴 적 문화 대혁명을 겪으며 서문과 결말 없이 몰래 봤던 서양소설이 위화의 상상력을 자극했다고 하며 문혁이 남긴 트라우마도 창의력의 자양분이 되었을 법하다. 그럼에도 아쉬웠던 건 시대적 배경이 주는 공감 전달은 어려웠다는 점인데 이는 중국인이 아닌 나를 탓해야 할 것 같다. 유난히 중국 근대사 작품을 볼 때면 나는 몰입이 어렵다.


개인적으로 소설 <원청>을 보며 나는 중국 현대 소설의 백미라고 하는 첸중수(钱钟书)의 <围城 웨이청>이 떠올랐다. 소설 웨이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은 "성에 갇힌 사람은 밖으로 나가길 바라지만, 바깥사람들은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로 위화의 <원청>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두 소설은 전 후 시대 배경을 공유하며 각각 다른 소재로 민중의 삶과 고뇌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두 작가의 필체는 난해하지 않고 흡입력 있다는 면에서 유사하고 인간의 욕구와 본능을 해학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다시 위화의 <원청>으로 돌아가보자. 긴 호흡으로 23년이라는 집필 기간을 거친 작품답게 원청의 이야기는 새로운 서막을 열고 있었다. 궁금했던 소설의 후반부는 미스터리 했던 샤오메이와 아창의 이야기로 시작되었고 그녀가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어떻게 아칭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녀의 금싸라기 같던 눈빛은 어떻게 바랬는지를 알려 주었다. 특히 아창이 그녀를 범하던 야만적인 첫날밤은 구시대의 유물이 얼마나 여성에게 가혹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또한 며느리가 친정 동생에게 돈을 좀 주었다고 도둑질로 간주하고 소박을 맞고 떠나는 장면은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의아했던 건 샤오메이가 결혼 생활을 포함해 민며느리로 지내던 8년간 시어머니는 샤오메이를 구박한 적이 없었고 나중에 죽어가면서도 샤오메이를 그리워했다는 점이다. 갑자기 나는 고구마를 삼키기라도 한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과연 전통과 풍습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다행히 아창은 좀 비겁했지만 아주 몹쓸 남자는 아니었다. 결국 그는 샤오메이를 찾아갔고 그렇게 그들은 상하이를 거치며 잠시 독자에게 아편, 전등, 증기선, 탄산수 등 당시 서구 문물이 들어온 중국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순간 나는 소설 전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샤오메이와 아창은 곧 생계 문제에 부딪히며 경성의 친척을 찾아가기로 했고 우여곡절 끝에 린샹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시점과 상황이 바뀌었을 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샤오메이의 입장에서 묘사된 린샹푸는 더없이 가여웠다. 두 사람은 같은 시진에 머물렀었고 심지어 스쳐간 적도 있었다. 특히 성황각 제사 때 샤오메이 일행이 얼어 죽었다는 설정은 정말 어이없었다. 문득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인생> 속 굶주린 남자가 만토우를 급히 먹다가 사망했던 황당한 에피소드도 떠올랐다. 당시 중국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시대 중국 서민들은 정말 그랬단다. 그 후로 린샹푸는 17년이 지나서야 샤오메이와 만날 수 있었다.


다음 생에도 당신 딸을 낳아주고
그때는 아들도 다섯을 낳아줄게요.
다음 생에 당신 여자가 될 자격이 없다면
소나 말이 되어 당신이 농사를 지으면
밭을 갈고 당신이 마부가 되면 마차를 끌게요.
채찍질해도 돼요.
-샤오메이-


샤오메이가 죽던 날, 성황각에서 그녀가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다. 채찍질 해도 된다는 말이 이렇게 낭만적으로 들릴 수가! 적어도 나에게는 책에서 울림이 가장 컸던 문장이었다. 그렇게 긴 서사는 끝났고 나도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봤다. 결국 작가 위화의 말처럼 책 속에는 원청도 영웅도 없었다. 그저 파란(波瀾)의 난세를 꿋꿋이 버티고 역사를 만들어간 서민들만 있을 뿐이었다. 책을 덮고 나는 마치 어딘가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소설은 끝이 났지만 나는 왠지 존재하지도 않는 원청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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