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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척추나한의원 Dec 10. 2018

공진단의 시작은?

망원동한의원에서 알려드립니다.

공진단의 이름의 뜻 그리고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았던, '공진단 매거진' 1화에서는 이름 속에 정치, 덕, 북극성 등의 조금은 심오한 내용들이 적혀있는 것을 보고 꿈보다 해몽이라 생각하는 독자분들도 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것처럼 신체의 근본만 튼튼히 지켜낸다면, 다른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찾아 몸이 건강해진다는 공진단의 뜻은 예로부터 최고의 약으로 불려진 공진단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공진단 매거진' 2화,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명약을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요?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보며 준비하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들과는 조금 다른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진단'이라는 처방이 기재되어 있는 의서들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첫 시작은 어떤 서적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역림 '세의득효방 <世醫得效方>'

공진단을 만든 사람은 원나라의 위역림이었을까요? 공진단을 처음 언급한 '세의득효방'의 저자로써, 가장 많이 알려진 위역림입니다. 물론 한의사 사이에서만 유명한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아래 내용들을 확인하게 되면, 기존에 알던 것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공진단의 역사에 대해서 단정 지을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은 감안하고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위역림이라는 사람은 어떤 의사였을까요? 위역림은 원나라의 명의로 남풍 지역(현재의 강서성)의 의사였습니다. 5대째 집안 대대로 의료업에 종사한 가문입니다. 증조할아버지 위자미는 지금의 정형외과, 부인과 전문이었으며, 할아버지 위벽애는 소아과 전문, 큰 아버지 위희재는 안과질환 치료로 매우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세의득효방'의서의 저자이기도 한 위역림은 젊어서부터 그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기예술과 많은 전쟁으로 부상이 잦았기에 골상과(현대의 정형외과)에 뛰어났던 위역림의 의학적 성과가 더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그 명성이 황실까지 알려지면서 황실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진료를 거절하며 대신 황제에게 올린 약이 바로 '공진단'입니다. 영종 황제가 복용한 후 만족하게 되어 황실 가족이 애용하게 된 약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하여 후대에 공진단은 황제의 보약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정리하자면, 공진단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황제를 위해 바쳐진 약으로, 중국 원나라 명의 위역림이 '세의득효방'에 기재한 처방입니다.


세의득효방은 1337년 편찬된 책으로써, 1345년 태의원(국립중앙의료원급)에서 재 편찬되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됩니다.


세의득효방에 기록된 공진단의 내용은 그 효능에 대해 극찬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허약체질을 개선하고, 체력을 길러주며, 간 기능을 좋게 하고, 전신의 기혈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최고의 명약
보통 사람들이 장년이 되면서 기력이 떨어지고, 몸이 약해지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약한 것이 아니다. 이럴 때는 성질이 자극적인 한약재는 좋지 않다. 오직 보(補)하는 약을 사용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보약들은 효력이 약해서 효과를 보기 어렵다. 오직 공진단만이 가장 적합하다.

위현 '위씨가장방 <魏氏家藏方>'

위씨가장방은 송나라 위현이 편찬한 서책으로 조부와 부친, 자신까지 포함하여 3대에 걸쳐 의방을 수집·편찬한 것으로 의약 성방이 1051종이고 모두 십 권이라 합니다. 위현이 편찬한 위씨가장방 십 권에 기록되어 있는 공진단의 처방 구성은 '녹용, 당귀, 산수유, 부자, 침향'입니다. 온난자궁(溫暖子宮 자궁을 따뜻하게 해 준다.), 구복능회잉(久服能懷孕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의 효능과 주치가 있다고 하였으며, 50 환을 따뜻한 술이나 소금물로 공심복(空心服)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위씨가장방은 1227년에 편찬한 의서로써, 세의득효방 보다 100년 이상 앞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방의 구성에서 차이가 보입니다. 사향을 침향으로 대체한 것과 부자를 추가한 것입니다. 처방의 구성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위현 역시 공진단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왕구 '시재백일선방 <是斋百一选方>'

시재백일선방의 저자 왕구는 남송 때 의학가입니다. 시재백일선방의 원본은 서기 1196년에 간행되었으며, 조선시대 김예몽의 의방유취에도 왕구의 선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왕구의 시재백일선방 18권의 제26문에 공진단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남송 제4대 왕 영종 때 명의인 손림의 처방, 공진단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처방 구성은 위역림의 공진단과 동일하고, 효능 역시 세의득효방의 내용과 같습니다. (但固天元一氣,使水升火降,則五臟自和,百病自去,此方主之)


위역림의 세의득효방 그리고 위현의 위씨가장방의 공진단보다 시기가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세의득효방 보다 150년 전에 지어진 왕구의 시재백일선방에 공진단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시재백일선방의 저자, 왕구가 선대 의사인 손림의 공진단 처방을 수록했으니, 일단 손림의 공진단 처방이 역사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처방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 공진단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공진단이 알려진 시기는 언제일까요?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세종대왕께서 중국의 의학서적을 인출하는 작업을 명하였습니다. 세의득효방은 세종 7년(1425년)에 총 20권 22 책으로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선조 때 허준 선생께서 동의보감을 편찬하였습니다. 잡병 편 허로문에 공진단이 등장합니다. 내용은 세의득효방과 동일합니다.


<허준 동의보감 잡병 편 허로문 中>

- 아무리 신체가 허약한 사람이라도 공진단을 꾸준히 복용하면 원기(元氣)를 튼튼하게 하여 신수(腎水)를 오르게 하고 심화(心火)를 내리게 하므로 백 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알려지게 된 공진단은, 경종, 정조, 순조, 철종 임금이 복용하셨습니다.


이상 공진단이 기록되었던 과거 중의서들과 한국의 의서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위역림의 세의득효방으로 인해 공진단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이전에도 공진단에 대한 기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위씨가장방은 사향 대신 침향을 넣어 처방 구성에 약간의 변화를 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구하기 어려웠던 사향 대신 비슷한 효능을 낼 수 있는 약재를 찾는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원나라의 명의 위역림이 황제에게 공진단을 처방하면서 황제의 보약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세의득효방이 세종대왕 때 들어와 알려지게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며, 선조 임금 때 허준의 동의보감 허로문에 공진단이 실리면서 처방의 활용도가 더 커졌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공진단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정확한 정보들을 모아 정리하여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공진단에 관한 재미있는 역사들 그리고 효능과 복용방법, 종류에 대해서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공진단에 대해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댓글을 통하여 문의해주시면 친절히 답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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