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내 Sep 21. 2016

힘을 빼고, 가볍게

의미 없는 주저리의 향연 - 근황토크

저장해 둔 글이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다. 애초에 그렇게 많은 글을 쌓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벌써 바닥을 보이는 것일테지만, 생각보다 진전이 없어서 조금 놀랐다. 에디터로써, 회사 직원으로써 열심히 돈을 위한 원고를 집필하는 중인 것을 탓으로 돌려본다.


추석 연휴동안 병원 문이 닫혀있을 것 같아, 스트레스 때문에 엄청나게 빠지는 머리칼을 위해 피부과에 다녀왔다. 회사로 돌아온 후 약 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잡았다. 반드시 물에 먹어야 하는 것은 알지만 눈에 바로 보이는 것이 커피 뿐이라 커피에 먹었다.


추석을 앞두고 미친듯이 일을 최대한으로 많이 끝내둬야 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다만, 어째 일이 손에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7년만에 다시 마주한 오케스트라 합주의 감칠맛과 향수가 그리울 뿐이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도 심포니 연습을 하고 왔는데. 추석 때문에 이번 주 금요일 연습이 없다는 것이 아쉬움을 넘어 슬프기까지 했다.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며 7년 만에 악기를 꺼내든 지 3개월이 조금 넘어가는 요즘, 7년 전에도 취미로 가볍게 배운 악기인데 갑자기 관악기다운 우렁찬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소리의 때깔과 질감이 달라져 재미가 붙어 가는 찰나. 머릿속에는 업무 대신 온통 집에 가서 플륫 연습을 하는 생각만 가득 찼다.


돌고래도 숨을 쉬기 위해 공기 중으로 그 주둥이를 내미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을 손에 잡았다. 클라이언트에게서 진행 중인 업무에 관련된 메일이 왔다. 우선 파일을 다운로드 받고 팀원들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한 뒤 기한을 꼭 맞출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도 빼먹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 후 추석이 끝난 후 업무량에 깔려 숨도 못 쉴 상황은 모면하기 위해 먼저 일을 시작했다. 중학교만 졸업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마음을 좀먹는 것 같았다. 기획을 하고 플랜을 짜는 등 정말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을 하며 한계에 부딪혀 힘든 것보다 매너리즘과 회의감에 사로잡혀 힘든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5초의 연휴가 끝났다. 잠으로 보낸 하루-1초, 먹는 것으로 보낸 하루-1초, 미술관 관람으로 보낸 하루-1초, 놀러 나간 하루-1초,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하루-1초.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보다 다른 이들의 글을 읽는 게 더 재미있어서 거의 글은 쓰지 않고 있긴 하다. 다른 작가 분들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어떻게 저렇게 글을 부드럽게 잘 쓸까, 저런 표현은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글재주야 타고난 것 80, 노력한 것 20 쯤 될테니 노력부터 해야 좀 쓰는 척 정도는 할 수 있겠다마는 진짜 문제는 그런 생각이 연필을 자꾸 내려놓게 만든다는 것이다. 요새 정신 건강도 그리 파란불은 아니라서 글을 쓰면 온갖 추잡한 넋두리 뿐일 것 같아 더 글 쓰기를 망설였던 것도 있다. 이걸 두고 슬럼프라고 하는 건가 싶긴 한데, 뭘 해야 슬럼프가 오기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내가 게으른거겠지. 


꼼꼼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어 원고를 하나 써도 자꾸 묵혀두고 퇴고하느라 글이 완성되는 텀이 길어지는 것 같다. 완벽주의를 버려야 정신병에 안 걸린다던데, 일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완벽주의는 고개를 내민다. 근데 그렇다고 또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느냐, 그것도 아닌 것이 문제다. 그냥 나를 갉아먹기만 할 뿐 딱히 도움되는 것 같진 않다.


조금만 내려놓고 가벼워지기로 했다. 매일 아침 쳐진 영혼에 뽕을 주입하듯 주입한 아이스아메리카노도 그 양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1800원짜리 1리터 커피를 마셨지만 오늘은 제일 작은 사이즈로 주문했다. 씁쓸한 향이 정신을 깨우고 영혼에 마약을 주입하는데, 그 양이 어쩐지 좀 적은 것 같아 괜히 더 쳐지는 것 같다.


나른한 가을의 오후, 하늘은 내 속도 모른 채 맑기만 하다.




플륫이 드디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왜 흔들려서 그런가 봤더니 헤드를 너무 바깥쪽으로 틀어놔서 밸런스가 깨졌던 것. 레슨 선생님께 배웠으면 했는데, 레슨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추석님께서 다가오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유튜브를 찾아보며 연구했다. 이제 가서 안 이상하냐고 물어봐야지. 운지가 좀 더 자유로워져 빠른 곡이 연주된다. 

우리나라 플륫 유튜브 동영상과 외국 플륫 유튜브 동영상의 질적 차이는 딱 국가 별 구글 검색 차이만큼 난다.


바꾼 자세가 아직 낯설기만 하다. 

작가의 이전글 동네 어귀에 자리 잡은 단촐하고 포근한 그 미용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