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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Jan 15. 2024

잘못보고 따를지라도...

요한복음 6:1-15

> 요약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 예수님이 가시니 큰 무리가 표적을 보고 따른다. 예수님은 보리떡 5,물고기 2마리로 5천명 가량의 사람들을 먹이고도 음식이 남는다. 표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를 선지자라 하지만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떠난다.

> 묵상 

예수님이 분명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와서 산을 오른 예수님도 엄청 배고팠을 텐데 예수님은 “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냐?” 물으신다. 

질문의도는 제자들을 시험하고자 하심 이겠지만 어찌되었건 예수님은 자기 배고파서 먹을 것을 채울 생각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 무리를, 그것도 표적을 보고 따르는 무리들을 먹이고 채울 생각을 한다는게 되게 인상적이었다.

표적을 보고 따르는 이들은 뭔가? 결국 자기 보고 싶은 것으로 예수님에게 꽂힌 자들이 아닌가?

그걸 예수님은 아는데도 그들을 먹이신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Q. 나는 무엇을 보며 예수님을 따르나?

전 남편은 외도 후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해 다른 인격체를 가진 이가 된 거 같았다.

나는 그렇게 갑자기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된 한 사람을 보면서 너무 무서웠다. 그는 나에게 우주와 같은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우주를 참 함부로 대했던 거 같다.)

그래서 믿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들어본 적 있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불렀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말이다.

예수에 대해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어서 뭐가 뭔지 모르지만 무리 중 한 명에 속해 있었을 나

그렇게 시작된  신앙생활은 곁에 있는 이들의 색깔을 많이 닮은 신앙생활이었다.

믿음 생활 초반에 그래서 매일 새벽예배에 나가 40일 작정기도를 3번이나 드려서 120일을 채웠고 (비가와도 눈이 발목까지 쌓여도 나갔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의 뿌리를 박고 와야 한다는 말에 물도 안먹는 금식기도도 3일을 했다.

집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찬양을 크게 틀고 손으로 십자가를 그리며 무슨 주문 같은 것도 외웠다. 

당시 신앙생활은 돌이킬수록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이며 평범치 않는 것들 투성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되게 부끄럽거나 싫지만은 않다. 그냥 과정이었던 거 같다. 표적을 따르는 과정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것들을 할수록 성경책의 쓰임이 궁금했었다. ‘저게 하나님 말씀 아닌가? 저거 봐야는 거 아닌가?’ 하면서 혼자 읽긴 했는데 도통 말투로 어렵고 그것에 대해 지도하는 이는 주변에 없었었다. 

그러다 금식기도원에 있을 때 아는 언니가 김양재 목사님 간증을 보내줬다. 

요약하자면 말씀이 자기 삶에 임했고 성경이 자신의 삶을 읽어 내려 갔다는 것이었다. 

듣고 있는데 어느 포인트에서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겠는데 눈물이 막 났다.

간증을 보내준 언니가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우리들교회 휘문 사진이였던 거 같다.) 가족들이 다 살아났데.”라고 말했다.

그렇게 난 우리들교회에 왔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보게 되었다.

물도 안먹는 금식이나 이상한 주술, 새벽예배와 작정기도는 지속성도 떨어지고 내 삶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큐티를 하는 것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일단 말씀을 보니 살 거 같았다. 

우리들교회 오기 전의 신앙생활이나 그 후의 신앙생활이나 이상하건 아니건 예수님을 따름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방법이 달랐던 거 같다. 

그래서 한동안 착각을 했다 우리들교회에 와 말씀을 보니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보다 나은 사람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알게된 건 “여기 가족들이 다 살아났데?” 이 말을 나는 “전남편이 돌아와 너는 행복하게 잘먹고 잘살게 될 것이다.”의 결론으로 해석했었고 나는 결국 말씀을 보지만 표적을 따르는 자였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평생 그렇게 표적을 따르는 자일 거라는것도 알게 된 것이다. 그게 가장 은혜로운 지점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닐거야.’하는 것이 내가 가진 영역이라는 걸 알고 회개할 수 있게 된 것 말이다.

표적을 보고 따르는 이들이나 예수님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되게 확 차이가 나보이지도 않는다. 

빌립도, 안드레도 ‘부족’을 얘기한다. ‘이게 되겠어?’같은 거다.

그렇게 나도 우리들교회에 다녔고 떠난 후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부족을 더 먼저 본다.

오늘은 ‘내 남편의 답답함밖에 내가 못가진’ 사람 같아서 ‘하, 이런 남편이랑 사는데 내가 순종이 되겠어?’하는 식으로 나는 매일의 “이것밖에” 혹은 “이것으로?”하는 의심과 불신을 먼저 만난다.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니 욕망의 기준만큼 채워지지 않으면 채움이 없는 걸로 여긴다.

오병이어 말씀은 막내를 임신한 걸 확인했던 날 누가복음을 통해 주신 말씀이다.

‘나는 앞으로 배가 불러올테고 그러면 이겨가던 소송은 지거나 합의를 해야 할테고 진안에선 모두다 나를 혼외임신한 자라고 생각할텐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먹고 남는다고? 대체 어떻게?’라면서 허탈해 했다. 

그런데 막연하게 ‘이 아이를 낳으면 깜깜한 길들을 하나님이 밝혀 채우시겠구나.’하는 실날같은 믿음이 있었고 그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빛이었었다.

그리고 난 우리 가정이 그것의 증거물이 되었다 생각한다. 

여전히 매일의 부족이 먼저 보여 의심하고 불신하는 나같은 사람 일지라도 열두 바구니에 채운 주님의 사랑과 채우심의 증거물 말이다. 감사하다. 그러니까 정재성한테 오늘 잔소리는 그만해야지.

> 삶   

    여보와 나의 다름을 통해서 여보를 구박하지 않는 것 (주간예산도 중요하지만 예산에 안잡은거 사달라고 했을 때 비난하지 말자. 나도 예산에 안잡은거 사놓고 나한테는 침묵하고 남편한테 소리내는거 너무 비겁한 듯)  

    매일을 나의 욕망이나 표적을 따라 주님을 섬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 기도 

주님, 제가 들었던 예수님이 있어서 무리에 속하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표적만 보고 가다가 표적을 보고가지 않는 자라며 스스로 교만했던 저를 결국 나도 표적을 볼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그래서 주님이 필요한 것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욕망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채워주지 않은거라며 의심과 불신을 마주할 때에 눈을 열어 볼 것을 보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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