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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Jan 19. 2024

폐쇄성이 갖는 성질

요한복음 6:60-71

20240119금 / 요6:60-71


> 묵상

예수님은 무리에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하셨다. 

말씀이 너무 어려웠는지 제자들도 어렵다고 얘기한다. 그러니 무리의 사람들 또한 예수님의 말이 어려웠을 것 같다.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을 아시고 묻는데 묻는 질문이 “이 말씀 어려워?”가 아니라 “이 말씀이 걸리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그것을 offend라고 표현했다.

결국 사람들에게 말씀이 어려웠던 건 말씀이 마음이 불편해서 였다는게 어이가 없다.

그렇지만 예수님도 어쩌겠나 불편해도 그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어서 하신 것을 

불편할 지언정 예수님은 살리는 말을 하신다. 


Q. 나의 오늘의 중심은 생명인가?


오늘 나처럼 전 교회를 나온 자매와 얘기를 했다. 그러곤 종일 마음이 뭐랄까 고요하고 잠잠치 않았다.

특별히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 왜이리 마음이 잡히지 않는가? 생각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실수도 잘하고 해서 (이미 한 듯 하지만;;) 마음의 고요를 위해 집안일을 했다. 

집안일 할 때 잠시 좋다가 다시 마음이 어딘가 떠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또다른 몰입할 거을 찾기위해 공부를 했다. 그런데 쉽게 마음이 고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씀을 보는데 ‘아!’하는 탄성 같은 것이 나왔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자매가 겪은 일, 내가 겪은 일들을 놓고 봤을 때 

내가 경험했고 느낀 것들이 거짓되고 엄청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교회에 대해 들었을 때 ‘역시나’하는 마음이 들면서 날 지배한 감정은 굳이 분류하자면 쌤통 같은 거였다.


교회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의 피 이후에 세워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제자들과 초대교인들이 어떻게 했나? 

그런데 나는 주님이 안타까워하고 사랑할 교회를 두고 쌤통이다 하는 감정만 느낀거다.

‘야, 너네 꼴좋다. 내가 그때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너네 되게 이상해.’ 같은 거 말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반응이야말로 이상한거 아닌가? ㅠ _ ㅠ 

나는 이전 교회를 아픔으로 혹은 애정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일을 경험했고 그렇기에 슬프고 힘들 수 있지만 나는 이전에 다니던 교회가 마치 망하기를 바랬단 생각이 든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6:66)


교회는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하지만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어서 온전히 예수님의 모습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나는 ㅇㅇ교회는 리더가 어떠해서, ㅇㅇ교회는 성도의 사건하나 소화 못해서 등등의 이유로 교회를 떠나가는 자였다. (66)

언젠가는 ‘이렇게 내 기준에 교회가 맞지 않는다고 교회만 옮기다간 나는 결국 교회는 평생 못다니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적도 있었다. 


그래도 감사하게 교회는 옮길지언정 주님은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이해되지 않고 힘든게 많았지만 이전 교회를 3년동안 떠나지 않았고 

떠나지 않고 싶다고 내 교회라고 그러니 주님 제발 내가 힘들어도 이들 속에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시댁에 생겼고 어디든 이동이란 이동과 변화란 변화는 싫어하는 남편이 교회를 옮기자고 했다.

솔직히 어이도 없었다. 내가 죽어라 힘들때는 한번만 더 옮겨보라고 그럼 자기는 가나안 성도가 될거라고 협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나는 우리들교회 설교를 듣고 교회를 옮기는 것에 묵상할테니 너는 알아서 하라는 남편

(대체 왜 다니던 교회 설교 놔두고 우리들교회 설교를 듣고 묵상하겠다는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렇게 나는 다시 이곳에 왔다.

처음 왔을 때는 정말 남편을 위해서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수록 나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쉽게 떠나가는 이들처럼 행동했는지 알게 하신다.

이전에 가졌던 질문들이 이제와서 이해되는 것들이 생기면서 더 그렇게 느껴진다.


예수님은 너희 중 한 사람이 마귀라 한다. 가롯유다를 놓고 하는 얘기다.

“그래. 넌 마귀같은 놈이니까 마귀 역할만 하다 가라.”하고 가롯유다를 부르셨겠나?

가롯유다를 부르면서 그가 자신을 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렇지만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자살했다. 결국 자신의 일을 회심할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누구나 다 마귀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마귀같은 행동을 자기 삶의 마지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기 삶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은채 스스로 닫아버린 폐쇄성이 낳은 잔인함 같다.


나또한 유다처럼 얼마나 가능성을 닫았나.

내가 만난 리더 중 마음에 안드는 이들, 그리고 이전에 다니던 교회의 가능성을 나는 닫아버린 자였다. 

스스로 닫아버린 폐쇄성을 가진 마귀가 나일 수 있음을,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무나도 안타까워

나를 유다처럼 만들지 않기위해 강력하게 끌어 당기신 거 같다.


> 삶

1.회개기도

2.사건과 관계로 가능성을 닫아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


> 기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마음이 불편하면 떠나는 이들 속에 제가 있을 수 있음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눈물 흘리실 교회를 향해 저는 거봐라 늬들이 그렇지뭐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마귀 같은 생각을 가지고 행동했을 지언정 그것이 저의 마지막이 되지 않길 기도합니다. 제게도 타자에게도 주님이 일하실 가능성을 닫아버리지 않게 저를 인도해 주세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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