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라는 걸 말할 수 있다는 축복
20250129.수 / 눅 5:27-39
> 묵상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25)’
당시 죄인 취급 받아왔던 세리를 예수님이 부르신다.
그는 사회안에서 받는 취급 만으로도 빈 배를 경험하고 있었을 거 같다.
그러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8)’한다.
사회적으로 죄인이라 인식되는 자에게 다가가 배제가 아닌 사랑과 포용을 보이시는 예수님
결국 그의 죄를 회개케 하시겠지만 이전에는 다가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관계를 맺으신다.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는 예수님을 알게 되고 ‘…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29)’가 된다.
예수님이 다가와 손을 내미시고 그 손을 잡자 관계의 지경이 넓어진다.
세리 뿐 아니라 세리를 배제했을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리와 함께 앉아 있는다.
어젠 우리들교회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회의 자매들 생각이 많이 났다.
선교단체에서 시작했던 작은 교회였고 서로 가까이 모여살며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들이 참 좋아 보였다.
내부에 존재하던 이들에겐 자신들의 문턱이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외부에서 온 자에게는 문턱이 높아 보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친해지고 팠고 그들과 함께 앉아 있고 싶었다.
교회를 나오기 전 쯤에는 이사를 계획해 그들과 가까운 곳에 살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였었다.
예상치 못하게 작은시누의 죽음이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고,
우린 닥친 일들을 감당하기에도 힘이 부족했다.
함께 앉아 있는 이들의 말과 손이 필요했지만 너무 큰 일에 그들은 어찌할 줄 몰랐던 건지 함께 앉아 있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세리는 예수님을 접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얼마나 기뻤을까?
죄인 취급 받던 자신과 친구가 되어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관계의 벽이 허물어졌다.
네가 세인이었건, 네가 세인인 나를 지적하는 이였건 그런것들은 괜찮다는 듯이 그들은 함께 앉아 먹고 마셨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요한의 제자들과 비교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34)’
예수님이란 신랑을 얻었으니 어찌 금식하겠나 즐겁고 기쁜데 먹고 누려야 하는 순간들이지 않나?
우리들교회에 다시 돌아오고 이전 교회에 한 자매와 연락을 하다 그 자매도 우리들교회로 오게 되었다.
나는 사건에 휘말려 빠른 시간안에 옮겼다면 그 자매는 1년이란 시간 가까이를 양쪽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서서히 옮기게 된 케이스였다.
옮길 때까지는 어느 교회에 갈지 몰랐지만 결국 새해를 기준으로 옮긴 듯 보였다.
내가 나왔고, 그 자매의 가정이 방문자로 우리들교회로 오고 교회 옮기는 것에 대해 고민할 때
이전 교회에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알 수 있다. 그 자매도 나처럼 ‘내가 세인이었노라.’ 혹은 ‘나는 너를 죄인이라 지적하던 자노라.’하던 자라는 것을 나눌 수 있는 기쁨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우리와의 관계를 허물고 포용해 함께하시는 예수님같은 공동체가 있다는 것
그 자매도 그 자매의 남편도 말못할 고통을 안고 나눌 곳 없었는데, 나누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에 나의 모습도 있다.
아직 당시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고 그들을 떠올리면 ‘너희들이 나랑은 벽을 세우더니 너희끼리는 먹고 마시니?(33)’하게 된다.
결국, 난 그 곳에 소속되지 못하는 외로움을 겪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그들의 탓을 하고 싶어 하는 거 같다.
예수님은 오늘 그런 이들이 지적하는 제자들을 신뢰하는 표현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5)’
그것이 내가 진짜 그 교회를 사랑했다면 보여야 할 태도였던 거 같다.
그들도 내게 그런 태도를 보이지 못했지만 나도 그랬다.
당시는 나 하나가 자매 전체에게 어떻게 그러나? 자매들이 다가와 줘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홀로 먼저 다가와 관계를 맺어 전체를 만드신다.
하지만 난 나약했고 바라기만 했다.
바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건강함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여러번의 중보기도 요청이 거부당하는 듯한 느낌을 통해 소외감을 느꼈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들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을 알고 있다.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것을 동의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한 영혼을 사랑하고 벽을 허물고 배제를 위해 움직이지 않음을,
배제처럼 보이고 그 방식이 내가 생각하는 방식하고도 전혀 다를 때가 있지만
우리가 함께 웃고 먹어야 할 때와, 우리가 금식하며 울어야 할 때를 성령께 도움을 구하며 분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없던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건 개인적으로는 내게 중요한 핵심이슈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증거의 열매다.
묵어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할 수 있길 기도한다.
> 삶
이전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두고 기억날 때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동생네 오면 즐겁게 먹고 마시며 시간 잘 보내기 (조카도 좀 봐주고)
> 기도
주님, 죄인된 저를 부르셨으니 제가 많은 사람과 함께 앉아 그들의 이웃이 되길 기도합니다. 벽을 세우지 않고 배제하지 않길 기도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게는 이전 교회에 대한 상처로 그 교회에 대한 많은 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고 있음을 고백하오니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고질적으로 존재하던 리더와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조금씩 변화되어 감을 느낍니다. 주님,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신뢰처럼 저도 지체들을 신뢰하길 기도합니다. 그들의 인격이 아닌 성령의 인도를 신뢰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때론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때라고 섣불리 정죄하고 판단치 아니하고 기도하며 지켜볼 수 있는 힘을 제게 허락해 주세요. 그리고 그 교회가 저를 비롯해 나간 이들이 느낀 것처럼 그들만을 위한 교회라고 느껴지지 않기를 보고 알고 갈 수 있길 그래서 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