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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Jan 08. 2022

우리는 왜 설악산에 간다고 했을까

긍정의 서재 영화 <인투 더 와일드>

여름, 설악산으로 떠났다

  7월 둘째 주, 남자 친구 엽이와 함께 설악산 산행을 계획했다. 작년 6월, 산악회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을 다녀왔던 기억이 즐거웠기 때문이었을까. 더운 날씨에도 흠뻑 땀을 흘리고 먹는 간식과 고단한 산행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거리두기와 재택근무로 일상이 무료해진 탓도 있었다. 서울 근교 지하철 역 앞에 모여 리무진 버스로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주고, 데려다주는 안내 산악회를 통해 가는 걸로 정하곤 35,900원을 입금했다.

 작년 지리산 때는 장거리 산행이 처음이라 출발하기 일주일 전부터 등산 코스를 찾아보고, 가져가야 할 준비물 목록을 빼곡히 적었는데. 두 번째 장거리 산행이라고 안일했다. 떠나는 당일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등산 코스를 찾아보았는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 설악산을 가자고 결정할 때의 호기로운 마음과는 다르게 운동을 게을리했던 탓이 컸다.

 등산 유튜버 제이썬에 말에 의하면 웬만한 초보는 갈 수 없는 코스가 공룡 능선이라고… 그래서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멋진 만큼 힘든 코스라고 엽이에게 얘기하자 그만 보라며, 너무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산행은 9일 밤 11시 50분 복정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출발해 3시 반에 설악산 소공원 입구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하고, 공룡능선을 타고 다시 소공원으로 오후 5시까지 회귀하는 24km에 달하는 코스였다. 지난 지리산 코스가 12km였던 걸 감안하면 너무 힘든 코스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엽이의 말을 믿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새벽부터 시작할 등산에 전날 밤 잠을 푹 자 둬야 했는데, 너무 신이 난 상태라 거의 잠을 못 자버렸다. 전날 밤, 테니스 수업을 듣고 부랴부랴 이마트에 가서 간식을 사고, 집에 오니 9시, 씻고 간식을 준비하니 10시, 한 시간만 눈을 붙이고 11시에 택시를 잡아타 겨우겨우 복정역에 도착했다.

여름의 설악산

소공원에서 출발해 되돌아오는 20.9km 코스

새벽 3시 반, 설악산 소공원 입구에서 등산화를 조여매고, 산행을 시작했다. 리무진 버스는 사람들이 각자 선택한 코스에서 한 번씩 사람들을 내려주었는데, 우리가 가는 코스로 함께 가는 일행은 우리 외에 단 1팀뿐이었다. 키가 작은 엄마와  키가 큰 아들이었다. 둘은 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우리가 처음 설악산을 탄다고 했더니 안내 산악회의 대장님이 초반 4km 정도를 함께 동행해주었다. 건강한 안색에 민머리, 웃을 때 보이는 팔자 주름이 만화 <드래곤 볼>의 무천도사를 연상케 했다. 모자 위에 렌턴을 켜고, 오랜만에 잡아본 등산 스틱을 쥐고 걷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말에 마스크를 벗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시 강원도는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였다.) 비가 막 그친 듯 시원한 바람과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났다. 빠르게 발맞춰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무천도사 님은 60대의 나이로, 안내산악회의 대장 일은 소일거리로 하는 거라고 했다. 본업은 통신사에서 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평소 등산을 좋아해 미국, 네팔, 일본 등 안 다녀본 산이 없을 만큼 엄청난 등산 마니아였다. 오랜만에 대화가 가능한 멋진 어른을 만난 것 같았다.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는데 최근엔 드론으로 촬영하는 재미에 빠져있다고 했다. 그에게 오늘 등산에서 걱정되는 점을 재빠르게 물었다. 산행 중 뱀이 나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산행을 계속해도 되는지, 식사는 언제 해야 하는지 등 장거리 산행에 초보인 나는 인터뷰를 하듯 재빠르게 질문을 쏟아냈다. 무천도사 님은 뱀은 사람을 싫어해 알아서 피해가 만날 일이 드물 것이며, 비가 쏟아지면 챙겨 온 우비를 쓰면 될 것이고 식사는 앉아서 오래 하기보다 걸으면서 행동식으로 배를 채우라고 일러주었다. 그의 답변을 들으니 내가 걱정했던 것들이 간단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걱정한 문제들보다 되려 문제는 내 체력이었지만.

 그와 경사진 돌계단을 앞두고 헤어지자마자 내 에너지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무천도사의 눈에 허접한 등산 초보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썼기 때문이었다. 타인에게 모든 면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그와 동행할 때는 힘든 내색도 없이 산을 올랐다. 빈 속에 점차 눈앞이 아득해져 그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함께 시작한 모자와는 빠르게 멀어졌다.

후회는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밀려온다

 빵과 주스로 요기를 빠르게 하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사위는 밝아졌다. 어느새 산 중턱에는 올랐는지 거대한 바위가 점차 눈에 띄었다. 멀찍이 보이는 능선이 설악산에 온 실감이 났다. 숨이 가빠질수록 다리는 붓고, 피로가 몰려왔다. 속도가 점차 느려지면서 사람들은 우리를 앞질러 갔다. 해가 떴고, 속초 시내가 멀찍이 보이는 중턱에 이르러서야 도시락으로 챙겨 온 초밥과 토마토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리 잡은 옆에 중년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 친구들이 어떻게 이런 데 왔냐고, 기특하다며 우리 집 아들은 이런 데 가자면 질색을 한다면서 가져온 토마토와 참외를 나눠 먹으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등산의 즐거움은 도시락에 있었다. 맛있는 음식은 도심에서 먹어도 맛있지만, 땀 흘리고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먹는 맛은 한층 꿀맛으로 느껴졌다. 거기다 매번 서울 근교에서 내려다볼 때는 아파트만 빼곡했는데, 강원도에 오니 바다가 보이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다. 집에서 산행 시 먹을 간식을 싸면서 엽이와 등산의 묘미는 뭘까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나는 등산이 어릴 적으로 돌아가 모험을 하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생존에 필요한 물과 간식을 가방에 챙겨 넣고, 산속으로 들어가 모험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모험을 성공한 사람처럼 뿌듯했다.

 그런데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오르막을 오르며 출발하기 전에 얘기했던 등산의 좋은 점이 아득해져 버렸다. 그저 '내가 왜 이 고행을 한다고 한 걸까', '엽이는 왜 이 코스를 할 수 있다고 했을까', '내 가방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 그런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을 때 점심을 먹을만한 중간 지점, 마등령에 도착했고 우리는 가방을 풀러 자리를 잡았다. 허기진 우리는 정신없이 차가운 김밥을 입안에 넣어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웅장한 운무를 만났을 때

 문제는 가방에도 있었다. 대체로 오늘 등산 온 이들의 가방은 우리 것과 다르게 30리터 내외의 작은 크기였다. 남자 친구 엽이는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할 만큼 강한 지구력과 근력을 가진 탓에 80리터 가까이 되는 백패킹용 가방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나도 따라 65리터 오스프리 백패킹용 가방을 들고 간 것이 실수였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무천도사 님이 왜 이렇게 큰 백팩을 메고 왔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한테 위화감 주려고요"하고 웃으며 대답했는데, 그 가방의 무게가 점차 내게 설악산을 온전히 느낄 수 없게끔 위화감을 조성했다.

 어쩌면 새벽 식사를 걸러 이렇게 힘든 것일지도 몰랐다. 버스가 복정역에서 출발한 뒤 고속도로를 달려 버스가 강원도 초입,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가 분주히 내리더니 새벽 영업을 하는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주문했다. '새벽에 웬 식사?'하고 생각한 엽이와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고, 스트레칭하고 버스에서 휴식을 취하며 출발을 기다렸다. 그런데 거기서 식사를 해야 정상까지 든든하게 올라갈 수 있는 거였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사전에 꼼꼼히 다녀온 후기를 살펴보지 않은 우리는 식사를 걸러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

 마등령에서 식사를 끝낼 때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점차 굵어졌는데, 우리는 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챙겨 온 우비와 레인커버를 가방에 씌운 뒤 산행을 계속했다. 산행 중 비가 온 건 처음이었는데, 그도 그 나름대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우비는 비를 잘 막아주었고, 울창한 나무들이 비를 잘 가려주어 생각보다 비에 많이 젖지는 않았다. 다만, 우비 안으로 자꾸만 습기가 차 우비 단추를 잠갔다 닫았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능선 쪽에 다다랐을 때 웅장한 운무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광경이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 그곳에 잠시 멈춰 서서 우비를 접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우중 산행은 또 이런 새로운 매력이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뒤로는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이었다. 공룡 능선의 이름이 공룡의 뾰족뾰족한 등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계속해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다 보니 스틱을 계속해서 접었다 폈다 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게다가 철봉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 구간은 어찌나 많은지 웬만해서 산행 중 철봉 타는 걸 무서워하지 않던 난데, 양쪽으로 난 철봉에 매달려 발밑으로 경사가 아득한 내리막으로 내려가야 할 땐 살짝 식은땀까지 났다.

떡 하나로 은연중에 쌓이는 동지애

 그 구간을 건널 땐 노년의 등산 무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행을 함께 했다. 70대로 보이는 할머니 여럿과 할아버지가 이끄는 모임이었다. 얼마나 정정하신지 철봉으로 내려오는 구간도 근육이 선 팔에 힘을 주고 한 발 한 발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체력에 감탄했다. 먼 미래의 나의 노년도 저들의 모습과 닮아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등산을 하다 보면 비슷한 구간에서 계속 마주치는 무리와 말을 한마디씩 건네면서 친분이 쌓이는데, 서로를 응원하며 동지애 같은 게 은연중에 쌓였다. 언급한 이 노년 무리와는 함께 철봉 구간을 건너고, 오르막을 오르내리면서 비슷한 구간에서 쉬었다. 우리가 둘이서 물을 마시면서 쉬고 있으면 떡과 바나나 같은 간식을 나눠주었다. 그때 나눔을 받은 떡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딱 배낭 어깨 끈 아래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산행 중 쉽게 꺼내 먹기 좋은 크기였다. 쑥향과 팥 앙금의 조화가 절묘했는데, 그때 먹었던 맛이 산을 내려온 뒤로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노년 무리하고도 인사를 나눈 뒤, 그 뒤로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무한히 반복됐다. 내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지자 엽이는 나를 훈련시키려고 마음먹었는지, 끝도 보이지 않는 오르막을 뛰어올라갔다. 내 위로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내 뒤로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첩첩산중이었는데, 의지할 곳이 나밖에 없어지자 힘들어서 울상인 얼굴로 그와의 간격을 줄이는 데만 집중했다. 한걸음 한걸음 올라갈수록 거대한 바위로 둘러싸인 오르막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거대 바위에 감탄할 새도 없이 어디까지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엽이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르막 정상에 다다르면 작은 다람쥐들이 모여 우릴 반겼다. 그는 먼저 도착해 쉬고 있다가 조금 있다가 금방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속으로 내가 가자고 제안했으면서 '엽이는 왜 날 여기까지 데려왔지' 싶은 생각에 원망스러웠다.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어 조용히 마음을 숨긴 채 산행을 계속했다. 예상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은 탓에 쉬는 것도 줄이고, 방전된 체력과 정신력에 사진 찍는 것도 다 귀찮아져 버렸다. 그저 빨리 이 길고 긴 산행이 끝나길 바랐을 뿐이다.

귀인과의 만남

 우리는 잠깐 쉬었다 가기 위해 희운각 대피소를 목표로 걷고 있었다. 오르막이 끝나고, 희운각 대피소와 우리가 돌아온 마등령, 앞으로 내려갈 비선대 표지판 앞에 도착하자 시계는 어느덧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 속력이면 5시까지 버스 타는 곳까지는 무리다 싶었다. 무천도사 님께 전화해 제 시간 안에 도착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만약 늦으면 버스에 두고 내린 물건은 식당에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출발할 때 만났던 한 아저씨가 희운각 대피소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를 보면서 반가운 듯 “어 아까 만났던 젊은이들이네.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하고 물으셨다. 우리는 올라오는데 시간을 많이 지체한 탓에, 도착 예정시간보다 늦어서 버스를 놓칠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말을 건넨 그는 주말마다 설악산에 온다는 등산 고수였다. 지난주에는 비가 와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다시 돌아내려 왔다고, 설악산 공룡 능선이 초보자가 오기엔 쉬운 길이 아닌데, 어찌 오게 되었냐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다른 산악회를 통해 왔다며, 자신이 탄 버스는 5시 30분까지 도착하는 스케줄이지만, 자신과 같이 내려가면 5시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얼떨떨했지만, 일단 희운각 대피소를 지나쳐 비선대로 바로 하산하기로 경로를 바꾸기로 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하산 시작서부터 뛰어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 가 고민했다. 아저씨가 왠지 천천히 하산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하산 초반에 무리하게 내려가다 보면 발목이나, 무릎에 하중이 많이 실릴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 내려갔다 싶으면  뛰어내려 갈 예정이니 참고하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틱을 접고 곧 있으면 뛰어야 한다고 언질을 주었다.

 그가 앞장을 서고, 중간엔 내가, 내 뒤엔 엽이가 한 팀을 이루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던 나는 과연 뛸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그의 속도에 따라 계단은 몸을 45도 틀어 뛰어내려 가고, 평지나 다리가 이어지면 빠른 그의 발걸음에 맞춰 뛰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전까지 아프던 발의 통증도 잊은 채 빠르게 그의 발걸음만 보면서 뛰는 나를 발견했다.

 엽이는 그전까지는 지쳐서 계속해서 발이 아프다고 했던 내가 그를 만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뛰어내려 가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살기 위해 뛰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아니면 이 첩첩산중에서 낙오될 것이 뻔했기에 발이 아팠던 것도 잊고 비가 내려도 개의치 않고, 손목에 벌이 쏘여도 지체할 시간 없어 그가 괜찮을 거라고 하면 그 말을 믿고 잽싸게 뛰었다.

 

비선대로 하산하는 길, 천당폭포를 지났다

 결국,  덕분에 하산하는  마지막 남은 계곡에서 물에 발도 담그고, 가방에 남아있던 참외와 간식, 물로 에너지를 채우는 여유까지 가질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도덕'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우리에게 짧은 소개를 했다. 매일 몽촌토성에 있는 공원을 3km 뛰면서 운동을 한다고 쉬는 중간중간 짤막하게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그와 함께 마침내 소공원에 도착했다. 그는 우리가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분단위로 시간을 재가면서 정확히 5시에 맞춰 집결지 위치까지 도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덕분에 버스도 놓치지 않고, 안전하게 산행을 마칠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어디 산행 가서 마주치면 모른 척하지 말라고, 택시비만 내주면 고맙겠다고 인사를 나눈  빠르게 사라졌다.



https://g.co/kgs/gkmvih

 엽이의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화 <인 투 더 와일드>는 1992년 미국의 한 청년인 크리스 맥켄들리스가 대학 졸업 후 전재산을 기부한 뒤 야생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의 부모는 그가 하버드 법대로 진학해 세속적인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런 부모가 기대하는 것과 달리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떠난다. 그는 최소한의 생필품을 백팩에 메고 떠도는 하이커가 된다. 결국, 북아메리카를 건너고, 알래스카의 동쪽 테클라니카 강 줄기 근처에서 버려진 버스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홀로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가다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속 주인공 크리스 맥켄들리스의 마지막 모습은 자신이 살고 싶어 했던 대로 세속을 떠나 자연에서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데서 성공한 모습이다. 자본주의로 인한 넘쳐나는 물질의 과잉으로부터 벗어나 최소한의 식량과 물건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실험하는 과정에 의의를 두었으니까.

 그렇지만,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법. 결국 그는 사냥에 실패하고, 먹을 것을 찾는데 실패해 점점 더 말라간다. 그와중에 식용이 아닌 식물을 먹어 복통을 호소할 땐 이미 주변에 도와줄 사람은 전무하다. 설악산에서 만일 우리도 그 아저씨의 도움을 거부하고, 엽이와 나 둘이서만 가능할 거라고 자신했으면 아마 그날의 하산은 그토록 빨리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산행에서 돌아온 뒤로 우리는 버스에서 죽은 듯 잠이 들었고, 꾀죄죄한 몰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일 영화 속 주인공 크리스도 길 위에서 만났던 이들의 도움을 적절히 받아 가면서 자급자적의 삶을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생을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모두 타인의 도움이 절실한 존재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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