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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섷잠몽 Jun 25. 2022

스타벅스에서 쓸 수 있는 글이라면


 저는 글을 쓸 때 가끔 스타벅스에 가곤 합니다. 지금 이 글도 메이드 인 스타벅스, 메이드 바이 이현석이란 딱지를 붙이고 생산됐죠.


 혹시 왜 스타버스냐고 물으신다면 따져볼 게 많습니다. 인테리어, 넓은 공간, 감미로운 음악, 서비스와 음료의 질. 하지만 일일이 따지기엔 머리가 좀 아픕니다. 사실 저 중에 해당되는 이유는 넓고 탁 트인 공간밖에 없죠.

 제가 스타벅스에 가는 진짜 이유는 에너지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어딘가를 가면 그 지역의 스타벅스를 찾아갑니다. 인테리어나 서비스는 어디든 동일하지만 그 지역만의 기운이 있거든요. 어떤 곳은 취준생이 많아 조용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번화가 쪽은 많이 시끌벅적하죠. 교외에 드라이브 스루를 끼고 있는 스타벅스는 노인층이 많습니다. 차분한 편이죠. 그런 곳에 가면 왠지 몸이 나른해져서 푹신한 공기에 감싸진 느낌을 받곤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을 가나 꼭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분들이죠. 노트북을 펼쳐들곤 글을 쓰든, 음악 미디 작업을 하든,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든. 그런 분들이 꼭 있습니다. 물론 PPT나 레포트를 작성하는 대학생들도 많죠.


 저는 그런 분들과 있으면 어떤 에너지를 얻습니다. '어어?? 뭐야 뭐. 이 분위기 뭔데. 아 취한다. 취해서 아니 쓸 수 없잖아. 그 에너지에 취해서 무언가를 마구 쓰고 싶어지죠.


 그리고 동질감도 느낍니다. '당신이랑 나는 같은 일을 허는 거야. 나는 당신 덕분에 위로와 응원으로 받고 있어.


 



 스타벅스에서 쓴 첫 소설이 떠오릅니다. 그곳은 외진 곳이었죠. 아파트 밀집 지역에 위치했는데 크기가 작았죠. 특이한 점은 주부가 많았다는 겁니다. 주변에 대학가도 없고, 제가 갔던 시간이 점심 직후여서 대화를 나누는 주부들이 많았죠.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노트 펴들고 만년필로 글을 쓰는 건 저 밖에 없었죠. 만년필이라는 특별함 때문에 힐끗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금은 민망했죠.


 사실 그땐 좀 예민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신춘문예를 끝낸터라 모든 걸 불태우고 재만 남은 상태였죠. 쓸 기운은 남았는데 뭘 써야 할지, 몇 개월 동안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런 걸 쓰고 싶어' 하는 소재들이 수 십 개는 되었는데 한 두 문장 쓰고 펜을 놔버렸죠. 머리 속이 넷플릭스 같다곤 할까요.


 그 날도 그런 예민함을 펜끝에 달고 있었습니다. 햇빛이 내리쬐는 두 시경.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경종처럼 아이가 울었죠.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갓난 아이 울음 소리는 들을 기회가 적죠. 유튜브를 켜고 들어보세요. 진화적으로 부성애 모성애를 자극하지만 소리만 놓고 보면 끔찍합니다.(저는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걸 예만한 상태에서 들으니 정말 듣고 있기 힘들었습니다.


 아기는 계속 울었습니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멈추지 않았죠. 한 15분 정도를 울었을까요.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어떤 중년 아저씨가 다가오시는 거에요. 엄마는 웃으면서 경계했죠.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었어요. 그러면서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달라고 부탁해요.


 어떨결에 아이를 건네는 엄마와 아기를 안은 아저씨. 그 순간 모두가 숨죽였어요. 아저씨는 경계와 걱정의 눈빛에 아랑곳 않고 아이를 흔들었죠. 천천히 부드럽게. 저는 그 순간에 빨려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저씨의 품에 안긴 아이 때문일지 몰라요. 아이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잠들었죠.


 모든 게 평온을 되찾고 아기와 엄마는 좀 더 머물다가 갔어요. 사람들은 다시 차분해졌고 아저씨는 누군가를 기다렸죠. 바로 그 순간을 눈에 담으며 제 안에서 무언가가 연결되기 시작했어요.


 스타벅스, 아무리 달래도 우는 아기, 경고하듯 울려대는 울음소리, 갑자기 나타난 중년 신사,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의 뒷모습.


그 이미지들이 그동안 제 안에 있던 무언가에 스며들어서 잠을 깨웠어요.



 

 중년 신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는 30년 전 설악산에서 자신이 구해준 사람이죠. 보통은 그 사람이 중년 신사에게 연락하고 했는데 처음으로 중년 신사가 연락한 거였어요. 손주를 죽이기 위해.


 남자를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아이가 울기 시작해요. 엄마는 보이지 않죠. 걱정스러운 마음에 정원과 손님들이 모여들지만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아요. 순간 무언가에 이끌리듯 중년 신사는 아이에게 향해요. 아이를 건네받아 달래죠. 아기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30년 전 그날의 일을 떠올려요,


 그 남자는 설악산 깊은 곳에서 조난 당하죠. 다행이 중년 신사가 구조해요. 대설주의보가 울리고 둘은 할 수 없이 그 곳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내죠. 얘기를 나누던 중에 남자는 구원을 얻었다면서 얘기를 시작해요.


 온나라가 가난한 시절, 그는 그 중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딸린 자식은 아홉이었죠. 그런데 열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사지가 없었죠. 자신의 어머니는 병신새끼를 낳았다며 며느리를 때리고 아이들은 울어요. 남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내가 자식만 낳다 죽는 돼지처럼 보이고,  그 아니를 돼지로 만든 자신을 욕하고, 이제 열 번째 아이는 어떻게 건사해야할지 막막해지죠. 그래서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아주 오래전 노인들을 버렸던 고려장 장소에 아이를 두고 와요.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그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낭떠러지에서 죽으려다가 중년 신사를 만나거에요. 폭설이 멈추고 아침이 되어 돌아오는 길. 중년 신사는 그 남자를 신고 할까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남자의 표정이 너무 밝았죠. 꼭 구원을 받아 새 삶을 얻은 사람 같았어요. 그에게 딸린 아홉 자식과 가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중년 신사는 그 일을 묻어요.


 하지만 회상이 끝나고 중년 신사는 결국 스타벅스를 뛰쳐나와요. 자신의 품에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죠. 그 길로 자신의 딸에게 전화해요. 자기 손주가 보고 싶다고. 딸과 아버지 둘 모두 무너져 눈물을 흘리죠.




 간략하게 전해서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뭐랄까 이 소설로 제가 가야 할 방향을 보게 됐어요. 당시에 '이기적 유전자'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빠져있었죠. 유전론, 진화론을 죄의식, 출생, 인간의 존재 같은 무거운 주제와 엮어서 쓰고 싶었어요.


 죄의식까지 나오니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워졌네요.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제겐 스타벅스란 이런 곳입니다. 영감을 불어넣죠. 사소한 일상 속에서 제가 갈 길을 찾듯이요. 어디를 가나 그 에너지는 숨지 않고 제게 흐릅니다.


 그런데 사실 스타벅스는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글을 쓰는 본인입니다. 저는 산에서도 써보고, 제 방, 거실, 아파트 숲길의 벤치 이곳저곳에서 써봤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맞는 곳은 스타벅스였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디서 쓰는 게 좋은가요. 영감을 불어넣는 곳이 있나요? 아니면 장소? 시간? 날씨? 사람일수도 있겠네요. 뮤즈 같은 사람. 내가 편히 쓸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좋습니다. 찾기까지 오래 걸려서 그렇지. 스타벅스에서 쓸 수 있는 글이라면 스타벅스에서 쓴 글일 뿐입니다.


 여기서 끝내면 아쉽잖아 - 망고 패션 프루트 플랜디드 짱짱맨(광고 아님). 여름엔 스타벅스에 자리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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