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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tPD Nov 25. 2020

5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

만난 지 5분 만에 친해지는 사이

내 프로필 소개에 쓰여있는 "회사를 두 번 옮기고 나니 예능 피디가 되어있었습니다"에서 첫 번째 회사. S카드. 상품개발팀. 그곳에서 만난 김대리님. 그는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나에 대한 애정이 있는 분이었다. 나 또한 그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아마 퇴사가 6개월 정도 빨라졌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 사수 덕에 나는 퇴사 전 숙려 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내 속에 꿈틀거리는 다른 욕망이 더 커져서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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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

S카드를 퇴사하고 김대리님을 다시 처음 만난 건 내 결혼식 때. 2011년 겨울. 그리고 두 번째 만난 건 2014년 겨울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발단이었다. 전화를 받고 시청 쪽으로 급히 달려갔는데 이미 김대리는 뻗어있었고 처음 보는 두 분이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만취한 김대리님을(그 당시엔 승진해서 차장이었다) 택시에 태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쭈뼛쭈뼛하고 있는 사이 다른 일행 둘이 나에게 맥주 한 잔 하고 가자면서 말을 건넸다. 사양했으나 재차 물어봐서 예의도 아닌 것 같아 따라나섰다. 한 분은 김대리님과 비슷한 연배의 선배였고 한 명은 입사 2년 차 후배였다. 


선배를 다시 뜯어보니 얼굴은 낯이 익었다. 아마 짧은 회사 생활 동안 어디선가 마주쳤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입사원 때 회사 전체에서 틀어주는 체조 영상의 모델이었기 때문에 나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눈썹을 들어 올려 눈의 피로함을 덜어내는 클로즈업 화면의 모델이었다. 나는 모르지만 회사 사람들은 내 얼굴을 다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그... 눈썹 맞죠?" 라며 인사를 건네 오는 분들이 많았다. 연예인이 되면 이런 느낌이겠지...


아무튼 모르는 두 사람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접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를 나간 지 6년이 되었고 조직도도 바뀌었고 내 기억은 희미해져 대화의 진행이 매끄럽진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내 직업이 예능 피디라서 파국은 면했다. 대개 사람들은 내 직업이 예능 피디라고 하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 많다. 그것들에 대답만 해주어도 한두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모임 주최자가 사라진 황당한 상황에 만난 두 사람과의 술자리는 처음엔 설레었지만 설익은 느낌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겉돌고 서먹한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다신 안 볼 사이라는 심리가 작용한 듯싶다. 마치 주선자의 체면 때문에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할당 시간을 채우는 소개팅 자리와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적절한 비유다. 아무튼 그날 저녁 급조된 만남을 잘 마무리했다. 다음날 김대리님(당시 차장)에게 전화가 왔다. 


"너 진짜 왔니? 미안하다..."


술에 취해서 나에게 전화한 사실도 가물가물 했고 동료들에게 정황을 설명 들은 듯하다.


"형이 부르면 가죠!"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또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에 또 보자는 이야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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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5분 만에 친해지는 사이

그렇게 서로 바쁘게 살다가 5년이 흘렀다. 전화가 왔다. 


"넌 내가 전화 안 하면 먼저 전화 안 하지?"

"저... 원래 그런 놈이잖아요"

"푸하하하~"


5년 만의 통화가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갑다. 그렇다 김대리님과 나는 그런 관계였다. 몇 년 만에 전화를 해도 서로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대화 만나도 안 만나도 아쉽거나 화나지 않는 사이. 마치 외국에 살고 있는 친구 느낌이랄까? 


이번엔 약속을 잡았다. 요새 저녁에 시간도 많거니와 실제로도 김대리님이 보고 싶었다.


"12월 19일에 만나요. 제가 S카드 앞으로 갈게요"

"새 사옥 어딘지 알아? 을지로 3가 쪽이야"

"아 그래요? 돈 많이 벌었네요"



을지로 3가에 있는 S카드 본사

금융사들이 몰려있는 을지로 3가에서 김대리를 기다렸다. 이젠 부장이 되기 전 부부장이라는 직함이다. 김 부부장. 13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그는 대리> 차장> 부부장이 되어있었고 나는 조연출> 연출이 되어있었다.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그대로였다. 늙었다는 것을 빼곤 다 그대로였다. 표정, 말투, 제스처 다 그대론데 늙었다. 아마 그의 눈에도 내 모습이 그러했으리라.


"누구 한 명 불러도 되지?"

"얼마든지요"


잠시 후 누군가가 내려왔다. 김 부부장의 동기이자 친한 친구였다. 역시 김 씨여서 김 부부장이었다. 헷갈리니 이분은 new김 부부장이라고 부르겠다. 이 분은 힙지로를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사실 내가 힙지로 구경시켜달라고 하면서 만난 약속이었다. 을지로가 요즘 힙해져서 힙지로라고 한다. 공구가게, 인쇄가게, 작은 철공소 등이 카페, 음식점 등으로 바뀐 곳이다. 문래동이나 성수동 비슷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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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지로의 상징일까? 80~90년대 레트로 느낌의 간판, 인테리어, 조명 등이 골목골목을 채우고 있었고 추운 날씨에도 가게 안팎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이 즐비했다. 


"맛있거나 싸다기보다는 사진 찍기 좋은 곳. 힙지로가 지금 그래요"


길잡이 역할을 해준 new김 부부장이 설명해주었다. 


"보세요.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이 많잖아요"


정말 그러했다. 주로 젊은 여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진짜 이 골목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은 별로 없었다. 길을 걸어가며 순간 혼란이 왔다. 오늘 처음 본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new김 부부장은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너무 친근했고 이분도 엊그제 만난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오늘 같은 프로젝트를 끝내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동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 부부장은 new김 부부장에게 종종 내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나에 대해 특별히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나를 대강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처음 보는 사람. 그러나 불쾌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너무 편했다. 원래는 길만 안내해주고 집에 가려던 new김부부장은 소주 한 잔만 하고 간다더니 눌러 앉았다.


힙지로에서 1차로 횟집, 2차로 수제 맥주 펍으로 이동하며 우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나래를 펼쳤다. 때론 S카드 이야기, 때론 K본부 이야기, 때론 가족 이야기, 아내 이야기, 자식 이야기로 화제를 바꿔가며 수년간의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물론 오늘 처음 만난 new부부장의 복잡한 가정사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지점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감정 교류가 일어났다.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하는 정곡을 찌르는...


"그때 아내분에게 복수해주고 싶은 기분이셨죠?"

"어! 맞아. 그렇게 설명하니 딱 맞네!"

(진짜 복수라기 보다는 그 당시 감정의 골이 깊다는...)


만남의 목적은 김 부부장과 나와의 오래된 회포 풀이였는데 new부부장과의 만남도 큰 수확이었다. 나는 김 부부장보다 new김 부부장과 오히려 대화를 많이 한 느낌이다. 그리고 김 부부장은 그런 만남 속에서 삐친다거나 서운한 표정이 아니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 둘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마치 중매쟁이가 고심 끝에 중매를 섰는데 짝짜꿍 하더니 결혼에 이르렀다고 하면 과한 비유일까?


만난 지 오래되어 알고 지낸 햇수로만 14년 차인 김 부부장과 오늘 통성명한 new부부장. 인연은 먼저 알고 나중에 알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만나는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만남의 횟수가 중요하다면 매일 같이 일하는 옆자리 동료가 가장 친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마음을 털어놓고 속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학창 시절 친구인 경우도 있고 new김 부부장처럼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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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이다. 게다가 오랜 시간 들이지 않고 우연히 만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뜻하지 않게 경품 이벤트에 당첨된 느낌이랄까?  5년 만에 만난 엣 인연과 그 인연이 끌고 온 만난 지 5분 된 새로운 인연. 다시 바쁘게 살다가 5년 후에 만나도 이 둘은 스스럼없을 것 같다.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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