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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깃털 Jan 19. 2023

용이 님을 추모합니다

용이 님이 보여주신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쓴 지 햇수로 7년 차다. '쓰고 싶다'라는 막연한 욕망으로 시작한 일이다. 입원, 수술, 한 달 병가를 거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고,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독자가 생기거나, 댓글이 달리는 일은 언감생심,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명만 내 글을 읽어도 황송할 지경인데, 구독자가 늘어나고,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낯가림이 심하고 방어적인 나는 기쁨보다는 어색함이 앞섰다.


댓글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 어색함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게 다 어색하고 부끄럽지 싶은 게, 그렇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나도 구독하는 브런치가 몇 개 있는데, 웬만해선 댓글을 달지 않는다. 그런 나도 어쩌다 댓글을 쓰는데, 감동을 받았을 때, 그 마음을 되돌려주고 싶을 때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 그게 뭐가 대수라고. 댓글 달아주는 분들의 소중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시간이 흐르다 보니, 꾸준하게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생겼다. 싸복이 남매의 팬이라 자처하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저 내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 나의 삶을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다. 세월이 쌓이니, 그저 댓글로 만나는 것뿐인데도,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댓글을 통해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소통'이 아닐까. 우리가 서로 마주친 적은 없는 사이라 해도.


나는 늘 이분들이 고맙다. 이분들의 댓글을 통해 어쩌면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다. 힘들고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는, 이분들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다. 수술을 위해 길냥이를 잡아야 하는 순간엔,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함이 치솟는다. 이런 순간에도 내게 힘을 주는 건 나를 응원해 주시는 이분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받아 나는 반성할 줄 아는,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내가 변화하고 성장했다면 모두 그건 그분들 덕분일 것이다.


그렇게 용이 님을 만났다. 어느 순간 등장한 용이 님은, 언젠가부터 내 글에 꼬박꼬박 댓글을 달아주시는 모범출첵팬이 되셨다. 글을 쓴 후, 용이 님의 댓글이 없을 땐, 무슨 일이 생기셨을까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늘 길고 긴 댓글을 달아주셔서 고맙고 또 고마웠다. 나는 용이 님이 어떤 분이실까 상상하곤 했다. 나이는, 직업은, 사는 곳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 사람일까. 우리는 취향이나 관심사가 비슷할까. 인연이 닿았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던 것도 같다.


나는 용이 님이 앓고 계신 줄 미처 몰랐다. 한동안 아팠다는 댓글을 봤으면서도 미련스럽게 짐작조차 못했다. 최근에는 한동안 바빠 글을 쓰지 못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희종 님이 용이 님이 먼 곳으로 소풍을 떠나셨다는 소식전해주셨을 때, 충격과 상심이 컸다. 그래서 댓글을 못 다셨구나. 내가 바보같이 모르고 있었구나.


불쌍한 아이들을 늘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따뜻한 분이셨으니, 그곳에서 아이들을 만나셨을거라고 믿는다.

용이 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일일이 찾아 읽었다. 용이 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들이 전부 마음에 와서 박힌다. 싸복이 남매를 진정으로 아껴주셨고, 나의 삶을 응원해 주셨던 그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 자신이 너무 못나고 형편없게 느껴질 때가 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크지만, 실제의 나는 그 욕심을 따라가지 못한다. 댓글을 읽다 보면 마치 마법처럼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게 좋았다. 용이 님의 댓글이 특히 그랬다. 댓글을 읽으면 안심이 됐다. '그래,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나도 노력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용이 님이 마지막으로 써주신 댓글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썼던 글에 대한 댓글이었다. 죽음이 코 앞에 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글에 댓글을 다는 용이 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죽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로 시작했던 용이 님의 댓글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헤아릴 수 조차 없는 그 마음을 짐작해 보려고 노력해 본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도 나를 응원해 주셨던 용이 님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듯싶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뿐,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죽음이 무엇인지 나는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모른다. 모르면서 두렵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죽음은 슬픈 일이다. 죽음은 곧 이별이기 때문이다. 죽는 이는 죽는 이대로 남은 이들은 남은 이대로 슬프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반 이상은 추억의 무게라고 했던 용이 님의 말을 곱씹어 본다. 살아남은 나는, 이제 이렇게 글로써나마 용이 님을 추억해 본다.



무지개 다리를 건널 때, 반갑게 마중나올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고생 많았다고, 다시 만나 반갑다고' 이야기해 줄 아이들을.

용이 님은 천국에 도착했을 거라 상상해 본다. 본인이 그리셨던 대로, 무지개다리 너머 쫄랑쫄랑 꼬랑지 흔들며 나오는 아이들을 만나셨을 거라고도 믿는다. 죽음은 소멸이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의 이동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실 거라고도 믿어본다.


나는 아남은 자로서, '같이 있는 동안 행복한 시간 많이 보내라'는 용이 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려 한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내게 주어진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것이 용이 님이 내게 주신 삶의 숙제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야겠다.


"깃털 님 덕분에 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늘 배우고 반성합니다"는 용이 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용이 님께 이 이야기를 돌려드리고 싶다. "용이 님 덕분에 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늘 배우고 반성했습니다. 앞으로도 늘 배우고 반성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용이 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만나는 날, 제가 꼭 용이 님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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