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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없는 하루의 생존법

불평을 쇼핑백으로 덮으며 히죽 웃는 이유

by 시에

세상에는 꼭 타고 싶은 비행기만 있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출장. 내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최소로 줄어들거나 타의에 의해 동행이 추가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왜 내가 타는 지 모르겠다거나. 그래서 타의로 비행기를 타러 갈 때는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하나라도 찾아내는 게 낫다.


일본 도쿄 오다이바

오랜만에 체크인 카운터에 줄을 섰다. 출장자 모두의 자리를 나란히 붙여서 누군가 체크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찔했다. 범인이 누구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벌어지는 모든 일을 예고 없는 소나기처럼 두들겨 맞으라는, 평소에 믿지도 않는 신이 웬일로 찾아와 계시를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포기해. 공항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정신줄을 놓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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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는 아저씨가 내 앞에서 우렁차게 방귀를 뀌었다거나, 큰맘 먹고 면세로 수화물용 캐리어를 구매했는데 카트가 없어서 발로 차고 끌면서 탑승장까지 이동했다는 정도는 남은 일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남의 돈으로 비행기를 타고 남의 돈으로 밥을 먹을 거 아냐? 그렇다면 쇼핑에 돈을 태워 마음을 달랠 수 있지 않겠냐고 면세품 인도장에서 받은 쇼핑백을 들고 잠시 히죽 웃었다.

tokyobusinesstrip_log_02.png MidJourney image based on my work



레인보우 브릿지를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이십년 전에 본 만화책이었다. 노을을 보면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나라면 가정사가 불행했던 주인공과는 다른 심정으로 불을 지르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은, 다리 구경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결정은 내 몫이 아니니까.

tokyobusinesstrip_log_03.png 레인보우 브릿지: MidJourney image based on my work



이제 한국은 아침저녁으로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아직 도쿄는 습하고 더웠다. 대체 여기에 자유의 여신상이 왜 있을까? 서구에 판타지를 가진 일본의 정서가 담긴 걸까? 쇠락한 관광지의 유물로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신은 죄가 없다. 오늘도 저무는 노을을 배경으로 횃불을 치켜들 뿐이다.

자유의 여신상: MidJourney image based on my work



광안대교와 똑 닮은 다리를 바라보고 선 쇼핑몰도 화려한 시절이 끝났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공실이 늘어가는 풍경이란 서울의 어느 곳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낯선 것을 본 덕분이라고 치자. 새로운 건 대체로 불편하지만, 꼭 마이너스인 것은 아니다.

tokyobusinesstrip_log_05.png 아쿠아시티 쇼핑몰: MidJourney image based on my work



의식처럼 매일 밤 온갖 과자에 번역기를 들이대며 하루의 마침표를 찍었다. 현타에 얼얼했던 일들은 뭐 직장인이 다 그렇듯 입을 다문다. 그대로 흘러가 사라져 버리기를. 뱃살을 걱정하면서도 매일 퍼먹었던 푸딩에 방사능이 묻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초밥과 우동은 맛있었고, 절약한 출장비로 새로 나온 아이폰을 사야겠다며 또다시 히죽 웃었다.

tokyobusinesstrip_log_06.png MidJourney image based on my work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이제 좋은 것만 기억에 아로새기자. 기념품 가게에서 사 온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는다. 방사능만 생각 안 해도 되면 얼마나 좋아. 확률 게임에 내 몸이 지지 않기를 바라. 답이 없는 막막한 보고서도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시간이 오면 끝을 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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