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국회도서관> 출판가 길라잡이, 2025년 10월호
세계 출판 산업은 독서 환경의 디지털화, 신기술의 도입, 소비 습관의 다변화 속에서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 인쇄·유통·판매라는 단순한 체계에서 이루어지던 출판은 이제 디지털 네트워크와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제 책의 형식이 달라지는 차원을 넘어, 산업 운영 방식과 저자·독자의 관계 자체를 바꾸고 있다. 특히 최근 두 가지 흐름이 뚜렷하다. 첫째, 저자가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독자와 직접 연결되는 활동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 둘째, 콘텐츠가 전자책·오디오북·주문형 출판(Print/Publish On Demand)·인터랙티브 콘텐츠 등 다양한 포맷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 흐름은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맞물리며, 새로운 출판 질서를 형성한다. 팬덤(Fandom)을 기반으로 한 저자의 활동은 다양한 디지털 포맷으로 확산하고, 다시 다른 플랫폼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출판은 단일 매체를 넘어 다층적이고 상호 연결된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출판사는 저자를 발굴하고, 원고를 편집해서 책을 만들고, 유통망을 통해 독자에게 책을 전달하는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메일 뉴스레터, 구독형 플랫폼, 소셜미디어 등을 활용해 저자가 직접 독자층을 만들고 이를 유지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독자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저자의 활동을 후원하고 소통하는 핵심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개인 출판(Self-Publishing)이다. 2024년 기준 글로벌 개인 출판 시장은 약 12억 달러 규모로 추산되며, 2030년까지 연평균 15%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마존 킨들 다이렉트 퍼블리싱(KDP)에는 매년 150만 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으며, 일부는 전문 출판사 소속이 아님에도 상위 1% 베스트셀러 저자 군에 진입한다. 이제 개인 출판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라 출판업계 주류 시장의 일부가 되었다.
최근 대표적인 해외 사례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 『다이어 바운드(Dire Bound)』가 있다. 개인 출판으로 시작했지만, 북톡(BookTok)을 통해 입소문이 퍼지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출간 90일 만에 아셰트(Hachette)와 수백만 달러 규모 계약을 체결했고, 현재까지 17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다. 팬덤이 시장을 움직이고, 그 결과가 다시 출판사의 투자로 이어지는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다.
구독형 콘텐츠 플랫폼 서브스택(Substack)도 같은 맥락을 보인다. 2025년 초 기준 유료 구독자는 500만 명을 넘어섰다. 작가들은 연재, 창작 과정 공개, 독자와의 질의응답 등을 통해 충성도 높은 독자층을 확보한다. 월 5~10달러 구독료로 수천 명의 구독자를 확보하면 출판사 없이도 안정적 수익이 가능하다. 서브스택은 단순한 플랫폼을 넘어 저자와 독자를 직접 연결하는 독립적 수익 모델로 자리 잡았다.
『다이어 바운드』와 서브스택은 서로 다른 경로지만 공통으로, 저자가 출판사의 문턱 없이도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더 이상 글을 쓰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브랜드로 진화한다. 독자는 책뿐만 아니라 저자의 세계관·가치관·라이프스타일까지 소비한다. 강연·굿즈·온라인 클래스·팟캐스트 등으로 접점은 확장되고, 저자의 영향력은 과거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한국에서도 웹소설·웹툰 작가들의 브랜드화가 두드러진다. 대형 플랫폼을 기반으로 팬덤을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드라마·영화 등 2차 저작물로 확장한다. 카카오페이지와 네이버웹툰의 인기 작품은 곧바로 영상화 논의로 이어지고, 저자는 IP를 관리하며 브랜드화 과정을 거친다. 일본 역시 라이트노벨 작가들이 팬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 출판사보다 강한 영향력을 확보한다. 중국은 텐센트 문학, 샤오홍수 등을 통해 온라인 문학이 드라마·영화로 이어지고, 굿즈와 팬 미팅으로 수익을 다변화한다. 각국의 사례는 저자가 브랜드 주체로 성장하며 출판사를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디지털 포맷과 AI, 새로운 출판 방식을 열다
AI의 확산은 이러한 출판업계의 변화를 가속하고 있다. 표지 디자인, 번역, 교정, 초안 작성 등 창작 과정 전반에서 AI가 활용되면서 제작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었다. 과거 몇 달이 걸리던 번역·편집 과정이 몇 주 만에 가능해졌고, 독립 저자들도 세계 시장 진출 기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AI 번역과 교정은 독립 저자에게 해외 시장을 열어 주고, 이미지 생성 모델은 표지 제작을 돕는다. 마케팅 영역에서도 AI는 메타데이터와 소개 자료의 최적화를 지원한다. 이제 한 명의 저자가 과거 출판사 전체가 담당하던 작업의 상당 부분을 직접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와 함께 과제도 따르고 있다. 여러 출판사와 작가들이 AI 모델이 자신들의 저작물을 무단 학습에 사용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학습 데이터 투명성과 권리 귀속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제작 효율성은 높아졌지만 권리 보호와 보상 체계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갈등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AI의 합법적 사용을 위한 국제 기준과 업계 자율 규범 마련이 시급하다.
독자의 출판 콘텐츠 소비도 다변화되고 있다. 세계 오디오북 시장은 2024년 56억 달러에서 2030년 200억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단순 낭독을 넘어 성우 연기, 음향 효과, 음악을 결합한 오디오북은 새로운 몰입 경험을 제공한다. POD 서비스 역시 출판 생산 방식을 혁신하고 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즉시 소량 인쇄가 가능해 재고 부담을 줄여서 친환경적이다. 대형 콘텐츠 그룹 인그램(Ingram)은 2023년 연간 4천만 권 이상을 POD 방식으로 인쇄하며 탄소 배출 절감에도 이바지했다.
AR(증강현실)과 VR(가상현실)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북은 독자가 스토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독자는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가는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선택과 참여를 통해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주는 적극적 주체로 변한다. Z세대와 알파 세대는 이러한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책을 읽는 것에서 참여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품질·저작권·유통·독자 변화의 과제
출판 산업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들에 직면해 있다. 우선 콘텐츠 과잉이다. 개인 출판 플랫폼에 매일 수많은 책이 등록되지만, 품질 관리가 어려워 좋은 작품이 묻히기도 한다. 플랫폼 차원의 정교한 큐레이션, 리뷰 신뢰도 제고, 추천 알고리즘 강화가 필요하다. 유통망 불안정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공급망이 흔들리면 신생 저자와 독립 출판사는 독자에게 도달하기조차 어렵다. 디지털 유통과 POD 확산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안정적 유통망 구축이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소비자 태도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젊은 세대는 뉴스 소비를 회피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책 역시 SNS·영상·게임과의 경쟁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독자의 집중 시간이 짧아지는 흐름 속에서 출판은 차별화된 독서 경험을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흐름은 출판이 단일 산업을 넘어 멀티 포맷·멀티 모달(Multi modal; 텍스트, 이미지, 음성, 영상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동시에 학습하고 처리하는 AI 시스템 또는 기술) IP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출판업계 역시 POD, 오디오북, 웹툰, 인터랙티브 콘텐츠 등 다양한 포맷을 적극 수용하고, 저자의 브랜드화와 글로벌 팬덤 전략을 결합해야 한다. 책 한 권은 더 이상 완결된 상품이 아니라, 확장할 수 있는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전환을 기회로 삼는다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Substack gets ‘Trump bump’ as subscriptions soar>, The Financial Times, 202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