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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BRIDGE Oct 11. 2018

무비 브릿지 - 버드맨

몸부림치는 우리들을 바라봐 주는 이는

    이따금씩 구덩이 안에서 울부짖는 기분이 든다. 저 바깥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제발 나를 바라봐 달라고, 인정해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침은 공허함만 남긴 채 흩어지고 만다. 그리고 뒤따르는 무서운 질문, '나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혹여나 무가치하다는 답변이 나올세라 지난날의 영광에 메달리기도 하고, 주변인들에게 물어도 보지만, 지난날의 영광은 빛이 바랜 지 오래고, 주변의 그 누구도 속시원한 답을 내어 주지 않는다. "버드맨" 의 주인공, '리건 톰슨' 이 딱 그 모양새다.


    한땐 할리우드서 이름깨나 날렸던 그지만, 이제는 퇴물 중년 배우가 되어 연극단으로 내몰렸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극으로 다시 화려하게 일어서고 싶은 그지만, 현실은 영 녹록치 않다. 배우들은 영 시원찮고, 기어이 승질낸 끝에 갈아치운 새로운 배우는 그에게 진정성이 없다며 따지고 든다. 상업용 히어로 영화로 유명세를 날린 탓에, 그의 배우로서의 예술성은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그나마 있던 유명세마저 이젠 시들해진 지 오래다. 심지어 그의 혈육마저도 리건에게 퇴물이라며 폭언을 퍼붓는다. 그렇게 리건은, 스스로를 잃어 간다.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리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치는 것뿐이다. 연극 스탭을 향해, 딸을 향해, 세상과 관객을 향해 말이다. 한낱 상업용 영화에나 출연하려는 배우들에게, 그의 연극을 알아보려고 시도조차 않는 평론가들에게 그는 투덜거린다. 아니, 울부짖는다. 내가 여기에 있느니, 제발 나를 알아봐 달라고 말이다. '버드맨' 으로 영화를 누렸던 내 예술적인 연기를 선보일 테니, 부디 나를 인정해 주세요. 이것이 영화 내내 리건이 다른 등장인물에게, 그리고 현실의 관객에게 소리치는 내용이다.

    자신을 봐달라며 울부짖는 이는 비단 리건만이 아니다. 그의 연극에 긴급수혈된 배우 마이클도, 그의 딸 샘도 스스로를 봐달라며 소리친다. 마이클은 메소드 연기자로서, 비현실을 살아가는 현실 속의 인물이다. 발기부전인 그는 연극 무대 위에서, 연기를 통해서만 성욕을 일으킬 수 있다. 무대 위의 가짜 소품, 가짜 술들을 향해 진실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소리치는 마이클. 그의 존재가치는 무대 위에 있고, 연기에 있는 셈이다. 그는 그렇기에 그의 연기를 지키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샘은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가 네게 한 최악의 일이 뭐였어?' 라고 묻는 마이클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바라봐 주지 않은 아빠, 리건을 향해 한없는 원망을 내뱉는다.


    영화는 이 모든 인물들을 노련하게 묶는다. 동시에 리건의 연극, 버드맨이라는 영화, 그리고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연결시킨다. 영화 속 배경음으로만 들렸던 드럼 소리의 정체가, 사실은 건물 밖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악단의 소리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 관객들은 이야기를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리건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마이클 패스밴더와 제레미 레너의 이름, 그리고 영화 속 TV에 등장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모습은 덤이다. 연극 제작자인 리건과 싸우는 마이클을 연기하는 배우, 에드워드 노튼이 실제로 영화 제작사와 갈등을 겪은 적 있다는 소소한 디테일까지 더해, 관객은 이 영화를 단순한 허구가 아닌 실제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인공 리건에 더더욱 이입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리건은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수많은 이들의 관심도 받게 된다. 속옷만 입은 채 타임스퀘어를 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수많은 카메라에 담겨 SNS에 떠돌아다녔고, 충동적으로 무대 위에서 스스로에게 쏜 총은, 새로운 극사실주의 연극 기법이라며 평단의 찬사를 독차지한다. 그는 영화 초반부터 원하던 모든 것들을 얻었다. 대중의 관심과 평단의 인정 말이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그를 괴롭히던 환영, 버드맨의 망령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다. 보통 공포영화에서 한이 풀리면 귀신도 성불하게 마련인데, 대체 어떤 한이 풀리지 않아 리건의 버드맨은 계속해서 그에게 속삭이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 그 모든 관심과 인정이 그가 바랐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영화의 부제,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처럼, 극중 리건의 모든 성취는 예기치 않은 것들이었다. 극장 뒷문이 잠겨 버린 탓에 무대에 서야 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속옷 바람으로 뉴욕 한복판을 달렸고, 그가 극중에서 스스로에게 겨눈 총은, 진정 삶을 마감하고 싶었던 한 남자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결국 타인은 리건을 단 한번도 온전하게 보지 못한 것이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영화 초반부, 리건의 분장실 거울 앞에 붙어 있던 문구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 인정받고자 했던 리건의 욕망을 담은 짧은 글. 하지만 영화의 최후반부까지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원한다 생각했던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나서야, 리건은 진정으로 오롯이 인정받는 법을 깨닫는다. 결국 자기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소중한 깨달음과 함께, 리건은 창 밖으로 몸을 내던지며 그의 마지막 연기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한다. 부럽게도 타고난 매력이 있어 그것을 어필하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갖은 수를 써서라도 사랑받고자 한다. 주변인의 기호에 자기 자신을 끼워맞추며 배려하는 이도 있으며, 짐짓 아닌 척 튕기고 툴툴대면서 역으로 관심을 끌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그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리건이 보여주듯, 그 시작점은 결국 자기 자신이어야만 한다. 아무리 다른 이들이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멋진 사람이라고 되뇌인들 뭣하랴. 나 스스로가 그 말을 받아들이고, 나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나를 알아봐줄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점.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버드맨" 이 시사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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