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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꺽정 Aug 07. 2018

휴머니즘?

17. 내가 생각하는 휴머니즘

휴머니즘이란 말이 있다.  인본주의 또는 인간이 근본이 된다라는 사상이다.  휴머니즘이란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양에서 생각하는 휴머니즘과 동양에서 생각하는 휴머니즘은 태어난 태생도 다르고 걸어온 환경도 다르기에 그 의미도 다르다.  우리들은 휴머니즘하면 ‘고귀한 인간성’ 정도의 의미를 떠올리지만 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와있는 동양에서 생각하는 인본주의 내용은 이렇다. 일부를 요약해 본다. 

중국 철학자들은 유가철학을 인본사상의 핵심이라 말해 왔다. 그 이론적 근거로서 선진(先秦) 유가철학이 대표하는 것이 인본사상의 발전이었으며, 유교가 중국문화에 공헌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본사상이었다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국의 인본사상은 주(周)나라 초기에 이미 잉태되었다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에 의해 개척되고 순자(荀子)에 이르러 더욱 성숙, 발전되었다고 한다. 

≪순자≫ 유효편(儒效篇)에 보면 “도는 하늘의 도도 아니고, 땅의 도도 아니며, 사람의 도가 되는 것이다(道者 非天之道 非地之道 人之所以道也).”라고 하여 사람의 도를 천도나 지도보다도 앞세운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책 천론편(天論篇)에 보면 “하늘에는 시(時)가 있고, 땅에는 재(財)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치(治)가 있는데, 무릇 이것을 능참(能參)이라 한다(天有其時 地有其財 人有其治 夫是之謂能參).”라 말하고 있는데, 사람이 천지만물의 주재요 핵심임을 밝히고 있다. 


맹자도 일찍이 천시(天時)·지리(地利)·인화(人和)의 동시적 중요성을 말하면서, 그 중에서도 인화가 없으면 천시·지리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일이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인간을 천지 가운데 핵심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중국적 전통에서 신본주의(神本主義)로 나가본 적은 없으며, 어디까지나 사람을 우주의 중심으로 두었다. 


한국사상 가운데서도 인본주의를 그 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유교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인본주의는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중심사상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인의 마음을 가장 원형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단군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신화 가운데서 이미 인본주의의 핵심을 살필 수 있다. 


단군신화는 근본적으로 천신·지신·인신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천신인 환웅(桓雄)은 인간이 되기를 열망하고, 지신인 곰도 인간이 되기를 열망해 천·지·인 세 가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고대사상에서 사람과 하늘은 기본적으로 뿌리가 같다는 천인일본(天人一本)의 관념이나 성품이 같다는 천인합덕(天人合德)의 사상이 지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천지의 중(中)으로서 인간이 탄생된다고 본 단군신화의 사상은, 사람의 마음은 상하로 천지와 흐름을 같이한다는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신명(神明)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고 그것이 순의중정(純懿中正)했을 때 그 밝은 덕은 천지와 합한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한국 신종교들의 사상도 고대로부터의 한국사상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고 천지지신(天地之神)도 있는데, 그때의 신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나 그 뿌리에 있어서는 같다고 하는 사상도 천·지·인의 통합적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천·지·인의 도는 모두 같으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자는 천도(天道)를 아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고대부터 인심이 천심이라는 생각을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간직하고, 현명한 임금들은 백성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였다. 


인본주의는 우리 나라에서 자생한 여러 종교의 핵심사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천지의 중(中)은 사람이요, 사람의 중은 마음이라고 하여, 마음이 즉 천지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 다시 말하면 마음으로 초월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인 것이다. 


이같은 열망은 고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근대의 신종교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마음이 천지의 중심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나타났다. 


동학교(東學敎)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이나 증산교(甑山敎)에서 말하는 “마음의 도수(度數)를 변경시키면 천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표현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증산은 인간의 표면적인 측면과 내면적인 측면을 구분해 전자를 인간이라 부르고, 후자를 신명(神明)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바로잡힌 인간이란 바로 신명이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학교의 인내천사상과도 통하는 것이다. 


천지의 중으로서 인간이 강조되고, 인간의 중으로서 마음이 강조되는 사상, 즉 천지음양의 중화작용(中和作用)이 진리의 극치임을 나타내는 사상은 성(聖)과 속(俗)을 이원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화엄(華嚴) 도리를 대중 속에서 생활화시키려고 한 원효의 사상이나,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가 묘합(妙合)해 일원화한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철학을 전개한 이이(李珥)에서도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사상은 이처럼 마음이 중심이고 이 마음을 통해서라야만 모든 이질적인 이념이나 사상들이 하나로 수렴되고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본사상 [人本思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내용으로는 동양에서 생각하는 인본주의철학을 충분하게 설명을 해주기에는 매우 부족하지만 동양의 인본주의는 天과地 사이에 인간이 존재한다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단순히 인간은 존귀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있기에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동양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에서 생각하는 인본주의 어떨까? 네이버의 두산백과에서 나오는 내용을 인용해 본다. 

요약: 인간주의 ·인문주의(人文主義)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도 하며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대단히 넓은 범위의 사상적 ·정신적 태도 ·세계관. 


15∼16세기의 유럽에서는 고대의 문예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나, 중세 이래의 신학(神學) 중심 학문체계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시대의 학자들 간에 ‘보다 인간다운 학예(學藝)를!’이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즉 고대의 학예를 부활시킴으로써 교회적 권위 아래 질식되어가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을 의미하는 후마니오라(humaniora)라는 말로 불리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인간다움을 높이고 새 시대의 이상적 인간상(人間像)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교육이념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이 ‘보다 인간다운’을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오르(humanior:인간적이라는 뜻인 humanus의 비교급)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생겼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라는 말도 같은 말이다.  


예컨대 페트라르카는 젊었을 때부터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등의 고사본(古寫本)을 열심히 수집하여 고대인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완성의 이상상(理想像)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러한 휴머니즘의 정신은 르네상스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이탈리아로부터 알프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파급,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 프랑스의 몽테뉴 등에 의해 새로운 인간성의 이상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연스런 인간성을 존중하고, 이러한 인간성에 입각하여 지혜를 탐구하려는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휴머니즘은 근대과학의 합리적 정신과 결부된다. R.데카르트는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진리를 방법적으로 탐구하였다. 신학자처럼 ‘은총의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빛’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려고 노력하였고, 수학적 방법으로 학문의 확실한 기초에 도달한 지점(地點)에서 출발하여 인생에 유용한 지혜로서의 철학체계를 완성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생활의 지도, 건강유지, 기술발명에 관하여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에 관한 완전한 인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휴머니스트의 지혜의 이념이 새로운 과학이나 기술과 결부됨으로써 근본적으로 변질된 셈이다. 이와 같은 과학과 휴머니즘의 통일이라는 과제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시대의 휴머니즘은 과학적 합리성을 단순히 자연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쳐 추구하여 인간성을 한없이 확충(擴充)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제의식(課題意識)이 18세기 계몽사상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의 관념’을 낳게 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독일에서 뉴휴머니즘(Neuhumanismus)이라는 정신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독일 계몽사상의 추상적인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항으로 생긴 것이며, 그리스적인 미(美)의 이상을 고취한 J.J.빈켈만을 선구자로 하여 T.레싱, J.G.헤르더, J.W.괴테, F.C.S.실러 등으로 이어지고 훨덜린의 시에서 완성되는 새로운 인문주의 운동이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인 헤르더는 고전적인 인간성(Humanität)의 이상을 부활시켜, 이것을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이상상이라 하고, 이것으로 바이마르의 김나지움에서 실시하는 그리스 ·라틴의 학예습득에 의한 인문주의 교육의 기초를 삼았다.  


20세기 초엽에 독일에서는 ‘제3인문주의’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고전 연구자들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낳은 신인문주의 운동이었다. 또한 영국의 철학자 실러는 자기의 프래그머티즘적 세계관을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동과 경험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실제적 유용성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그는 세계의 설명원리(說明原理)는 신이나 절대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그 자신의 세계를 행동적으로 개혁해나가는 원리로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상 여러 예가 보여주듯 휴머니즘은 각 시대에 따라 실로 여러 가지 사상형태로 등장한다. 여기서 공통되는 것이라면 겨우 ‘인간다움’의 존중이라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인간다움’이 자주 정반대의 측면에서 추구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인간을 한없이 초월한 것, 즉 신이나 절대자와의 관계에서만 자기의 인간성을 비로소 실현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참 인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과학이나 기술의 합리성을 철저히 추구하는 일이 결국은 인간성을 확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류는 새로운 기술의 힘을 구사함으로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틀림없이 한층 커다란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은 행복에 대한 환상은 오늘날 이미 배반당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기계문명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는커녕, 과학기술에 노예화되었으며, 세계의 합리화와 기계화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과정이므로 이러한 추세에 저항하는 것만이 휴머니즘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반론한다. 이와 같이 현대의 휴머니즘은 혼미상태에 빠져, 그 지향하는 바는 정반대의 방향으로까지 갈라졌다. 다같이 ‘인간다움’을 추구한다 해도 그 인간성을 어떤 방향으로 확충해 나가는가가 문제이다.  


‘인간다움(humananitas)’이란 말을 맨 처음 사용한 것은 키케로라고 하나, 그의 후마니타스란 것은 반드시 인간성의 이상(理想)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인간다움을 나타낸다. 그것은 문명인만이 가질 수 있는 ‘우아함’ 정도의 뜻이었다. 로마인은 ‘인간다운 인간(homo humanus)’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본시 ‘이방인(homo barbarus)’이라는 말과 상대적인 의미에서 쓴 말이다. 즉 이방인은 풍속습관이 다르고 문화적 교양이 낮은 야만인인 데 비해 자기들은 그리스로부터 이어받은 고전적 교양을 갖추고 있고 또한 로마인으로서의 모든 덕(德)을 갖춘, 세련된 인간이라는 자부심이 이 말 속에 담긴 것이다. 1537년 로마 교황 파울루스 3세가 인도인과 흑인, 아메리카대륙의 토착민들을 ‘참의 인간’으로 인정한다는 회칙(回勅)을 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그들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된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풍속 ·습관 ·사상이 자기들과 같은 인간만을 인간다운 인간이라 생각하고, 그 밖의 인간을 모두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독단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그러한 자기중심주의 ·자국중심주의(自國中心主義)에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해나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휴머니즘 자체를 초월한다’는 것이 바로 휴머니즘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휴머니즘 [humanism] (두산백과) 

어휴~ 서양놈들 생각은 별것도 아닌 것을 무지하게 힘들게 생각해


서양의 휴머니즘을 보면 먼저 차별적인 휴머니즘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서양에서 휴머니즘이 생겨난 배경이 교회의 권위에 질식되어가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에 불과했다.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 휴머니즘의 시작인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차별적으로 분리하여 인간은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존귀하고 고귀하다는 전제를 두고 인본주의 논리를 전개하였고 그리 올바르지 않은 전제로 말미암아 서양의 휴머니즘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없이 인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독단적인 인본주의로 발달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인간다움은 자기중심적이었고 자기민족중심적이었고 자국중심적인 인간다움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양에서는 민족간, 국가간에, 다른 대륙의 이민족을 대상으로 갈등을 빈번하게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사회시간에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주제로 배운 적이 있다.  왜 인간은 존엄한가를 설명하면서 다른 동물들을 비교대상으로 삼았다.  인간은 개돼지와는 달리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  돼지는 본능대로 살지만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에 우월한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다.  다른 동물들에게 언어라는 것은 없다.  새들의 간단한 울음소리는 언어가 아닌 단순한 신호수준에 불과하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알지만 다른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다운 품성이 있다.  자비로움. 용서, 사랑 등등은 인간다운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고 선생님들이 가르쳤던 것 갔다.  지금 이 시간에는 우리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솔직해 지자.  인간이 그 정도로 존엄한 존재라고 인정받을 정도로 다른 동물들과 차별적인 우월함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인간과 동물은 차이점보다는 동일점이 더 많다.  배고프면 뭔가를 먹어야 하는 것, 똥을 싸는 것, 졸리면 자야하고, 힘들면 쉬어야 한다.  그리고 수명을 다하면 죽는다.  인간이 동물보다 지능이 높은 것이지 동물들이 지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 동물들도 의사소통수단을 가지고 있다.  동물들은 문자가 없다고 주자할 지는 모르지만 인간사회에서도 지역과 인종에 따라 문자가 없는 경우가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동물도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안다.  다만 그 수준이 인간보다 낮을 뿐이다.  동물들에게 용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지 말자.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들끼리의 성욕을 사랑이라고 칭하고 동물들의 성욕을 종족번식의 본능이라고 절하해 버린다.   

인간들이 자기자식을 소중히 하는 것을 지고지순한 부모애로 표현하면서 동물은 그것은 단순한 본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한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의 존엄성만 인정되고 동물의 존엄성은 무시될 정도로 인간은 차별적이지 않다.  인간이 지능이 높아 지구를 지배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동물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은 인간들은 인정을 해야 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동물들 보다도 더 저열한 행위를 저지른 것을 본다면 인간은 오히려 자기들에게 주어진 상대적으로 우수한 지능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우수한 지능을 사용할 자격을 박탈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다름아닌 인본주의라는 것이 잘못된 사고방식이며 편협한 자기중심적 철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이 중심이 아니다.  이 세상을 인간들이 일부 이용하고 활용할 수는 있어도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세상의 근본은 따로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들이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을 한마디로 표현을 못하고 다음과 같이 풀어본다.  


‘우주라고 표현되는 뭔가가 있고 그 안에 태양계라고 칭하게 된 뭔가가 있고 그 안에 지구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그 위에 바이러스 크기만한 우리가 있다.  그 사이에 나라는 存在(being)가 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다른 존재들이 있다.  그 존재들은 다른 인간일수도 있고, 나무일수도 있고, 흙일 수도 있고, 돌멩이 일수도 있고, 강물일수도 있다.  대기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대기는 이런 수많은 존재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나무와 나는 다른 존재인 것 같아도 그렇지 않고, 내가 딛고 있는 땅도 나와 분리된 존재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다.  저 멀리 비행기를 타면 보이는 바다도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그것도 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와 나를 둘러쌓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나와 멀리있고 가까이 있고에 상관없이 그것들은 서로서로 밀접하게 혹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저 멀리 허블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는 수백만 광년 떨어진 별들도 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무한한 하나의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서로 떨어진 것이라고 믿는 수많은 존재들은 우리가 인지하든 하지 못하든 서로 생명을 나누는 존재이다.  내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와 나는 서로 생명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나도 하나의 존재로서 하나의 생명체이며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도 하나의 생명체이며 강바닥의 자갈도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런 셀 수 없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모여 이루어진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행성의 집합 ‘태양계’도 하나의 생명체이다.  우주라는 모든 존재의 집합은 궁극적인 생명체이다.  모든 생명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궁극의 생명체인 것이다.’   

현재 상태를 보고 생명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지 하는 것은 옳치않다. 돌멩이가 무슨 생명체이냐고 얘기하지말자.  돌멩이가 지금은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돌이 닳아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난다.   살아있는 인간을 현재 살아있는 그 자체만을 보지 말자.  살아있는 인간은 수명을 다하여 죽을 것이며 그 살아있던 육체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거나 공기중에 퍼지고 물에 녹아든다.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던 것들은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이것들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근원이 된다.  무기체은 유기체가 무기체로 변하고 무기체가 유기체로 변화한다.  우주에서는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하여 사라지고 그 잔해들은 우주를 떠돌다가 다시 모이고 더 모여서 새로운 별로 새로 태어난다.  우주과학은 다름이닌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 것들이 하나의 생명체로 얽혀있는 있다는 것을 느끼기가 어렵다.  습관적으로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나라는 존재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느끼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을 하면서 호흡을 천천히 하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느껴진다.  대기라는 것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다 보면 마음이 어둠처럼 혹은 푸른 하늘처럼 잔잔해 지고, 우주처럼 광활해지고, 감지할수 없는 미세한 변화에도 온 몸이 떨려오고, 내 몸이 살아있으되 흙으로 변하여 대지와 일체화 된 것 같으며,  내 몸 껍데기가 대기를 담은 항아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 항아리에 무수한 구멍이 뚫려있어 대기가 자유롭게 왕래를 하기도 하고, 그 껍데기와 마음이 분리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내뿜는 대기가 나무에게 흘러가기도 하고 나무가 내뿜는 대기가 나에게 들어오고 하는 것이 꼭 혈액의 흐름과도 같은 듯하다.  내 몸이 유기체로 되었다가 무기체로 되었다가 하는 느낌을 느끼니 돌멩이도 은행나무도 계곡을 흐르는 물도 저멀리 보이는 푸른 산도,  거대한 바위도,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보이는 거대한 바다도, 저 하늘위의 구름도, 그 옆에 걸쳐있는 달도, 내 귓불을 스쳐가는 바람도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닌듯하며 다 내 형제요 핏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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