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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 Jan 20. 2022

겨울이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할 때

추위에 압도되는 배터리처럼


일년 중에 어떤 달을 가장 좋아하세요?

저는 여름휴가가 다가오는 6월이 보통 설레고 좋습니다. 이른 휴가를 계획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연중 가장 해가  하지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삽질을 하더라도 여전히 그날의 태양은 떠있고, 낮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때문에 낮이  6월부터 8월이면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대체로 행복합니다.



사실 5월부터는 이미 텐션이 업 되는 편이죠. 여름 구간으로 들어가는 전야제잖아요. 특히나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날이 어우러진 황금 연휴도 있고요. 횡재하는 해에는 거의 일주일을 연달아 놀기도 하고. 말그대로 계절의 여왕. 눈부신 5월! 같은 이유로 10월도 좋습니다. 마음 한편이 따뜻한 황금빛으로 녹아드는 기분이에요. 황금빛 가을 들판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나 개천절, 한글날을 낀 황금연휴가 있으니까요.


그 반대인 4월은 별로입니다. 휴일이 없어서요. 제가 태어난 달인데도, 회사생활 10년을 하는 동안 휴일 없는 4월은 대체로 지루하고 재미없었습니다. 썩은 달 이라고 생각했던 해도 있었고요 ㅋ



그런데.


2월은 아예 차원이 다릅니다. 단지 '싫다' 라고 표현할 수위가 아니었어요.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다고 할 만큼 바닥으로 깊이 처박혔습니다. 완전한 나락으로의 곤두박질.


2월의 어느 밤이었어요. 야근을 하고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터벅 터벅 걸어가는데요. 눈물이 주룩 주룩 떨어졌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 고작 이렇게 살려고 애써 힘들게 자라났나.



급기야는 엉엉- 차가운 밤거리에서 울먹이며 길을 걸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2월의 깜깜한 주택가엔 인적이 드물었죠. 나 하나 따위가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절규를 해도 세상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두더지 망치 게임 아세요? '여보세요- 잠깐만요!" 하고 다급하게 외치는 그 두더지를 인정사정 없이 망치로 탕!탕! 내려꽂듯이, 내 삶이 있는 힘껏 나를 탕-탕- 땅속 깊이 꺼지라고 내리박는 기분이었습니다.


대단히 실패한게 없는  같은데, 끊임없이 강제로 무릎 꿇려 '나는 졌습니다' 라고 말하는 패배자 같았어요.



무거운 옷도 한몫 했습니다. 두껍게 감싼 패딩, 종아리까지 올라온 부츠, 칭칭 두른 목도리, 어둔한 장갑. 살기 위해 두른 온갖 보온용 옷들마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감각을 조여왔습니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는 것조차 바위를 업고 달리는 것처럼 힘겨웠어요. 이런 날은 왜 그렇게 또 집은 먼 건지. 집이 먼 것도 서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이유를 모르겠는 울분이 넘쳐 오르고, 내 자신이 한없이 보잘것 없고. 발 앞의 보도블록 위에 모든 걸 내동댕이 치고 누워버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태어난 게 억울하단 듯이 온몸으로 빽빽 우는 갓난 아기 같았어요. 가까스로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갑옷같은 옷더미를 현관에 벗어던지고 벌러덩 쓰러져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에겐 '2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예요. 거의 매년 반복되어온 겨울밤 풍경이기도 하고요. 속수무책의 무력감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내가 대체 뭘 잘못 했길래 이토록 힘겨운가. 다시 또 시작된 한 해를 살아내야 하는 게 버거운 걸까. 회사에서 얼빵하게 죽을 써서 그런가. 아, 그러고보니 2월에는 진급 이슈 같은 것이 있어서 크게 물 먹고 낙담했던 경험이 있긴 합니다. 여러모로 힘든 달이었네요.



나중에 제가 바다 건너 미국서부 L.A에서 살 기회가 생겼는데요. 그 때 놀랐습니다. 2월이 됐는데, 제가 2월이 왔는지도 몰랐거든요. 문득 달력을 봤는데 어느새 2월을 다 통과하고 3월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겨울 내내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내리꽂히지도 않았고, 모든 걸 내동댕이 치고 싶은 맘도 없었습니다. 뭐야 내 성격이 갑자기 밝아진거야? 마음의 병이 사라진거야? 어리둥절했지요.


단 하나의 차이가 있었다면, L.A엔 혹독한 겨울이 없었어요. 문자 그대로 '끔찍하게 추운 겨울'이요. 아무리 추워도 1월이면 이미 낮기온 20도를 넘어섰습니다. 겨울이라봐야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한국의 가을날씨였습니다. 혹한기, 한파, 칼바람, 극한 추위, 뭐 이런 게 없는 동네였습니다. 패딩도 필요 없었죠. 좀 두꺼운 후드티 정도면 겨울을 날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처음 만난 가볍고, 홀가분하고, 혹독하지 않은 겨울이었습니다.



그때 알았어요.

내가 매년 2월이면 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힘겨워 했는지. 매년 겨울이면 왜 그토록 몸과 마음이 아프고, 우울감에 휩싸여 땅으로 꺼져들었는지요. 전 그냥, 추웠던 거예요. 제 몸과 마음이 추위에 지쳐 떨어졌던 겁니다.


난 한국 겨울 싫어! 미국 날씨 좋아!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도 서부의 캘리포니아나 동부의 플로리다의 아주 한정된 정도 지역만 그런 날씨예요. 미 중동부를 강타한 무시무시한 극지방 한파 뉴스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허리까지 쌓인 눈으로 도시 시스템이 마비된 뉴욕 맨하튼의 모습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나를 압도했던 '극한 추위'와 '오랜 겨울'에 대한 것입니다.


그냥 추운게 아니라, 정도를 지나쳐서 지긋지긋한 추위요. 움츠리고. 덜덜 떨고. 있는대로 껴입고. 이불 밖은 다 위험해보이는 그 추위. 어금니가 딱딱 부딪치지 않게 꽉 깨무는 것도 한두번이지. 대략 11월 말부터 12월, 1월, 심지어 2월이 되도록 극심한 추위와 맞서 싸우는 전쟁같은 추위요. 한파를 이겨내고 있다고 '옛다 고생 많으니 삶의 무게라도 좀 덜어주마' 하고 세상이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닌데. 고난의 난이도만 더해진채 몇 달째 버티고 또 버티는 우리의 계절이요.



차가운 겨울엔 휴대폰 배터리도 급속도로 방전돼버리잖아요. 연식이 있을수록 더 잘 견디는 게 아니라, 더 빨리 죽기도 하고요. 하물며 전기 에너지도 그렇게 추위에 영향을 받는데, 말랑말랑한 육체와 유리알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은 어떻겠어요. 내 안의 배터리가 0퍼센트가 다 되었다는 빨간 신호였던 겁니다.


게다가 2월 4일은 입춘이라면서, 분명 봄이 시작됐다면서. 여전히 지지리도 추운 게 더 배신입니다. 겨울이 갔다는데 깨지 않은 꿈속처럼 아직도 겨울 안에 있었죠.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닙니다. 울분을 토하는 2월의 밤은 내 문제가 아니었어요.

내가 성격이 파탄인 것도,

내가 일터에서 죽을 써서도,

내 관계가 지지부진해서도,

내가 불행한 인간이어서도,

내 인생이 못나서도 아니었던 겁니다.


겨울이 넘 대단해서입니다. 지긋지긋하게 추운 롱롱 윈터가 물러설 줄을 몰랐기 때문이에요. 곧 3월이 되면 추위는 찌그러질 것이고, 나는 예정대로 회복될 겁니다. 바닥 속 지하까지 꺼져버린 내 안의 에너지가 때를 알고 피는 꽃처럼 다시 반등할 겁니다.



이걸 깨닫고 난 후, 저의 2월은 꽤 괜찮아졌습니다. 여전히 귓볼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힘겹지만. 그 원인이 내 미래가 불안해서도 아니고, 내가 무력해서도 아니고. 단지 내 몸이 지쳐서, 내 마음 에너지가 방전되어서 라고 자각하니까 급 괜찮아지더라고요.


국수 끓일 때 끓어넘치려는 순간 찬물 한컵 훅- 넣어주잖아요? 꼭 그래요. 우울과 울분이 나를 압도하려는 순간, '아 맞다, 지금 2월이지. 이건 내 상황 탓이 아니라, 영하로 떨어진 내 에너지 때문이었지. 이제 곧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올라갈거야' 생각하면 부글대던 거품이 가라앉았습니다.



혹시 지금 제가 그랬던 것처럼 겨울 내내 삶의 의욕이 바닥을 치며 절망적이라면. 버티고 버텼는데도 여전히 추운 2월인 게 참을 수 없다면.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겨울이 가야할 때를 모르고 눈치 없이 길어서 그래요. 우리가 너무 지쳐서 그래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지켜봅시다. 찬물 한번 뿌려줍시다. 그래봐야 넌 2월이다, 넌 이제 쫓겨갈 거다, 더이상 네게 휘둘리지 않을거다 하고 속삭여줍시다.


매년 그랬듯, 태양은 오늘 하루만큼 길어지고.

봄이 지금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건너오고 있어요.


2022년 또 한번의 2월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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