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요?
학교가 무엇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나요?
학교가 어떤 곳이 되길 원하나요?
교사가 되고 나서야 학교의 본질적 목적을 생각하게 되었다. 학생 때까지는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대안학교의 존재도,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필기하는 것 외 다른 형태의 배움도 잘 몰랐다. 예를 들어 나의 관심사를 깊게 공부해본다거나, 특정한 주제를 실험이나 토론 실습 등을 통해 알아가는 방식 말이다. 학교성적은 꽤나 좋은 편이었지만 시험을 위한 암기위주의 학습이라 시험 다음날이면 머릿속은 다시 초기화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샤워를 하거나 혹은 길을 걷다가 문득문득 악상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종종 mp3플레이어에 녹음을 하기도 했다. 작곡을 배우고 싶었지만 일렉기타도 겨우 한 달만 배우고 그만 두어야 했던 만큼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상 작곡을 배울 학원비는 사치였다. 하지만 경제적 이유보다 음악을 하지 않았던 더 큰 이유는 스스로 나의 재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치는 아니었지만 가수처럼 잘 부르는 실력도 아니었다. 음악 수행평가 시간에 선생님이 치는 피아노 계이름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다. 노래 부르기, 기악 평가, 계이름 맞추기 등의 수행평가 점수는 10점 만점에 8-9점정도. 만점이 아니니깐, 나는 소질이 없다고,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니라고 일치감치 결론 내렸다.
음악을 들으면 가상의 인물들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떠오른다. 정확한 춤 동작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누구나 다 이런 이미지가 그려지는 줄 알았다. 얼마 전 신랑이 “아니,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란 말을 듣고 되려 놀랐던 기억이 있다.
중1때 창작 무용 수행평가를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제대로 몸을 써 본적이 없다. 체육시간에 한 것이라고는 실기 평가를 위한 뜀틀 넘기, 줄넘기 2단 뛰기, 배구공 던지기 등 뿐. 남들 앞에서 몸을 움직이거나 춤을 추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잘, 못’으로 나뉘는 평가만 당해온 학교에서의 경험은 서툴거나 잘하지 못하는 일들을 시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익숙했던 나는 ‘아직’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시도하고 평가 당하는걸 두려워했다. 점수는 곧 ‘나 자신의 점수’였기 때문이다.
직업을 가진 후에야 정작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기술을 배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과 일을 하며 생기는 갈등을 어떻게 대화로 해결해 나갈지, 집 계약을 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 종합소득세는 무엇인지 등 사소한 일상의 영역부터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언젠가 부터는 내가 하는 생각이 내 것인지, 주입된 누군가의 생각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의 의견은 무엇인가. 있기는 한 걸까. 수동적으로 읽고 듣고 보며 감상하는 것은 잘하지만 글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춤이든 나를 표현하는 것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교사 말고도 좋아하는 게 있지 않았을까. 꼭 직업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좀 더 건강했을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먹을 걸로 해결하는 거식증이 아니라 춤이나 노래로 해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현재 학교 모습은 언제,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살면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프랑스혁명으로 절대군주제도가 무너지고 근대국가가 태동되었다. 이 혁명의 과정에서 평등교육이 요구되었는데 혁명 후의 혼란으로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는 안정된 정치적 힘이 부족했다. 이때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종교단체와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교육의 획일화를 추진한 나폴레옹은 “제국대학부”(Imperial University)를 설치, 이곳에서 허가하지 않은 어떤 교육기관도 설치할 수 없도록 하였고, 제국대학부의 학위를 획득한 사람만이 학교를 세우고 교원이 될 수 있었다. 대학과 전문학교에서 실시되던 고등교육은 지역 아카데미로 개편하여 각각은 교육장의 감독을 받게 하였다.
이로써 프랑스는 완전한 국가통제의 공교육제도를 성립시켜 현재 공교육 모습인 중앙집권적 교육행정 체제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발달한 자본주의는 교육을 받은 질 높은 노동자를 요구했다. 이렇듯 19세기 경제와 사회의 변화는 국가주도의 학교 탄생을 이끌었다.
교육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이들이 배우는 내용은 성인들의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진 것들이었으며 그 방법은 주입식이었다. 놀이는 금기시 되었고 공장의 반복적인 시스템이 학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공장의 매뉴얼처럼 암기와 시험, 처벌은 당연시 되었다. 또한 ‘지능은 고전 성경 지식과 연역적 추리 능력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봤다. 인간의 능력을 ‘학구적이냐 아니냐’로 나눈 것이다. 즉, 학구적 범주라는 특정 사고방식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국·영·수·사·과의 수업시수와 예체능교과의 수업시수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주요 과목들은 주 당 3~5시간이 배정되고, 예체능 과목들은 고작 1~2시간 뿐이다.
“교육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의 희망, 동기, 소질, 충동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살아가고 호흡한다. 현행 교육 체제는 비인격적이고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상당수를 실패하도록 만든다.“
<켄 로빈슨(1950-2020) 세계적 교육학자>
학교가 탄생한 19세기 경제와 사회의 모습은 현재 2023년과 너무나 다르지만 학교는 그때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장 매뉴얼을 암기했던 것처럼 당시 학교에서도 암기와 시험이 필수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암기만 하고 있다. 수업시간표는 관심사가 다른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가 똑같다. 50분간 수학, 국어, 영어라는 과목을 토막 내어 가르친다. 오늘 50-55페이지를 배웠다면 다음 시간에는 70페이지까지 진도를 나간다. 당신이 이해했든 못했든 기다려주지 않는다. 교과서는 한 학기 내에 끝내야 하고 중간고사 시험범위는 무조건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한 배움인지 어느새 묻지 않는다.
학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입시, 경쟁, 암기만이 학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일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세계3대 심리학자인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불행하게도 부모들은 훌륭한 심리학자도 탁월한 교육자도 아니다. (중략) 오늘날의 가정교육은 우리가 기대하는 인간 사회의 가치 있는 동료들을 길러 내기에 부적합하다. (중략) 아이들의 잘못된 성장을 보상해 주고 개선된 상황을 가져오기 위해서 어떤 제도가 필요할지 자문할 때 우리는 학교라는 제도에 주목하게 된다. (중략) 학교는 모든 아이가 자신의 정신적 발달 단계에서 만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아이들에게 유리한 정신적 발달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어떤 학교를 좋은 학교라도 말할 수 있으려면 그 학교는 정신기관의 발달 조건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학교를 좋은 학교라 부를 수 있을까? 객관식 문제처럼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함께 고민하고 좀 더 나은 길을 찾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