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은 직장암 투병환자셨다.
작년 4월, 위급한 상황에 응급실에 실려가셨고 힘들게 장루 수술을 마치셨다. 요양병원에서 잘 회복해서 퇴원하겠다는 아버님의 다짐과는 무색하게 의사는 2-3개월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수 없었고 나의 남편은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함께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유난히 날 예뻐해 주셨던 아버님. 남편이 전한 시한부 소식에 나도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에겐 얼마 남지 않은 남편과 아버지의 시간을 최대한 배려해 주자는 마음뿐이었다. 매주 주말 광주의 요양병원으로 아버님을 뵈러 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였다.
아버님은 그렇게 6개월을 버텨주셨다.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끝을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9월부턴 급격하게 통증을 호소하셨고 더 야위셨고 그리고 곧 산소호흡기와 진통제에 의존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월. 셋째 주에는 코로나에 걸린 나 때문에 우리 부부는 아버님을 뵈러 갈 수 없었다.
내 손을 꼭 잡고,
“어떻게 네가 내 며느리가 되었는지,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인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10월 25일, 잠이 들었던 우리는 전화 진동소리에 잠을 깼다.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전화. 한동안 멍하던 남편은 짐을 챙겨 그 새벽을 운전해서 광주로 내려갔다.
1시간 후, 전화기 너머 울부짖는 나의 남편. 위독하신 게 아니라 돌아가신 것이라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임종을 지키지 못해 너무 한스럽다고, 임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고. 남편은 서럽게 엉엉 울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영정사진을 보자 더 눈물이 났다. 불과 4년 전인데, 이렇게나 밝고 건강하셨던 아버님이 이제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장례식 둘째 날, 나의 친정식구들이 모두 빈소를 찾았다. 아빠를 보자마자 울던 남편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우리 아빠는 말없이 남편을 안아주고 토닥여 주었다.
“네게는 아직 아빠가 한 명 더 있지 않느냐.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라.”
잘 참고 있었는데 우리 둘은 모두 그때 터져버렸나 보다.
입관식 때 울지 않고 잘 보내드려야 한다고.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니 꼭 눈에 잘 담아도라는 친구의 말. 수의를 입고 누워계신 아버님을 보자 더 이상 고통으로 찡그리지 않으셔도 되겠구나라는 다행스러운 마음과, 더 이상 옆에서 남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실 수 없겠구나 하는 안타까움 마음이 교차했다. 향년 74세,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셨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유품을 정리해야 했고 해결해야 할 행정처리도 많았고 부재 또한 실감해야 했다.
그렇게 11월이 왔다.
“자기야, 나 점심시간에 아버지랑 늘 통화했는데, 나 이제 점심시간에 뭐해야 할까?”
나의 짝꿍은 한동안 많이 공허하겠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1년이 되었다. 아빠가 아픈 요즘, 아버님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다.
그리운 아버님, 그곳에서는 고통없이 평안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