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누구에게나 마중 나온 우산이 필요하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비가 쏟아지는 쌀랑한 가을날, 교문 앞에 웅성이며 모인 우산들. 나와 같이 나온 애들은 안녕을 외치고 하나 둘 자기를 찾아온 우산 속으로 쏙 사라져 버린다. 나는 고개를 쳐들어가며 나를 기다리는 우산을 찾는다. 설마 없더라도 이렇게 많은 애들 중에 하나쯤은 나 같은 애가 있겠지, 그럼 머리 위에 박스라도 같이 얹어 쓰고 집에 가야지, 하는데 그 많은 애들이 조금씩 다 사라지고 없다. 텅 빈 교문, 텅 빈 운동장, 그만큼 텅 비어버린 내 눈동자. 커다란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다.
이 세상 사람들 다 마중 나온 우산 하나씩은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없는 날.
오늘은 내가 운이 좋지 않은 날인가 보다, 하고 짐짓 어른인 척했다가 불현듯 서럽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다가 갑자기 화가 난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어떻게 아무도 내 마중을 안 나와 줄 수가 있어? 고까운 마음이 든다. 이젠 다 필요 없어 내 마음대로 막 살 거야, 하면서 화풀이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하지?
괜히 쿵쾅거리며 거실을 걷는다. 커튼도 거칠게 확 젖혀보고 컵도 우악스럽게 내려놓다가 느끼해서 먹지 않고 있던 매운 감자칩 봉지를 뜯는다. 기름기에다 짜서 속이 울렁이기 시작하고 입에는 불이 난다. 앉은자리에서 한 봉지를 거의 끝내고 나니 정신이 든다. 서러워서 어디다 화풀이를 하고 싶었는데, 외려 애먼 나에게 화풀이를 해 버렸다.
가만히 앉아, 훌쩍이는 내 안의 열 살 아이를 바라본다. 미안해. 네가 원한 건 뭐니? 아이는 뜸을 들인다. 괜찮아, 시간을 줄게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서른둘의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훌쩍이면서도 내가 아직 거기 있는지를 곁눈질하던 아이가 개미 같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나를 마중 나와줄 우산이 필요했어요. 사실 우산이 없어도, 같이 빗속을 뛰어갈 사람이 있었다면 아무래도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야 했어요. 쫄딱 젖어 집에 온 나를 보며 호들갑 떨고 마음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또 괜찮았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오늘, 정말로 끝까지 혼자였어요.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그제야 아이를 안는다. 그랬구나, 정말 그랬구나. 넌 강한 아이지만 세상 누구도 혼자서 강할 순 없는데 너는 오늘 혼자여서 많이 힘들었구나. 널 비 맞게 해서, 혼자 오게 두어서 미안해. 그러고도 집에서 널 맞아주지 못하고, 빈 집 문을 열고 들어와 혼자 있게 두어서 미안해.
오들오들 떠는 아이를 위해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주섬주섬 야채를 꺼낸다. 애호박과 감자, 양파를 깍둑 썰고 깊은 냄비에 볶는다. 재료가 자작하게 잠기도록 물을 붓고 불을 올려 뜨겁게 끓인다. 다 익으면 불에서 내려 핸드믹서로 덩어리가 없도록 곱게 간다. 버섯 페스토가 남았네? 고다 치즈 부스러기와 함께 넣고 잘 녹도록 휘휘 젓는다. 그새 조금 식어 먹기 좋게 따뜻한 수프가 되었지만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추웠을 아이를 위해 다시 한번 불에 올려 팔팔 끓인다. 한 숟가락씩 떠서 후후 불어 천천히 먹으렴. 너에게 필요했을 온기가 이렇게나 많이 있어. 더 이상 찾아다니지 않아도 돼.